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 안 의사 관련 ‘신화와 진실’
‘위국헌신’ 사형직전 유묵인지 불분명
‘위국헌신’ 사형직전 유묵인지 불분명
진실의 반대는 거짓이 아니라 신화라는 말이 있다. 오류가 반복되다 보면 사실로 굳어지고 100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다 보면 어느덧 잘못된 사실에 근거를 둔 신화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백범어록>을 펴내 백범 김구 선생에 대해 잘못 알려진 사실들을 바로 잡으려 했던 도진순 창원대 교수(사학)는 ‘백범 신화’를 깨야 백범이 보인다고 지적했다. 그는 백범이 쓴 것으로 알려졌던 대단한 명문인 ‘선열기도추념문’ ‘류인석 추도 제문’이 위당 정인보의 대필이었다는 것을 처음으로 밝히기도 했다.
안중근 의사에 대한 잘못된 ‘신화’ 또한 존재한다. 많은 학자들이 근거가 불분명한 안중근 의사 장남 분도의 독살설을 확정된 사실로 쓰고 있다. 최서면 한국국제연구원 원장은 분도가 “일본 밀정에 의해 독살당했다면 당시 중국 언론 또는 러시아 연해주의 한글판 러시아어판 언론들이 일본을 비판하는 내용은 대서 특필했기 때문에 어디든 크게 다뤘을 것인데 그에 대해 보도한 언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분도 독살설은 안 의사 거사 당시 러시아어 통역인 유동하(당시 18살)의 누이동생 유동선이 그 아들인 김파 시인에게 했다는 말인데 , 모친인 유동선의 얘기에 근거를 둔 김파 시인의 <안중근과 그의 동료들>이라는 글은 엄밀한 검증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많은 문헌에서 이를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또 다른 대표적인 사례는 뤼순 감옥에서 안 의사에게 감화돼 사형 직전 ‘최후의 유묵’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일본 헌병 치바 토시치의 이야기다. 치바는 당시 뤼순 관동도독부 육군 헌병 상등병으로, 동양 평화를 깨뜨린 일본의 범죄에 대한 단죄의 정당성을 주장한 안 의사한테 감화돼 일본으로 돌아간 뒤에도 다니던 절 대림사(大林寺·다이린지)에 안 의사의 위패를 모셨던 인물이다. <아사히신문> 기자 출신인 주지 사이토 다이켄은 치바의 이야기를 담아 1985년 <내 마음의 안중근>이란 책을 펴냈다.
이 책을 보면, 안 의사는 치바가 유묵을 부탁하는 것을 한차례 거절했던 것을 미안하게 여겨 오던 중, 사형 집행 5분 전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침은 군인이 해야 할 일이다)’이라는 유묵을 써서 건넸다고 한다. 그러나 이 유묵이 흔히 알려졌듯 과연 최후의 유묵이었는지가 불분명할 뿐만 아니라 직접 치바에게 써 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안중근 기념사업회의 신운용 박사는 “안 의사의 최후 사형집행 전까지 함께 한 ‘간수’로 돼 있는 치바는 실제로는 호송을 맡았던 헌병이었다”며 “무엇보다 치바는 한국말을, 안 의사는 일본어를 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또 치바로부터 직접 이 유묵을 구입한 최서면 한국국제연구원 원장은 안 의사 유묵에는 손가락이 잘린 손을 낙관으로 해 안중근(安重根)하고 나서 ‘서(書)’라는 표현을 쓴 것과 ‘근배(謹拜, 삼가 드린다)’라고 한 것이 있는데, 근배는 지휘관 급의 장교 또는 검사장 등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에게 줄 때 썼다고 지적했다. 위국헌신 유묵에는 명확하게 근배라고 쓰고 있어 헌병 상병에게 준 유묵일 수 없다는 것이다.그러나 대부분의 안중근 관련 글이나 논문은 이를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고 신 박사는 지적한다. ‘위국헌신 군인본분’은 현재 대한민국 국군의 표어 중 하나이기도 하다.
정유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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