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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블로그] 장 발장과 김길태 그리고 양

등록 2010-03-15 14:03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장 발장을 다시 넘길 것인가. 그것은 옳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다면 장 발장을 자유롭게 놓아 줄 것인가. 그것도 옳지 않은 일이었다. 장 발장의 존재는 그를 난감하게 만들었다. 그의 전 생애를 통해 이룩한 가치관이 하루 아침에 무너져 내린 것이었다.’

레미제라블에 나오는 자베르의 고뇌 장면이다. 그러나 작가는 자베르에게만 고뇌를 한정시키지 않는다. 자베르라는 개인을 넘어 경찰에게, 사법부에게, 끝내는 사회 전체, 모든 시민들에게 묻는다. 과연 장 발장을 가두는 것은 옳은 일인가. 독자는 장 발장이 선의의 인물이라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선한 인물인 장 발장을 철책에 집어넣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나 만약 장 발장이 악인이라면? 테르니다에같은 표독스러운 인물상이라면 어떨까? 심지어 뒷골목 3인방과 같은 살인도 서슴지 않는 극악무도한 인물이라면? 이제는 그 여부가 갈릴 것이다.

‘양이 사람을 잡아먹는다’ 토마스 모어가 남긴 명언이다. 당시 인클로저 운동에 의해 도시로 쫓겨 난 농민들의 경범죄를 사형으로 다스리던 세태를 풍자한 것이다. 그렇다면 토마스 모어가 비판한 영국의 형벌 제도와 빅토르 위고가 고발한 프랑스의 사법 제도보다 우리의 ‘수준’은 얼마나 더 발전했는가.

헌재가 14년 만에 다시 사형 제도에 합헌 판결을 내렸다. 사형제도는 낙태, 안락사(또는 존엄사)와 함께 인권 분야 논쟁의 단골 메뉴였다. 그러나 나는 낙태와 안락사(존엄사)와 달리 사형제에 있어서만큼은 단호하게 말할 수 있다. 헌재는 사람보다 돈을 택했노라고. 우리가 죄수를 사형시키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찮은 보복논리? 범죄 예방 효과? 항상 그럴듯한 근거로 치장하지만 사형제의 존속 이유는 오로지 돈이다. 국가의 입장에서 국민들이 ‘누가 누구를 죽였고, 따라서 이 자를 죽여야 한다’같은 논리는 통하지 않는다. 피해자가 국가적으로 중요 인물이 아니라면, 뻔뻔스러운 국사는 4천 800만의 인구 카운트에서 숫자 1을 뺄셈할 뿐이다.(국가는 옳고 그름을 따져 배척하는 ‘정의’로운 기관이 절대 아니다.) 사형제도가 범죄 예방 효과가 있다는 가증스러운 논리가 거짓이라는 것도 국가가 제일 잘 알 수밖에 없다. 한국 전쟁, 유신 시대를 거치면서 국가가 얼마나 많이 죽이고, 억압했나. 그러고도 범죄율이 급감했나? 시민 운동 안 일어났나? 하기야 붕어만도 못한 붕어빵들이 기억 할 리 없지. 결국 사형제도를 존속시키는 이유는 단 하나. 금전적인 문제만이 남는다. 국가는 조심스럽게 계산을 한다. 죄수들을 무기 징역시키고 평균 수명 XX세까지 산다고 가정한 후, 그 동안 충당할 콩 값, 쌀 값 옷 값. 그리고 무기역이 아닐 경우, 그 동안 들어 갈 콩 값, 쌀 값, 옷 값에 추가로 두부 값까지 더한다. 여기서 부수적으로 교도소 운영 비용, 전기세, 수도세을 추가한 뒤 죄수들을 노동시켜 버는 돈을 뺀다. 그리고 국가는 이것이 적자임을 깨닫는다. 이에 국가는 살려둘 가치가 없는 사람들(죽여도 욕먹지 않으며, 나가봐야 돈도 못 벌어 올 사람들)을 추려내서 처형시킨다. 이렇게 짭짤하게 비용을 최소화시키니. 사형제도를 버리기 아까운 것이다.

밑도 끝도 없는 음모론 같은가? 하지만 이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인류 역사에서는 수 없이 일어났다. 산업 혁명기 영국이 도시 빈민을 처형한 이유가 무엇인가? 도시를 위협하는 온갖 위험들로부터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거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시시껄렁한데 쓸 돈은 없기에 영국 정부는 도시 빈민들을 무작정 잡아 들였다. 그런데 잡아 놓고 보니, 이제는 더 이상 수감할 감옥이 없던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을 풀어줬다가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영국 정부가 궁여지책으로 선택한 것은 사형이었다. 영국 정부는 이런 조치가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심어줘 범죄를 예방한다는 부수적인 효과도 노렸다. 그러나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농촌에서 쫓겨난 도시 빈민들은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빵을 훔쳤으며, 무단으로 노숙을 했으며, 지금으론 상상도 못 할 일들이 범죄를 처리 되어 많은 사람들이 사형 당했다. 모어는 ‘유토피아’에서 이런 멍청한 짓을 비판했으며 그것을 ‘양이 사람을 잡아 먹는다.’라고 표현했다. 당시 영국 정부가 한 멍청한 짓거리와 현재 우리의 사형제도와 다른 점이 무엇인가. 우리는 좀 더 나은 환경에서 따뜻하게 살고 있다는 것? 영국 빈민들은 경범죄로 죽었지만, 우리가 죽이는 자들은 강력범이라는 점? 나는 이 질문에 이렇게 답하고 싶다. 과연 모어는 빈민들이 작은 범죄로 죽는 것을 통탄했을까. 아니면 그들에게 법을 범하도록 한 세상을 통탄하였을까. 모어나 위고나 그들이 저지른 범죄를 따지지 않는다. 그들의 눈에는 한평생 정직하게 살아 온 장 발장이나, 한 때 부유했으나 몰락하여 사람등 쳐먹고 사는 테르나디에나, 사람을 눈 깜박 안하고 죽이는 뒷걸먹 깡패들이나 모두 한 시대의 피해자일 뿐이다. 그들에 대한 아무 조처도 없다면, 우리는 본질적인 면에서 그들이 꼬집은 사회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우리나라의 경우 이 사형제도와 떼 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국보법이다. 물론 지금은 거의 묻혀 버린 법이기에 국보법을 꺼내 드는 것은 케케묵은 논쟁이라 할 지도 모르겠으나, 바로 얼마 전 서거하신 김대중 대통령의 경우나, 아직도 감옥에 있는 양심수들을 생각하면 그리 먼 일도 아니다. 사형제도와 국보법을 연관 시킬 때 중점적으로 보아야 할 것은 사형제의 잔혹성이다. 일말의 가능성도 주지 않고 사람들의 숨통을 끊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일이었던가. 그 목숨이 범죄자의 것이든, 일반 사람의 것이든 중요하지 않다. 형벙의 기본적인 목적은 범죄자의 교화에 있다. 이것이 범죄자들을 때리고, 죽여서 국민을 겁주는 것으로 변질 된다면 전체주의와 무엇이 다를까. 사회의 중범죄들을 비롯해 대부분의 범죄자들은 사회에서 낙오된 사람들이다. 입을 것 못 입고, 먹을 것 못 먹고, 어떠한 형태로든 사회에서 따돌림 당한 사람들이다. 평생을 이런 피해의식에 잡혀 살아오다, 범죄를 저지르니 국가라는 흉폭한 놈이 나타나서 감방에 가둬 버린다. 국가라는 작자가 해주는 것이라고는 철책에 가둔 것 밖에 없으니, 반성 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 뻐뻔해 보이는 그들의 태도에는 이런 심리가 깔려있다. 그들에게 형벌을 가한다면 그보다 더한 코미디도 없을 것이다. 맙소사! 그들을 죽인다고? 한평생 인간답게 살 수 없도록 방치해 온 국가가 그들을 죽인다고? 자신의 잘못을 뉘우칠 기회도 주지 않고, 그런 노력도 기울이지 않은 국가에게 ‘정의’라는 이름은 사치다.

수구 언론이 하는 작태는 더욱 가관이다. 그들은 언론의 역할은 만사 제쳐 놓고 여론 몰이에 나선다. 이런 새끼는 살 가치가 없는 쓰레기들이라거나, 피해자와 그 가족들의 참상, 는물 나는 이야기를 싣는다. 그러면서 사형제 폐지를 주장하는 새끼들은 모두 가해자와 똑같은 놈이라고 매도하며, 진보 세력을 피도 눈물도 없는 자들이라고 흑색 선전을 편다. 남의 슬픔을 정치적 도구로 사용하는 자들이 피해자(혹은 그들의 가족)들의 인권을 생각한다면, 얼마나 더 생각하겠는가. 물론 수구 언론들의 그런 추태는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다. 더 걱정스러운 것은 피해자들을 보는 네티즌들의 시선이다. 네티즌들은 피해자(이들 역시 어린이, 여성, 노인과 같은 사회적 약자이다.)를 보면서 눈물을 글썽인다. 허나 이것이 그토록 애닳게 말하는 피해자들의 인권 혹은 그들의 삶에 도움이 될 것인가. TV, 모니터 화면에서 눈물을 흘리고, 가해자에게 욕을 실컷 하면 그들의 인생이 조금이라도 나아질까? 아니, 오히려 그것은 사회적 낙인이다. 피해자, 그리고 그 가족들은 참으로 불쌍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보살핌이 필요한 존재라며 억지로 끌어안으려 한다. 물론 그들은 괴롭다. 하지만 그전에 그들의 일상이 있다. 우리는 일상으로 빨리 돌아 갈 수 있도록 하는 사회적 시스템을 만들어야지, 그들의 일상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 그들을 마치 제물로 바친 희생양으로 보고 동정하지 마라. 그들의 인생을 단정 짓지 마라.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동정 따위가 아닌 희망찬 격려의 메시지다.


내가 무엇보다 사형제도에 열을 올리는 이유는 사형제도의 존폐가 한 사회의 교육·복지 수준을 보여 주는 기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가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고, 그 교육의 질은 한 사회 구성원의 도덕성, 인격과 직결 된다. 만약 우리나라의 교육이 현재와 같은 치열한 입시 경쟁이나, 계급 형성의 수단이 아닌, 학문의 연구와 개인의 성취에 있었다면 범죄율은 급격히 하락 할 것이다. 지금처럼 유전유식 무전무식의 사회에서야 교육은 본질을 잃어버리게 되고, 개인의 인격 수준은 떨어질 수 밖에 없다. 강력범들이(그들이 싸이코패스이건 아니건) 학교에 앉아 수업을 받으며, 교사가 진정으로 천부인권을 역설 했다면, 어찌 새겨듣지 않을 것인가. 그들에게 교육을 허해야 한다. 복지 제도의 경우 더욱 중요하다. 죄수들의 교화, 피해자 후생 같은 것도 복지 제도의 일환일 뿐만 아니라, 교육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게 구성원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교육의 질이 아무리 높다 한들, 국민 모두를 안빈낙도하는 삶을 즐기는 선비로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사회가 어느 정도 이상 물질적으로 안정되고, 언제 뒤쳐질지 모르는 불안감을 떨쳐 낼 때, 따뜻한 사회의 기반이 마련되는 것이다. 더 이상 얻을 것도 없고 무언가 잃을 걱정도 없을 때, 범죄율을 하락하게 되어 있다. 반면 우리 사회는 복지 국가는커녕, 제대로 된 교육이나 사회 인프라를 구축하지 못 하고 있다. 이것이 새로운 계급의 형성과 심화를 가져 왔고,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각박한 관념이 강력 범죄의 원인이 되고 있다. 그리고 그 수를 도저히 감당 할 수 없을 때 사형제도라는 폭압적인 형벌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 언론이 다시 한번 정당화 시키면서 국민들의 인권 인식 수준이 다시 한번 떨어진다.

물론 사형제도를 없앤다고 해서 우리 사회가 복지 국가로 나아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의의는 크다. 사형제도의 폐지는 국가가 국민 개개인을 보는 인식의 전환을 뜻한다. 이것은 사형의 실제 집행 여부와 관련 없이, 사형제도 자체가 폐지되어야 하는 이유다. 또한 사형제도의 폐지는 우리가 복지 국가가 될 수 있는 기반 조건으로 그 역량의 마련이라 볼 수 있다. 범죄자를 단순히 범죄자로 보지 않으며, 사회적 책임을 지겠다는 증거이기 때문에 좀 더 폭 넓은 해석이 가능하다. 그런데 이런 사형제도를 헌재에서 합헌 처리했다니, 통탄 할 일이다. 사형제도는 낙태나 안락사(존엄사)와 달리 가치 판단의 요소가 아니다. 이 나라 헌법에는 사람보다 돈이라는 조항이 있기라도 한 것인가. 국민을 폭력으로 다스리는 무력 통치의 표상인 사형제도가 사법부의 손에 의해 인정된 것을 본다면, 이 나라에는 토마스 모어와 같은 양심적 대법관은 존재하지 않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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