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혁명의 도화선이 됐던 김주열 열사가 세상을 뜬 지 50년만인 11일 경남 마산시 서성동 3·15 의거기념탑 앞에서 그의 넋을 기리는 범국민장의 노제가 열리고 있다. 이날 범국민장은 1960년 4월 11일 경찰이 쏜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숨진 김 열사의 시신이 떠올랐던 마산 중앙부두와 당시 시위 현장 일원에서 발인과 시신 운구 연출, 초혼제와 노제 등으로 진행됐다. 마산/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4·19 ‘도화선’ 김주열 열사 장례식 어제 마산서 열려
추모사업회 주도, 정부 지원없이 후원금·성금만으로
추모사업회 주도, 정부 지원없이 후원금·성금만으로
대한민국의 첫 민주주의 혁명에서 도화선이 됐던 김주열(1943~1960) 열사의 장례식이 50년 만인 11일 오후 1시 당시 그의 주검이 발견된 경남 마산 중앙부두에서 ‘범국민장’으로 치러졌다. 이날은 50년 전 마산중앙부두 바닷가에서 그가 주검으로 발견된 날이다. 김영만 상임공동 장례준비위원장은 “당시 경찰이 열사의 주검을 빼앗아 고향인 전북 남원에 강제로 묻었기 때문에 장례식도 치르지 못했다”며 “비록 반세기가 지났지만 예의를 갖춰 열사의 장례를 제대로 치르는 것이 살아남은 자들의 의무”라고 이날 장례의 의미를 밝혔다. 이날 범국민장은 추모사업회와 부마항쟁기념사업회 등 40여 단체들이 준비위원회를 꾸려 추진해왔다. 처음에 준비위는 3·15 의거가 국가기념일이 된 것을 계기로 경남도나 마산시 등의 지원을 기대했다. 그러나 법적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이들 지방정부들이 지원하지 않자 하루주점을 열고 시민 성금을 모아 비용을 마련했다. 이날 장례식에는 열사의 누나 김영자(74)·경자(69)씨 등 유족 10여명을 비롯해 남원지역 추모사업회원 100여명과 시민 등 1000여명이 참석했다. 장례식은 발인과 운구, 초혼제 순서로 진행됐다. 함세웅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은 조사에서 “50년 전 바로 이 앞바다에서 참혹한 주검으로 떠오른 김주열 청년은 민주주의의 선구자로 우리 앞에 다가왔다”며 “그의 희생을 통해 이룩한 4·19혁명으로 한국 민주주의의 꽃이 활짝 폈다”고 평가했다. 열사의 누나 김경자씨는 “50년 동안 이런 행사에 초대받아 참여하기는 처음”이라며 “동생을 위해 장례식을 마련해준 마산시민들께 감사드린다”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 장례식 뒤 참가자들은 열사의 영정과 꽃상여를 앞세우고 3·15 의거 기념탑과 당시 그의 주검이 잠시 안치됐던 마산 도립병원, 시위 현장인 남성동·북마산 파출소, 창동, 마산상고(현 용마고)에서 노제를 지냈다. 노제 중에는 김 열사가 당시 입학을 앞두고 있던 용마고의 후배들이 3·15의거와 4·19혁명 희생자들의 사진과 추모의 글이 담긴 만장 200개를 들고 함께 행진했다. 노제가 끝난 뒤 김 열사의 상여는 열사의 묘소가 있는 전북 남원으로 옮겨졌다. 김주열 열사는 1960년 3월15일 정·부통령 선거일에, 자유당 정권의 부정행위에 항의해 마산시민들이 벌인 시위에 참가했다가 실종된 뒤 27일 만인 4월11일 마산 앞바다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 당시 그의 오른쪽 눈에는 최루탄이 박혀 있었다. 이를 계기로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돼 4·19혁명이 일어났다. 신동명 기자 tms13@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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