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남순씨 시민군 밥해먹이다 체포
계엄군에 짐승처럼 맞고 자궁 들어내
“미국에서는 훨훨 날 것 같았는데 광주에만 오면 아직도 가슴이 답답해져요!”
이남순(48·전남 곡성군 곡성읍)씨는 16일 오후 5시 광주 5·18 국립묘지 들머리에 섰다. 눈가엔 물이 맺혔다.
1980년 5월 이씨는 곧 하얀 면사포를 쓸 꿈에 부푼 스물셋의 평범한 수예점 직원이었다. 그러나 18, 19일 가게 부근에서 계엄군에게 두들겨맞아 피를 흘리는 학생과 시민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이들의 피를 닦아주며 ‘자연스레’ 항쟁에 휘말려들었다. 다른 여성들과 밥을 지어 시민군 지도부가 있던 도청으로 음식을 날랐다. 26일 오후 계엄군 진압이 임박하자, 시민군 지도부는 여성들을 내보냈다. 그러나 이씨는 “모두 다 가버리면 밥은 누가 해주냐”는 생각에 발길을 되돌렸다. 결국 27일 새벽 3시께 광주여자기독교청년회관에서 밥을 짓던 중 계엄군에게 붙잡혔다. 무차별 구타를 당했다. 상무대 영창과 경찰서, 국군통합병원을 오가면서 45일 동안 생지옥을 겪었다. 7월 초 훈방됐으나, 몸은 이미 만신창이가 됐다. 하혈을 제대로 치료하지 못해 자궁도 들어내야 했다. 약혼자 김아무개(당시 29)씨는 ‘폭도가 된 여자 친구’를 피해 인천으로 이사하고 연락을 끊었다. 아버지(70)마저 ‘사태에 참여한 딸은 자식이 아니다’라고 외면하다 화병으로 쓰러졌다. 아예 딸의 주민등록도 파버렸다. 이씨는 “무서워 위로받고 싶었는데 혼자 버려진 느낌이었다. 아버지께 미안하면서도 미운 마음이 들어 지금도 많이 운다”고 말했다. 공장에 취직해도 번번이 해고됐다. 울며 겨자먹기로 84년 10월 미국행 밀항선을 탔다. 낯선 땅 뉴욕에서 식품점 종업원 자리를 겨우 구했다. 또다시 버려지는 것이 두려워 오직 일만 했기에 3년여 만에 9명의 직원을 거느리는 매니저가 됐다. 차츰 자리가 잡히자 동생 셋을 차례로 미국으로 불러들여 외로움을 달랬다. 하지만 “비행기를 보면 펄쩍 높이 뛰어 꼬리를 잡고 한달음에 날아가고 싶을 정도”로 한국이 그리웠다. 이씨는 지난해 여름 귀국해 광주민주화운동 보상 신청을 내고, 곡성 친구 집 방 한칸을 얻어 살림을 하고 있다. 뉴욕에 있는 동생들이 돌아오라고 하지만 “고향의 강을 보며 살고 싶어서” 눌러앉았다. 지난해 12월에는 부모의 이혼으로 오갈 데 없는 아이(5)를 입양했다. 지금은 “아들이 유치원에 갔다온 뒤 재잘재잘 이야기하는 것을 듣는 게 큰 기쁨”이다. 이씨는 이날 당시 경찰서 유치장을 찾아 건강을 걱정해주던 ‘광주의 어머니’ 고 조아라 선생의 묘소에 국화 한송이를 바쳤다. 그는 “그 해 오월이 없었으면 아마 평범한 주부로 살고 있을 것”이라며 “그 때 군인들도 양심에 아픔을 느끼겠죠”라며 씁쓸하게 웃었다. 광주/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편집 2005.05.17(화) 18:53
1980년 5월 이씨는 곧 하얀 면사포를 쓸 꿈에 부푼 스물셋의 평범한 수예점 직원이었다. 그러나 18, 19일 가게 부근에서 계엄군에게 두들겨맞아 피를 흘리는 학생과 시민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이들의 피를 닦아주며 ‘자연스레’ 항쟁에 휘말려들었다. 다른 여성들과 밥을 지어 시민군 지도부가 있던 도청으로 음식을 날랐다. 26일 오후 계엄군 진압이 임박하자, 시민군 지도부는 여성들을 내보냈다. 그러나 이씨는 “모두 다 가버리면 밥은 누가 해주냐”는 생각에 발길을 되돌렸다. 결국 27일 새벽 3시께 광주여자기독교청년회관에서 밥을 짓던 중 계엄군에게 붙잡혔다. 무차별 구타를 당했다. 상무대 영창과 경찰서, 국군통합병원을 오가면서 45일 동안 생지옥을 겪었다. 7월 초 훈방됐으나, 몸은 이미 만신창이가 됐다. 하혈을 제대로 치료하지 못해 자궁도 들어내야 했다. 약혼자 김아무개(당시 29)씨는 ‘폭도가 된 여자 친구’를 피해 인천으로 이사하고 연락을 끊었다. 아버지(70)마저 ‘사태에 참여한 딸은 자식이 아니다’라고 외면하다 화병으로 쓰러졌다. 아예 딸의 주민등록도 파버렸다. 이씨는 “무서워 위로받고 싶었는데 혼자 버려진 느낌이었다. 아버지께 미안하면서도 미운 마음이 들어 지금도 많이 운다”고 말했다. 공장에 취직해도 번번이 해고됐다. 울며 겨자먹기로 84년 10월 미국행 밀항선을 탔다. 낯선 땅 뉴욕에서 식품점 종업원 자리를 겨우 구했다. 또다시 버려지는 것이 두려워 오직 일만 했기에 3년여 만에 9명의 직원을 거느리는 매니저가 됐다. 차츰 자리가 잡히자 동생 셋을 차례로 미국으로 불러들여 외로움을 달랬다. 하지만 “비행기를 보면 펄쩍 높이 뛰어 꼬리를 잡고 한달음에 날아가고 싶을 정도”로 한국이 그리웠다. 이씨는 지난해 여름 귀국해 광주민주화운동 보상 신청을 내고, 곡성 친구 집 방 한칸을 얻어 살림을 하고 있다. 뉴욕에 있는 동생들이 돌아오라고 하지만 “고향의 강을 보며 살고 싶어서” 눌러앉았다. 지난해 12월에는 부모의 이혼으로 오갈 데 없는 아이(5)를 입양했다. 지금은 “아들이 유치원에 갔다온 뒤 재잘재잘 이야기하는 것을 듣는 게 큰 기쁨”이다. 이씨는 이날 당시 경찰서 유치장을 찾아 건강을 걱정해주던 ‘광주의 어머니’ 고 조아라 선생의 묘소에 국화 한송이를 바쳤다. 그는 “그 해 오월이 없었으면 아마 평범한 주부로 살고 있을 것”이라며 “그 때 군인들도 양심에 아픔을 느끼겠죠”라며 씁쓸하게 웃었다. 광주/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편집 2005.05.17(화)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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