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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유월의 인파(人波), 민주화의 파도(波濤)가 되다

등록 2005-06-20 15:54수정 2005-06-20 15:54

유월의 거리로 쏟아져 나온 시민들의 물결, 물결, 물결


추진위 참여

기념관 개요

국내 사례

해외 사례

100문 100답

1986~87년, 전두환은 육사 11기 동기인 노태우에게 정권을 이양하기 위해 온갖 기만적인 방법을 동원하고 있었다. 또 그에 맞선 민중들은 정권을 교체하기 위해 국민이 직접 대통령을 뽑는 ‘직선제’로의 개헌을 요구하고 있었다. 민주세력에 대한 탄압은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가혹하고 어처구니없는 작태였다. 86년 10월에는 건국대에서 ‘전국 반외세․반독재 애국학생투쟁연합’ 발족식을 하던 학생들을 ‘친북 공산혁명분자들’로 매도해 무자비하게 진압했고, 이어 ‘금강산댐 사건’을 날조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더니, 급기야 소위 ‘운동권’ 요주의 인물들을 잡아다가 악랄하게 고문해 조직사건으로 날조하는 일이 줄을 이었다.

이런 와중에 1987년 1월 13일, ‘민주화추진위원회’ 사건으로 수배중이던 박종운 군의 소재를 찾기 위한 참고인 조사로 연행되었던 서울대 박종철군이 물고문에 의해 목숨을 잃는 사건이 발생했다. 전두환 정권은 고문경관 2명을 희생양 삼아 심장마비 쇼크사로 얼버무린 뒤, 개헌 요구를 거부하는 이른바 ‘4·13 호헌조치’를 발표했다. 그러나 진실이란 가린다고 해서 감춰지는 것이 아니다. 5월 18일, 광주민중항쟁 7주년 추모미사에서 김승훈 신부는 “박종철군을 고문한 경관이 모두 다섯 명이었다”며, 이 사건이 은폐되고 조작되었음을 만천하에 폭로했다. 여론은 경악과 분노로 들끓었고, 마침내 5월 27일에는 광범위한 민주세력이 결집된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를 발족하게 되었다.

“우리는 그때 서대협(서울지역 대학생 대표자 협의회)을 결성하고, 그간 소수 중심으로 이뤄지던 학생운동을 다수가 참여하는 대중운동으로 바꿔나가는 중이었습니다. 김승훈 신부님의 폭로 뒤에 우리는 재야와 함께 총궐기를 위한 준비작업에 들어갔지요. 6월 1일부터는 단식을 하는 와중에도 학내를 돌며 궐기를 호소했습니다. 6월 9일에 있었던 각 학교별 결의대회는 그러한 감동의 결과였던지, 많은 학생들이 참여하게 되었던 겁니다

이한열 열사는 6월 9일 오후 4시쯤 쓰러졌지만, 전경과 싸우다가 피 흘리는 장면은 일상적인 것이어서 심각한 상황이었던 건 나중에야 알았다고 우상호씨는 말했다. 시위가 끝나면 학생들의 분실물을 찾아주곤 했는데, 열사의 운동화 한짝은 주인이 찾으러 오지 않아 결국 버려졌다고 했다. 밤이 되어서야 중환자실로 뛰어간 우상호씨는 급히 연락을 취해 100여 명의 학생들로 사경을 헤매는 열사의 주변을 지켜냈다.

그리고 6월 10일. 잠실체육관에서는 ‘민정당 제4차 전당대회 및 대통령후보 지명대회’가 열렸고, 같은 시각 서울을 비롯한 전국 22개 도시에서는 24만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민주헌법 쟁취 범국민대회’가 열렸다. 이후 버스나 지하철을 통해 삼삼오오 시내로 몰려든 학생들은 오후 6시, 국기하강식에 맞춰 일제히 “독재타도”와 “호헌철폐”를 외치며 거리로 뛰어들었다. 당시의 시위는 예상을 뛰어넘는 것으로, 민중들의 열기를 짐작케 하는 감동적인 장면이었다고 우상호씨는 회고했다.

“애국가가 울리자 빌딩 옥상에 있던 비둘기들이 떼를 지어 날아올랐고, 우리도 일제히 거리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렇게 뛰어들었다가 최루탄을 피해 골목으로 들어가기를 수십 번, 점점 시위대가 늘어나고 있는 걸 느낄 수 있었어요. 제가 그때까지 가두시위만 100여 차례를 나섰지만 20분 넘게 시위를 지속했던 건 서너 번에 불과한데, 그날 신세계백화점 앞 분수대를 메운 3만여 시위대는 2천여 경찰들을 무력화시켰고, 심지어 전경 1개 소대를 무장해제 시키기도 했습니다. 광장에 있던 우리는 모두 얼싸안고 울었어요. 아마도 6월항쟁을 통틀어 가장 감동적인 장면을 꼽으라면, 제게는 단연 6월 10일의 신세계 앞 분수대일 겁니다.”

이날 경찰은 무차별 폭행을 가하며 전국에서 3,831명을 연행했고, 서울의 시위대중 일부는 명동성당으로 밀려가 6월항쟁의 기폭제가 된 5일간의 명동성당 농성투쟁을 시작했다. 그리고 항쟁은 전국에서 계속되었다. 6월 18일 ‘최루탄 추방대회’가 있던 날은 1백50만의 국민이 시위대에 가세했고, ‘국민평화대행진’이 개최된 6월 26일에는 1백만 명의 시위대가 쏟아져나와 거리를 가득 메웠다. 시위의 양상은 이미 학생이나 운동권 세력만의 것이 아닌 시민들 모두가 주도하는 것이 되었다. 눈물을 닦으라며 빌딩 창문으로 두루마리 휴지를 던져 주던 사무직 노동자들은 어느새 ‘넥타이 부대’가 되어 어깨를 함께 걸머메었고, 시장의 상인, 일용직 노동자들도 시위 대열에 합류했다. 침묵하는 다수, 혹은 보수 수구세력이라 일컬어지던 많은 사람들은 어느새 가슴속의 응어리를 풀어헤치고 너와 내가 없는 물결이 되어 “독재타도”와 “호헌철폐”를 부르짖었던 것이다. 그들은 무차별한 최루탄 세례에도 굴하지 않고 거리를 질주하며, 혹은 신명나는 시민들의 축제를 벌이며, “독재보다 더 무서운 건 그간 독재에 길들여졌던 우리 내부의 패배감과 안일함이었다”고 뼈저리게 느꼈다.

우상호씨에 따르면 시청앞 광장에 시위대가 들어간 것은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이 있었던 7월 9일 하루뿐이었으며, 대부분의 시위는 시청앞 광장으로 통하는 주변에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중 한국은행과 중앙우체국, 신세계백화점 사이에 놓인 삼각꼴의 ‘분수대 광장’은 가장 중요한 시위의 거점이었다. 이곳 외에도 당시 서울의 주요한 시위장소로는 동대문에서 종로4가로 연결되는 대로와 영등포 로터리 일대였다고 한다.

대전역에서 충남도청까지, 중앙로를 가득 메운 대전시민들


지역적 고립으로 더욱 고통스러웠던 80년의 광주민중항쟁과 달리, 전국에 걸쳐 일어난 6월항쟁은 특히 부산과 광주, 대전 등지에서 더욱 가열찬 항쟁의 불씨를 이어갔다. 부마민주항쟁의 기억과 함께 박종철 열사의 고향이라는 점에 자극 받은 부산은 군 투입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가장 과감하게 투쟁했던 지역이며, 5·18때 보여주었던 광주시민들의 민주화에 대한 투철한 의지도 다시금 폭발하였다. 그러나 그간의 침묵을 깨고 6월의 거리를 질주한 새로운 투쟁의 거점이라면 단연코 ‘대전․충남지역’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충남민주운동청년연합과 기독교운동 등이 밑거름이 된 ‘대전의 6월항쟁’은 6월 10일 1만여 명의 시민들이 ‘대전가톨릭문화회관’에 모여 국민대회를 연 것에서 불붙기 시작해, 대전지역 6개 대학 학생들의 교내외 시위로 한층 고무되었다. 특히 6월 15일 충남대생들이 경찰 저지선을 뚫고 교문을 나선 뒤 8km를 걸어 중앙로까지 진출한 것은 대전지역 시위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는데, 이에 자극 받은 시민들의 합세로 2만여 명이 벌인 시위는 19일까지 5일간 대규모 가두시위로 이어졌다고 한다.

“대전 지역은 전통적으로 보수적이고 부드러운 성향을 지녀서 시위문화가 무척 약했지요. 하지만 ‘대전이 움직일 때면 대세는 이미 기운 것’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막바지까지 투쟁을 지속해 나가는 뚝심이 있는 것 같습니다.”

대전역 광장에서부터 충남도청까지, 중앙로를 따라 대전의 시위문화에 대해 안내를 해준 김규복(52. 빈들교회 목사, 대전 NCC 공동회장) 목사에 따르면 “충청도 민심이야말로 천천히 달구어지는 대신 한 번 뜨거워지면 강력한 폭발력을 지녔다”는 것이다. 87년 6월항쟁때도 그와 같아서 새벽까지 도심 한복판에서 게릴라식 시위를 지속했으며, 페퍼포그를 뒤엎거나 경찰의 항복을 받아내 나중에는 그들이 시위를 막기는커녕 오히려 대로를 내준 채 골목만 지키게 만들었다고 한다. 또한 유성과 서대전사거리를 거쳐 네다섯 시간이나 걸리는 거리를 걸어 중앙로까지 진출한 2천여 충남대생들의 끈기를 보더라도 대전․충남지역의 독특한 시위문화의 일면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대전 시가지는 대체로 일제시대에 설계된 것이라 큰 건물을 앞에 두고 도로를 가설하는 방식을 따르고 있다. 대전역 광장에서 충남도청 쪽을 바라보면 도로는 ‘H’자를 옆으로 뉘어 놓은 듯한 모양을 띤다. 대전역 앞을 가로지르는 17번 국도는 ‘조치원-금산’을 연결하는 도로로, 삼성동이나 인동․원동 사거리 쯤에서 집결한 시위대는 대전역 광장을 거쳐 곧바로 충남도청을 향해 나가게 되어 있다.

도청까지의 1.5km 남짓한 왕복 6차선 중앙로 사이사이에는 지금도 시위가 있을 때면 대전 시민들이 모여드는 주요한 시위장소들이 집중되어 있다. ‘홍명상가 옆 공원’은 주로 소규모 집회가 열리는 곳으로 시민단체들의 캠페인이나 서명을 받는 장소로 유명하고, ‘으능정이 문화거리’는 청소년들이 많이 모이는 곳으로 작년 ‘여중생 추모 촛불시위’도 이곳을 중심으로 이뤄졌다고 한다. 그 다음 ‘동백사거리’는 노동자들의 시위가 주로 일어나는 곳이다. 이 길을 모두 지나면 왼편으로 중부경찰서가 보이고, 조금 더 나아가면 맞은편에 충남도청과 충남도경찰청, 그리고 왼쪽으로 약간 비켜선 대전시청(현재는 중구청)과 맞닥뜨리게 된다. 공권력이란 공권력은 모두 집중된 곳이니 이곳을 점거하고 시위를 벌였다는 것은 놀랍고도 신나는 일이었을 것이다.

대전지역의 6월항쟁에서 안타까운 일이라면 6월 19일 버스를 탈취해 시위대의 앞장을 서던 허정길씨가 전경 한 명을 치어 사망케 한 사건이다. “본인의 주장에 의하면 최루탄 가스 때문에 운전하기가 곤란했고, 앞이 안 보일 정도로 페퍼포그를 많이 쏴 놓아서 전경이 있는 것을 볼 수 없었다고 합니다. 아무튼 이 사건 때문에 대전지역의 시위는 다소 주춤하게 되었지요.” 김규복 목사에 따르면 허정길씨는 당시의 사건이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받지 못해 지금도 복역중이라 한다. 시위 도중 목숨을 잃은 열사들이나 명분도 없이 끌려나와 시위를 진압하다 숨진 전경들이나 우리를 안타깝게 하기는 매한가지다. 한동안 주춤하던 대전지역의 6월항쟁은 6월 26일 ‘국민평화대행진’에 즈음해서야 다시 불붙기 시작했다고 한다.

아무려나 6월 29일, 노태우가 직선제 개헌의 수용을 골자로 하는 이른바 ‘6·29선언’을 발표함으로써 6월항쟁은 가시적인 성과를 보인 듯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성과라면 시민들의 민주화에 대한 의식이 한층 성숙되었다는 것이 아닐까. 당시 대전침례신학대학 대표로 시위에 참가했던 최재준씨(43․대전기독교연합봉사회관 관리과장)는 6월항쟁의 성과로 “곤충이 허물을 벗듯 시민단체의 운동역량이 한 단계 높아진 것과 통일운동의 전환점이 되었다는 점 등”을 꼽았다.

6월항쟁이 비록 직접적으로 군부독재를 종식시키지는 못했지만, 이후 90년대의 민주화 운동과 민주세력의 방향성을 제시했다는 점, 그리고 종국에 가서는 정권 교체를 이루고야 말았다는 성과에 있어서는 의문부호를 달 수 없을 것이다. 박종철 열사와 이한열 열사의 죽음은 바로 그 시금석이 되었다.

원시림 (소설가. wonsilim@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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