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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부당공권력 희생자’ 명예회복 외면한 법원

등록 2010-10-07 11:34

신호수씨.
신호수씨.
80년대 경찰 가혹행위로 숨진 2명 손배소
20여년 전 경찰의 가혹 행위로 사망한 20대 청년 문영수씨와 신호수씨가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잇따라 승소했다. 하지만 홀연히 사라졌다 주검으로 돌아온 형·아들의 죽음을, 대한민국은 온전히 인정하고 위로하지 않는다. 경찰에게 맞아 숨진 뒤 시신이 대학 해부실로 보내진 문영수씨의 경우, 소멸시효 탓에 일부 손해배상만 인정받았다. 국가는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다. 경찰에 끌려간 뒤 자살한 것처럼 꾸며져 발견된 신호수씨에 대해 법원은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경찰의 가혹행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강산이 두번 바뀌었지만, 그들은 눈을 감지 못한다.


‘간첩 누명’ 구속된 신호수씨, 소지품 불타고 목맨채 발견
경찰이 가매장뒤 부실 부검, 법원 “가혹행위 증거 부족”

6일 오후 2시 서울중앙지법 560호실에는 정적이 흘렀다. 이제는 70대가 된 신정학(72)씨가 초조한 눈빛으로 법대를 올려다봤다. 신씨는 1986년 경찰에 연행됐다가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된 고 신호수(당시 22·사진)씨의 아버지다.

재판부(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 36부·재판장 김정원)는 그러나, “피고 대한민국의 불법 구속으로 인한 위자료 청구를 인정하나 경찰의 가혹행위는 증거 불충분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며 총 8900만원의 위자료와 지연손해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한숨소리가 법정에 가득했다. 재판정을 빠져나온 신정학씨는 말없이 담배를 피워 물었다.

신호수씨가 발견된 곳은 그의 고향인 전남 여수시 돌산읍 대미산의 자그마한 굴속이었다. 입고 있던 옷을 이용해 목을 맨 채였다. 두 팔은 허리띠로 몸통에 묶여 있었다. 소지품은 모두 불에 탔지만, 라이터는 없었다. 1986년 6월19일 해안초소에서 야간근무를 마치고 귀가하던 육군 방위병이 시신을 발견했다.

신정학(74)씨가 아들의 주검을 본 것은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6월27일이었다. 여주경찰서가 아들을 가매장한 뒤였다. 아들을 다시 파내 부검을 했다. 의사는 안구가 부패했음에도 ‘각막은 혼탁하고 안구는 충혈’이라고 적을 만큼 허술한 감정서를 작성했다. 그러고는 아무도 이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공부를 잘하는 자랑스런” 아들은 고등학교 1학년이던 1980년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자 자퇴한 뒤 검정고시를 통과했다. 방위병으로 병역을 마친 아들은 인천의 엘피(LP) 가스 배달업체에서 일했다.

1986년 6월11일 서울 서부경찰서 대공과 소속 경찰관 3명이 아들을 찾아왔다. 아들이 살던 장흥 자취집에서 ‘북한 삐라’가 발견됐다고 했다. 아들의 군부대는 삐라를 모아오면 특별휴가를 주곤해 아들은 늘 삐라를 모았다. 하지만 경찰은 ‘장흥 공작’이라는 이름으로 아들을 간첩으로 몰아 연행했다. 경찰은 아들의 시신이 발견된 뒤 “연행 뒤 3시간 만에 풀어주었다”고 했지만, 이는 거짓이었다. 지난해 11월10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아들이 간첩사건 조작에 나선 경찰의 가혹행위로 사망한 뒤 자살로 위장됐다는 내용을 확인하고 진실 규명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법원은 경찰의 가혹행위로 아들이 죽었다고 볼 증거가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신씨는 항소하겠다고 했다. 24년간 계속된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술집 다툼’ 연행된 문영수씨, 경찰 폭행으로 사망뒤 화장
법원 “1억여원 배상” 판결 불구, 시신은폐엔 ‘시효소멸’ 면죄부

문영수씨.
문영수씨.
흔한 싸움이었다. 술김에 싸움에 휘말린 스물여덟살 문영수(사진)씨가 광주서부경찰서로 연행된 것은 1982년 8월20일 새벽이었다. 경찰의 조사를 받던 문씨는 몇시간 뒤 광주적십자병원 응급실로 실려가 이틀 뒤 숨졌다. 당시 문씨의 조사 장면을 목격한 이는 “형사가 그 사람에게 수갑을 뒤로 채운 채 가슴·복부·머리 등을 사정없이 때려 공포감을 느꼈다”고 했다.

문씨가 숨지자 경찰은 그를 행려사망자로 몰아 주검을 전남대 해부학교실로 보냈다. 경찰이 허위로 작성한 ‘변사자사체처리의뢰서’에는 ‘순찰 근무 중 노상에서 신음하고 있는 행려환자를 발견해 광주적십자병원으로 후송했으나 사망했다’고 적혀 있었다. 전남대는 1983년 5월부터 7개월 동안 문씨의 시신을 해부학 실습용으로 사용한 뒤 다른 실습용 시신 12구와 함께 화장해 교내 추모관에 안치했다.

형이 사라지자 동생 문덕수(44)씨는 생업도 접은 채 형을 찾아 헤맸다. 그사이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다. 1987년 5월에야 동생은 치안본부의 ‘헤어진 가족 찾기 캠페인’을 통해 형의 사망을 확인했다. 형의 유골은 수습조차 할 수 없게 된 뒤였다.

형의 죽음에 의혹을 품은 동생의 ‘긴 여정’이 시작됐다. 동생 문씨는 당시 형을 조사했던 형사를 고소한 뒤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서울 종로 기독교회관 앞에서 농성을 벌였다. 1988년 1월 광주지법은 문영수의 사망 경위를 은폐하려고 허위공문서를 작성한 사실만 인정해 담당 형사에게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문씨는 제1, 2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 진정을 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지난해 11월18일 ‘부당한 공권력 행사로 피해자를 사망에 이르게 하였고, 사망 후에도 위법한 공권력이 행사된 인권침해사건’이라며 진실규명 결정을 냈다.

지난달 1일 서울중앙지법 민사14부(재판장 김인겸)는 “대한민국은 문영수의 유가족에게 1억2120만원의 손해배상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경찰이 문씨를 폭행해 사망에 이르게 한 뒤 사건을 은폐하려 시신을 해부학교실로 보낸 혐의가 모두 인정됐다. 하지만 재판부는 시신 은폐와 관련해서는 담당 형사에게 유죄 판결이 난 1988년에 유가족이 손해배상을 청구하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어 손해배상 시효가 끝난 것으로 판단했다. ‘피고 대한민국’은 손해배상 판결이 부당하다며, 유가족들은 소멸시효를 인정할 수 없다며 각각 서울고법에 항소해 재판이 이어지게 됐다.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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