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사회 사회일반

순국·순교자로 사형순간에도 “동양평화 기원”

등록 2010-03-25 19:30수정 2010-03-25 22:14

안중근 의사의 유족 대표인 토니 안(왼쪽)과 김양 보훈처장이 25일 오후 서울 용산 백범기념관에서 열린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 추모제향’이 끝난 뒤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탁기형 선임기자 <A href="mailto:khtak@hani.co.kr">khtak@hani.co.kr</A>
안중근 의사의 유족 대표인 토니 안(왼쪽)과 김양 보훈처장이 25일 오후 서울 용산 백범기념관에서 열린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 추모제향’이 끝난 뒤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탁기형 선임기자 khtak@hani.co.kr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 죽음의 의미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안중근 의사는 중국 뤼순 감옥 사형장에서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 묵도를 올렸다. 사형집행을 앞두고 흰 천이 눈 앞에 둘러진 채였다. 고향에서 보내온 흰 명주 저고리와 검은 바지 차림에, 가슴엔 십자가를 달고 있었다. 당시 집행을 지켜본 일본인 통역 소노키 세이키는 “동양평화의 삼창을 하도록 허가해 줄 것을 제의했는데 전옥(감옥장)은 그렇게 할 수 없다는 뜻을 설명하고 특별히 기도를 드릴 것을 허가했다”고 상부에 올리는 보고서에 썼다.

“남의 나라 탈취는 죄악…이토 사살은 죄악 제거”
“동양평화=하느님 뜻” 예수 처형당한 날 사형 희망

2분여간 기도를 마친 안의사는 두 사람의 간수에게 이끌려 태연하게 교수대에 올랐다. 때는 10시 4분께. 10시 15분, 감옥의는 절명을 선언했다. 주검은 교회당으로 옮겨졌고, 공범자로 감옥에 갇혀 있던 우덕순·조도선·유동하 등 안 의사의 동료들이 특별히 예배를 올렸다. 사형 집행에 참여한 미조부치 검찰관, 구리하라 감옥장 앞에서 그가 남긴 유언은 이렇다. “나의 행동은 오직 동양 평화를 도모하려는 성의에서 나온 것으로 일관 관헌들도 이 뜻을 이해하고 동양의 평화를 기할 것을 기원한다.” 그는 수감중 제국주의적 침략론에 다름 아닌 이토 히로부미의 ‘대동아공영권론’에 맞서 한-중-일이 독립 국가로서 협력해야 한다는 <동양 평화론>을 집필했다.

이날 사형집행은 1910년 2월 14일 사형선고로부터 40여일밖에 지나지 않은 때 서둘러 이뤄졌다. 그는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어머니인 조마리아씨는 안 의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혹시 늙은 애미를 남겨놓고 맏아들인 네가 먼저 죽는 것이 동양 유교 사상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망설일까봐 일러둔다”며 사람을 죽였으니 당당히 죽음을 맞으라고 당부했고, 안 의사는 항소를 포기했다.

안 의사의 죽음은 나라를 위한 순국일 뿐 아니라, 천주교 신자로서의 순교이기도 했다. 안 의사가 어머니께 드린 유언은 “영원한 나라 천국에서 뵙기를 확신하며 기도드립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다 주님의 명에 달려있으니 부디 마음 평안히 계시기 바랍니다. 분도(큰아들)를 앞으로 꼭 사제가 되도록 키워주시고 하느님께 바쳐주시기 바랍니다”였다.

그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서 동양의 평화는 하느님의 뜻이기도 하다고 믿었다. 공판 과정에서 검찰관이 안 의사의 신앙을 빗대 “천주교에서도 사람을 죽이는 것은 죄악이 아니냐”고 묻자, 안 의사는 “남의 나라를 탈취하고 사람의 생명을 빼앗고자 하는 자가 있는데도 수수방관하는 것은 더 큰 죄악이므로 나는 그 죄악을 제거한 것일 뿐이다”라고 답한 것도 그런 차원이었다.

순국이자 순교로서 그가 처형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사형 집행일을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 처형을 당한 날인 3월 25일로 해 줄 것을 희망했다는 데서도 드러난다. 그러나 이 날은 순종의 생일인 건원절이기도 해 사형집행은 26일로 연기됐다. 안 의사는 항소를 포기한 뒤 1909년 12월부터 집필하기 시작한 자서전 <안응칠 역사>(안응칠은 안중근의 어릴 적 이름)를 탈고한 데 이어 <동양평화론> 집필에도 박차를 가했다.


3월 9일에는 자신을 천주교 신자로 세례를 준 홍석구(조셉 빌렘) 신부를 만나 고해성사를 하며 죽음을 준비했다. 안 의사는 사형 하루 전 마지막으로 면회를 온 두 동생인 정근과 공근에게 “사람은 한번은 반드시 죽는 것이므로 죽음을 일부러 두려워할 것은 아니다. 인생은 꿈과 같고 죽음은 영원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걱정할 것이 없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순국한 지 83년 만인 1993년에 천주교 신자로서의 권리를 되찾았다. 당시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인 고 김수환 추기경은 추도미사에서 “독립전쟁 과정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것은 그의 애국심을 나타냈고 그리스도 교리를 위반하지 않은 정당방위였다”고 평가했고, 천주교 신자로서의 복권을 선포했다.

정유경 기자 edge@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사회 많이 보는 기사

전광훈 ‘지갑’ 6개 벌리고 극우집회…“연금 100만원 줍니다” 1.

전광훈 ‘지갑’ 6개 벌리고 극우집회…“연금 100만원 줍니다”

하늘이 영정 쓰다듬으며 “보고 싶어”…아빠는 부탁이 있습니다 2.

하늘이 영정 쓰다듬으며 “보고 싶어”…아빠는 부탁이 있습니다

‘윤석열 복귀’에 100만원 건 석동현…“이기든 지든 내겠다” 3.

‘윤석열 복귀’에 100만원 건 석동현…“이기든 지든 내겠다”

검찰, 김정숙 여사 ‘외유성 출장’ 허위 유포 배현진 불기소 4.

검찰, 김정숙 여사 ‘외유성 출장’ 허위 유포 배현진 불기소

‘장원영’이 꿈이던 하늘양 빈소에 아이브 근조화환 5.

‘장원영’이 꿈이던 하늘양 빈소에 아이브 근조화환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