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상화(51)씨
‘인혁당 사건’ 고 여정남씨 모교에 1억 장학금 낸 조카 여상화씨
어릴적 잦은 형사방문에 몸서리
사건 연극 본 뒤 명예회복운동
가족들 돈 모아 공원건립 기부도 “삼촌과 가족들이 받았던 고통을 말로 표현할 순 없지만, 우리보다 더 고통 받는 사람들을 도와주며 사는 것이 삼촌의 명예를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한국 현대사에서 대표적인 ‘사법 살인’이었던 인혁당 사건의 희생자 가운데 한 사람인 고 여정남씨의 조카 여상화(51·사진)씨가 지난 16일 삼촌의 모교인 경북대에 장학기금 1억원을 기부한 뜻이다. 한사코 인터뷰를 사양하던 그를 24일 서울 동작구 노량진동 자택에서 만났다. 40여년이 지난 빛바랜 가족사진과 당시 판결문 공개 요청서 등 삼촌에 관한 자료를 꺼내보이던 여씨는 금세 눈시울을 붉혔다. “사건 당시 형사들이 다 뒤져서 압수해갈 때 어머니가 몰래 몇장 숨겨놓은 것들이에요.” 1974년 4월3일 박정희 정권은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민청학련)이 국가를 전복하려는 시도를 했다는 혐의로 학생, 지식인 등 수백명을 구속했다. 이후 군법회의는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가 민청학련의 배후’로 지목해 75년 4월8일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된 지 불과 18시간 만인 이튿날 새벽 8명을 전격 사형시켰다. 당시 서른살의 여정남씨는 인혁당 재건위에 소속되지 않은 유일한 대학생이었지만, 민청학련과 인혁당 재건위의 연결고리를 했다는 이유로 사형 대상에 포함됐다. 그때 중3이었던 조카 여씨는 아버지로부터 삼촌의 죽음을 들었지만, 어린 나이에 그 죽음의 무게를 온전히 헤아릴 수는 없었다고 했다. 다만 공립학교 교사였던 아버지가 쫓기듯 사립학교로 자리를 옮겼고, 형사들이 집에 들락날락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비극을 체감했다. 아버지는 그에게 “상화, 너는 절대 정치할 생각 하지 마라. 그저 평범하게 살아야 한다”고 늘 말했다. 87년 인혁당 사건을 다룬 연극에 유가족으로서 초청받아 갔던 여씨는 새삼 큰 충격을 받았고, 삼촌의 죽음을 더는 외면할 수 없었다고 했다. 삼촌은 사형 당시 미혼이어서 직계 가족이 없다. 여씨는 유독 삼촌을 아꼈던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려 가족 대표로서 삼촌의 명예회복에 앞장서왔다. 그는 인혁당 희생자들의 부인 7명과 함께 명예회복을 향한 기나긴 싸움에 나섰다. 종교계, 시민사회단체 등 많은 이들의 노력 덕분에 인혁당 사건은 2002년 9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고문에 의한 조작’으로 인정받았고, 재심 끝에 2007년 1월23일 희생자 8명 모두에게 무죄가 선고됐다.
그뒤 여씨와 가족들은 명예회복에 대한 답례로, 여정남공원 건립위원회에 2억5000만원을 기부해 지난 4월 경북대 교정에 여정남공원을 마련한 데 이어 이번에 장학금 1억원을 내놓은 것이다. 공원 건립위는 머잖아 여정남추모사업회로 모습을 바꿀 예정이다. 여씨는 “사회 정의와 진실을 찾으려 수많은 사람들이 동참한 것을 기억하고 감사하게 생각한다”며 “조용히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며 살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글 이경미 기자 kmlee@hani.co.kr 사진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사건 연극 본 뒤 명예회복운동
가족들 돈 모아 공원건립 기부도 “삼촌과 가족들이 받았던 고통을 말로 표현할 순 없지만, 우리보다 더 고통 받는 사람들을 도와주며 사는 것이 삼촌의 명예를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한국 현대사에서 대표적인 ‘사법 살인’이었던 인혁당 사건의 희생자 가운데 한 사람인 고 여정남씨의 조카 여상화(51·사진)씨가 지난 16일 삼촌의 모교인 경북대에 장학기금 1억원을 기부한 뜻이다. 한사코 인터뷰를 사양하던 그를 24일 서울 동작구 노량진동 자택에서 만났다. 40여년이 지난 빛바랜 가족사진과 당시 판결문 공개 요청서 등 삼촌에 관한 자료를 꺼내보이던 여씨는 금세 눈시울을 붉혔다. “사건 당시 형사들이 다 뒤져서 압수해갈 때 어머니가 몰래 몇장 숨겨놓은 것들이에요.” 1974년 4월3일 박정희 정권은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민청학련)이 국가를 전복하려는 시도를 했다는 혐의로 학생, 지식인 등 수백명을 구속했다. 이후 군법회의는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가 민청학련의 배후’로 지목해 75년 4월8일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된 지 불과 18시간 만인 이튿날 새벽 8명을 전격 사형시켰다. 당시 서른살의 여정남씨는 인혁당 재건위에 소속되지 않은 유일한 대학생이었지만, 민청학련과 인혁당 재건위의 연결고리를 했다는 이유로 사형 대상에 포함됐다. 그때 중3이었던 조카 여씨는 아버지로부터 삼촌의 죽음을 들었지만, 어린 나이에 그 죽음의 무게를 온전히 헤아릴 수는 없었다고 했다. 다만 공립학교 교사였던 아버지가 쫓기듯 사립학교로 자리를 옮겼고, 형사들이 집에 들락날락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비극을 체감했다. 아버지는 그에게 “상화, 너는 절대 정치할 생각 하지 마라. 그저 평범하게 살아야 한다”고 늘 말했다. 87년 인혁당 사건을 다룬 연극에 유가족으로서 초청받아 갔던 여씨는 새삼 큰 충격을 받았고, 삼촌의 죽음을 더는 외면할 수 없었다고 했다. 삼촌은 사형 당시 미혼이어서 직계 가족이 없다. 여씨는 유독 삼촌을 아꼈던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려 가족 대표로서 삼촌의 명예회복에 앞장서왔다. 그는 인혁당 희생자들의 부인 7명과 함께 명예회복을 향한 기나긴 싸움에 나섰다. 종교계, 시민사회단체 등 많은 이들의 노력 덕분에 인혁당 사건은 2002년 9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고문에 의한 조작’으로 인정받았고, 재심 끝에 2007년 1월23일 희생자 8명 모두에게 무죄가 선고됐다.
그뒤 여씨와 가족들은 명예회복에 대한 답례로, 여정남공원 건립위원회에 2억5000만원을 기부해 지난 4월 경북대 교정에 여정남공원을 마련한 데 이어 이번에 장학금 1억원을 내놓은 것이다. 공원 건립위는 머잖아 여정남추모사업회로 모습을 바꿀 예정이다. 여씨는 “사회 정의와 진실을 찾으려 수많은 사람들이 동참한 것을 기억하고 감사하게 생각한다”며 “조용히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며 살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글 이경미 기자 kmlee@hani.co.kr 사진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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