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서산시 부석면 마룡리 이상철(72)씨가 지난 14일 오후, 태풍 곤파스로 황폐해진 비닐집을 홀로 고치고 있다.
벼들 쓰러지고 말라죽고
과수원 열매도 후두둑
일부농가 수확 90% 감소
정부지원 감감 무소식
절망한 농민 목숨 끊기도
과수원 열매도 후두둑
일부농가 수확 90% 감소
정부지원 감감 무소식
절망한 농민 목숨 끊기도
‘곤파스 직격탄’ 서산에선
들녘에 농민은 없었다. 추석을 일주일 앞둔 지난 14일 충남 서산시 부석면 마룡리. 농촌체험마을로 전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곳이지만, 논두렁을 부지런히 오가야 할 농민들은 단 한명도 보이지 않았다. 오기득(41) 농촌체험마을 사무장의 대답은 착잡했다. “이달 초 태풍 곤파스가 몰고 온 바닷바람을 그대로 벼들이 얻어맞았어요. 낟알들이 서로 부딪혀 진액이 다 빠진 채로 하얗게 말라죽고 있는 거예요. 10%도 수확을 못 할 텐데, 공연히 논에 와봤자 속만 터지니까 들녘이 텅 비어버렸어요.” 농민들을 더 기가 막히게 하는 일도 있다. ‘황금 들녘’이라는 말이다. 오 사무장은 “뭣도 모르는 사람들은 멀리서 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벼가 누렇게 참 잘 익었네’라고들 해요. 남의 터지는 속도 모르면서…” 벼가 익어서 누렇게 보이는 게 아니라 이파리·이삭이 말라죽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곳의 벼는 10월 초순은 돼야 수확을 위해 콤바인을 댈 수 있다는 설명이다.
마룡리에는 120여가구 400여명이 산다. 천수만을 끼고 있는 이곳은 지난 2일 새벽 불어닥친 태풍의 중심이 지나면서 쑥대밭이 됐다. 두세 시간 만의 일이었다. 김종제(47)씨는 그날 새벽 2시를 조금 넘겨 집 뒤편 한우 축사에 갔다가 봉변을 당할 뻔했다. “바람이 어찌나 센지, 집까지 50m가량을 포복으로 기어서 겨우 왔다니까요.” 당시 서산 지역의 강풍은 최대 순간풍속이 초속 40m를 웃돌았다. 오 사무장의 집 현관문은 굵은 자물쇠가 휘어지기까지 했다. 이광일(71)씨 부부는 지금도 가슴을 쓸어내릴 정도다. “집 옆에 있는 30m 길이의 비닐하우스가 철재까지 통째로 바람에 날려 현관문을 때려버렸어요.” 이날 부부는 단둘이서 망가진 비닐하우스를 치우고 있었다.
장경훈(36)씨는 살던 집의 슬레이트 지붕이 태풍으로 절반 가까이 뜯겨나간 뒤, 이튿날 아예 짐을 싸서 서울 큰형 집으로 가버렸다. 서산 지역에서 이처럼 태풍으로 파괴된 가옥은 250여채에 이른다.
태풍이 지나간 지 열흘 넘게 지났지만, 복구에는 끝이 없다. 한달 넘게 걸릴 거라는 게 주민들의 설명이다. 하지만 복구 지원 장비나 인력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이용희(45)씨는 “도지사나 장관, 국회의원이라는 사람들이 서산에 와서 사진만 찍고 가버리더라고요. 자기네들 생색만 내는 거죠.” 이씨의 600평짜리 비닐하우스는 철재가 엿가락처럼 휘고 무너져버렸다. 바로 옆에 있는 감나무 500여그루에는 감이 하나도 달려 있지 않았다. 저장창고는 저온시설이 정전으로 가동이 안 돼 양파가 모두 상하는 바람에 2t을 내다버렸다. 충남도는 인력 5만7000여명과 장비 2200여대 등을 동원해 응급복구를 지원했다고 밝혔지만, 일부 지역에만 한정됐을 뿐이다. 지금도 마룡리에서는 휴대전화 통화가 쉽지 않은 형편이다. 끊어진 전기도 5일 만에 겨우 들어왔다.
들녘을 찾아가 보니, 마치 추수를 끝낸 농한기처럼 적막하기까지 했다. 비바람에 쓰러진 벼들도 곳곳에 보였다. 무엇보다 심한 건 ‘백수 현상’이었다. 벼 낟알이 풍해로 하얗게 말라죽는 것이다. 손으로 껍질을 벗겨보니, 알곡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마룡리 120여가구 대부분이 이런 피해를 당했다. 특히 바다와 가까운 쪽은 싹쓸바람을 맞아 10%도 수확이 어려울 거라고들 했다. 서산시 김명기 공보 담당은 “벼의 백수 현상으로 인한 피해액이 500억원을 넘는다”며 “올해는 벼농사 수확이 거의 안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논마다 벼멸구가 극성이지만, 농민들은 농약을 뿌릴 엄두도 못내고 있다. 농약값조차 고스란히 빚으로 떠안아야 하기 때문이다. 전국 3위의 쌀 생산지인 서산은 지난 태풍으로 전체 논 면적의 4분의 1에서 백수 현상이 발생했다.
무너진 축사·비닐하우스를 고칠 자재도 품귀 현상이다. 김종제씨는 축사 철재를 서산·태안 지역에서 구하지 못해 예산까지 가서 주문을 해야만 했다. 2000여만원이 들지만 또 빚을 내야 한다. 정부로부터 지원금은 한 푼도 못받았다고 했다. “완파나 반파가 아니면 보상이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차라리 다 무너졌으면 돈이라도 조금 받았을 텐데….” 그는 연방 담배를 피워 물었다. 2만평 되는 벼도 소 사료로나 쓰겠다고 했다. “꼭 죽고만 싶은 마음이에요. 농촌에 나 같은 사람들이 어디 한둘이겠어요?”
사정이 이러하니, 다음주로 다가온 추석이 반가울 리 없다. 오 사무장은 “차례 지내고 산소에 절하고 나면 자식들하고 집 수리하고, 비닐하우스 고쳐야죠. 그저 일만 하는 거죠.” 오씨의 후배인 이제형(39)씨는 아예 논일을 작파한 뒤 과일 도매상에서 일하고 있다. 5만평가량 되는 논에서 건질 게 하나도 없어, 아예 논에는 가지도 않는다. 아르바이트라도 해야 차례상을 차릴 것 아니냐는 말이다. 이들에겐 10월 말 상환해야 할 영농자금에다 연말까지 갚아야 할 농자재 대금이 기다리고 있다. “올해는 겨울도 일찍 찾아올 것 같다”며 내쉬는 한숨이 여기저기서 나왔다.
마룡리뿐 아니라 서산·태안 일대는 지난 태풍의 길목에 놓여 가장 피해가 컸다. 태안 안면도의 우람한 안면송(충남도 보호종) 7500여그루가 속절없이 부러지고 뽑혔다. 지금도 길가 곳곳에서 쓰러진 채 방치된 안면송을 쉽게 볼 수 있다. 도로 주변 전선 위로 소나무가 쓰러져 위태롭게 걸려 있는 곳도 보였다. 서둘러 나무를 치우지 않으면 자칫 전선이 끊어져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대목이다.
과수원의 사과·배도 무더기로 땅바닥에 처박혔다. 서산시 대산읍 화곡2리 김지동 이장은 “과일 가운데 90%가 땅에 떨어졌다”며 “나무가 뿌리째 뽑혀 아예 과수원 문을 닫아야 할 지경인 곳도 있다”고 말했다. 교직에서 물러난 뒤 이곳에서 과수원을 차린 김아무개씨는 “사과 300상자, 배 500상자를 쓰레기장에 내다버렸다”며 “썩어 먹지도 못하니 어쩌겠느냐”고 털어놨다. 전체 400그루 가운데 쓰러진 250여그루를 겨우 일으켜세우기는 했지만, 뿌리가 성할 리 없으니 내년 농사도 기약을 못 한다. 한 해 피해로 끝나는 게 아닌 셈이다. 옆 마을인 화곡1리 문한주 이장은 “벼 피해가 평균 30% 이상 된다”며 “낙과도 쌓아놓거나 땅에 묻어버리고, 그나마 먹을 만한 것들은 동네 사람들한테 나눠주는 형편”이라고 전했다.
멍든 농심을 견디다 못해 극단적인 선택까지 일어나고 있다. 지난 12일 새벽 태안군 안면읍 승언리에 사는 김아무개(68)씨는 태풍과 비 피해에 절망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전날 저녁 부인에게 “나이도 먹고, 치울 기력도 없어 죽고 싶다”는 말을 남긴 채였다. 당시 부인 김아무개(60)씨는 남편이 행여 ‘나쁜 생각’을 할까 걱정돼, 축사에 있던 농약병들을 다른 곳으로 몰래 치우기까지 했다. 그러나 남편은 끝내 빈 방에서 스스로 목을 매고 말았다.
특별재난구역 지정된다지만…
충남 공식피해만 1천억대
영세농민 등 보상 ‘쥐꼬리’ 충남 지역의 ‘공식 태풍 피해액’은 1101억7000만원(9월16일 기준)이다. 하지만 농민들이 피부로 느끼는 피해와는 큰 차이가 있다. 서산시 쪽은 지난 14일 “420여억원의 피해액과는 별도로 벼의 백수 현상으로 인해 550억원가량(5500㏊)의 추가 피해가 일어난 것으로 보고 있다”고 밝혔다. 서산시 한곳만 해도 피해액이 1000억원대인 셈이다. 서산시의회는 해미읍성축제 등에 배정됐던 예산 8억3000여만원을 피해 복구를 위한 예비비로 전환했다. 뒤늦은 감은 있지만 특별재난지역 지정도 곧 이뤄질 전망이다. 안희정 충남지사는 16일 기자회견을 열어 “지난 15일 대구에서 이명박 대통령을 만나 중앙정부의 신속한 피해 지원을 건의했다”며 “17일께 특별재난지역 선포가 될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이 자리에서 이 대통령은 △서산·태안 등 충남 5개 시·군에 대한 특별재난지역 선포 △특별교부세 17억원의 우선 교부 등을 관계 부처에 지시했다고 충남도는 이날 밝혔다. 충남도는 주택 피해(전파·반파)와 생계 지원 등에 50억8350만원을 추석 전까지 지급하기로 했다. 하지만 특별재난지역으로 지정되더라도 보상액은 미미하다. 복구비의 50~76%가 국고에서 지방자치단체에 지원되지만 개인에겐 건강보험료 30~50% 경감, 국세·지방세 감면 및 납부 유예, 재난 복구 융자금(5년 거치 10년 상환, 연이자 1.5%) 정도가 전부다. 안 지사는 “사유시설에 대해서도 피해 보상이 이뤄질 수 있도록 도에 검토를 지시했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정부의 피해 지원 기준을 현실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행정안전부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의 ‘자연재난 조사 및 복구계획 수립 지침’에 따라 농작물 피해는 보상 기준이 재난지수 300 이상으로 정해져 있어, 논밭의 경우 3만㎡(9075평) 이상 피해가 일어났을 때에만 재난지원금 대상에 포함된다. 재난지수는 피해 물량의 크기에 비례하도록 설정돼 있어, 소규모 영세농은 보상을 받기 어렵다. 백수 현상으로 벼 피해가 심각한 농민들은 ㏊당 농약값 명목으로 10만원 정도를 보상받을 수 있을 뿐이다. 농민들 사이에 “그거 받고 빚내서 농약 치느니 차라리 수확을 포기하는 게 낫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주택이나 비닐하우스 등 시설물의 경우에도 전파나 반파인 때에만 보상(450만~900만원)이 이뤄지는 형편이다. 서산 태안/글·사진 전진식 송인걸 기자 seek16@hani.co.kr
같은 마을 장경훈(36)씨의 집 지붕은 절반가량이 뜯겨나간 채 열흘 넘게 방치돼 있다.
태안군 안면읍 안면송들도 강풍에 쓰러져 전선에 위태롭게 걸려 있다.
영세농민 등 보상 ‘쥐꼬리’ 충남 지역의 ‘공식 태풍 피해액’은 1101억7000만원(9월16일 기준)이다. 하지만 농민들이 피부로 느끼는 피해와는 큰 차이가 있다. 서산시 쪽은 지난 14일 “420여억원의 피해액과는 별도로 벼의 백수 현상으로 인해 550억원가량(5500㏊)의 추가 피해가 일어난 것으로 보고 있다”고 밝혔다. 서산시 한곳만 해도 피해액이 1000억원대인 셈이다. 서산시의회는 해미읍성축제 등에 배정됐던 예산 8억3000여만원을 피해 복구를 위한 예비비로 전환했다. 뒤늦은 감은 있지만 특별재난지역 지정도 곧 이뤄질 전망이다. 안희정 충남지사는 16일 기자회견을 열어 “지난 15일 대구에서 이명박 대통령을 만나 중앙정부의 신속한 피해 지원을 건의했다”며 “17일께 특별재난지역 선포가 될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이 자리에서 이 대통령은 △서산·태안 등 충남 5개 시·군에 대한 특별재난지역 선포 △특별교부세 17억원의 우선 교부 등을 관계 부처에 지시했다고 충남도는 이날 밝혔다. 충남도는 주택 피해(전파·반파)와 생계 지원 등에 50억8350만원을 추석 전까지 지급하기로 했다. 하지만 특별재난지역으로 지정되더라도 보상액은 미미하다. 복구비의 50~76%가 국고에서 지방자치단체에 지원되지만 개인에겐 건강보험료 30~50% 경감, 국세·지방세 감면 및 납부 유예, 재난 복구 융자금(5년 거치 10년 상환, 연이자 1.5%) 정도가 전부다. 안 지사는 “사유시설에 대해서도 피해 보상이 이뤄질 수 있도록 도에 검토를 지시했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정부의 피해 지원 기준을 현실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행정안전부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의 ‘자연재난 조사 및 복구계획 수립 지침’에 따라 농작물 피해는 보상 기준이 재난지수 300 이상으로 정해져 있어, 논밭의 경우 3만㎡(9075평) 이상 피해가 일어났을 때에만 재난지원금 대상에 포함된다. 재난지수는 피해 물량의 크기에 비례하도록 설정돼 있어, 소규모 영세농은 보상을 받기 어렵다. 백수 현상으로 벼 피해가 심각한 농민들은 ㏊당 농약값 명목으로 10만원 정도를 보상받을 수 있을 뿐이다. 농민들 사이에 “그거 받고 빚내서 농약 치느니 차라리 수확을 포기하는 게 낫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주택이나 비닐하우스 등 시설물의 경우에도 전파나 반파인 때에만 보상(450만~900만원)이 이뤄지는 형편이다. 서산 태안/글·사진 전진식 송인걸 기자 seek1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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