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의 유족 대표인 토니 안(왼쪽)과 김양 보훈처장이 25일 오후 서울 용산 백범기념관에서 열린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 추모제향’이 끝난 뒤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탁기형 선임기자 khtak@hani.co.kr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 죽음의 의미
“동양평화=하느님 뜻” 예수 처형당한 날 사형 희망 2분여간 기도를 마친 안의사는 두 사람의 간수에게 이끌려 태연하게 교수대에 올랐다. 때는 10시 4분께. 10시 15분, 감옥의는 절명을 선언했다. 주검은 교회당으로 옮겨졌고, 공범자로 감옥에 갇혀 있던 우덕순·조도선·유동하 등 안 의사의 동료들이 특별히 예배를 올렸다. 사형 집행에 참여한 미조부치 검찰관, 구리하라 감옥장 앞에서 그가 남긴 유언은 이렇다. “나의 행동은 오직 동양 평화를 도모하려는 성의에서 나온 것으로 일관 관헌들도 이 뜻을 이해하고 동양의 평화를 기할 것을 기원한다.” 그는 수감중 제국주의적 침략론에 다름 아닌 이토 히로부미의 ‘대동아공영권론’에 맞서 한-중-일이 독립 국가로서 협력해야 한다는 <동양 평화론>을 집필했다. 이날 사형집행은 1910년 2월 14일 사형선고로부터 40여일밖에 지나지 않은 때 서둘러 이뤄졌다. 그는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어머니인 조마리아씨는 안 의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혹시 늙은 애미를 남겨놓고 맏아들인 네가 먼저 죽는 것이 동양 유교 사상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망설일까봐 일러둔다”며 사람을 죽였으니 당당히 죽음을 맞으라고 당부했고, 안 의사는 항소를 포기했다. 안 의사의 죽음은 나라를 위한 순국일 뿐 아니라, 천주교 신자로서의 순교이기도 했다. 안 의사가 어머니께 드린 유언은 “영원한 나라 천국에서 뵙기를 확신하며 기도드립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다 주님의 명에 달려있으니 부디 마음 평안히 계시기 바랍니다. 분도(큰아들)를 앞으로 꼭 사제가 되도록 키워주시고 하느님께 바쳐주시기 바랍니다”였다. 그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서 동양의 평화는 하느님의 뜻이기도 하다고 믿었다. 공판 과정에서 검찰관이 안 의사의 신앙을 빗대 “천주교에서도 사람을 죽이는 것은 죄악이 아니냐”고 묻자, 안 의사는 “남의 나라를 탈취하고 사람의 생명을 빼앗고자 하는 자가 있는데도 수수방관하는 것은 더 큰 죄악이므로 나는 그 죄악을 제거한 것일 뿐이다”라고 답한 것도 그런 차원이었다. 순국이자 순교로서 그가 처형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사형 집행일을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 처형을 당한 날인 3월 25일로 해 줄 것을 희망했다는 데서도 드러난다. 그러나 이 날은 순종의 생일인 건원절이기도 해 사형집행은 26일로 연기됐다. 안 의사는 항소를 포기한 뒤 1909년 12월부터 집필하기 시작한 자서전 <안응칠 역사>(안응칠은 안중근의 어릴 적 이름)를 탈고한 데 이어 <동양평화론> 집필에도 박차를 가했다.
3월 9일에는 자신을 천주교 신자로 세례를 준 홍석구(조셉 빌렘) 신부를 만나 고해성사를 하며 죽음을 준비했다. 안 의사는 사형 하루 전 마지막으로 면회를 온 두 동생인 정근과 공근에게 “사람은 한번은 반드시 죽는 것이므로 죽음을 일부러 두려워할 것은 아니다. 인생은 꿈과 같고 죽음은 영원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걱정할 것이 없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순국한 지 83년 만인 1993년에 천주교 신자로서의 권리를 되찾았다. 당시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인 고 김수환 추기경은 추도미사에서 “독립전쟁 과정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것은 그의 애국심을 나타냈고 그리스도 교리를 위반하지 않은 정당방위였다”고 평가했고, 천주교 신자로서의 복권을 선포했다. 정유경 기자 edge@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