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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아이들속에 묻힌 백전노장 김호 감독 “참 행복해”

등록 2010-10-12 19:39수정 2010-10-13 10:09

지난 9일 오후 2시 경남 통영 공설운동장에 모인 유소년 축구클럽 회원들이 김호 감독과 함께 활짝 웃고 있다. 김 감독은 주말마다 아이들과 함께 축구를 한다. 아이들 사이에서 그는 인자한 할아버지 같은 감독이다.
지난 9일 오후 2시 경남 통영 공설운동장에 모인 유소년 축구클럽 회원들이 김호 감독과 함께 활짝 웃고 있다. 김 감독은 주말마다 아이들과 함께 축구를 한다. 아이들 사이에서 그는 인자한 할아버지 같은 감독이다.
고향 통영서 ‘제2의 축구인생’ 연 김호 감독
지난 9일 경남 통영시 공설운동장 위 하늘은 눈부시게 푸르렀다. 빨간 유니폼을 입고 자기 머리보다 큰 축구공을 이리저리 굴리던 아이들이 김호(66) 감독을 발견하고는 달려왔다. “감독님, 안녕하세요!” 김 감독은 올해 초 고향 통영으로 내려와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타칭 ‘한국 감독들의 아버지’, 자칭 ‘축구계의 야권’인 그는 아이들에게 “공정하게 공을 차면 이긴다”고 가르친다. 한국 축구계에 던지는 쓴소리와 호통도 거침이 없었다.

■ 통영 소년, 다시 통영으로

어린 시절 축구공을 따라 뛰던 풍경을 떠올릴 때면 코스모스 향이 난다. 전쟁의 폐허 위에 학교를 세웠던 1950년대 말, 통영중 축구부 학생들은 학교 앞 코스모스밭을 뛰어다니며 공을 찼다. “감독도 코치도 없이 뭐가 그리 좋아 종일 찼는지….” 머리가 하얗게 센 그의 눈빛이 아련해졌다.

그는 열일곱살에 고향을 떠났다. 통영고에 축구부가 없어 부산 동래고로 전학을 갔다. 열아홉살에 대표팀에 뽑혔다. 75년에 모교인 동래고를 시작으로 한일은행, 울산 현대, 수원 삼성 등 실업팀과 프로축구팀의 감독을 두루 맡았다. 94년엔 국가대표 축구팀 감독으로 미국 월드컵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

하지만 시골 소년의 50년 타향살이는 녹록지 않았다. 전학 간 고교에선 텃세를 견뎌야 했고, 집안 형편 탓에 대학 대신 실업팀으로 간 뒤에도 학연·지연의 벽에 숱하게 부딪혔다.


2008년 5월, 큰아들 가족이 교통사고를 당해 아들이 크게 다치고 며느리와 손자를 잃는 아픔도 겪었다. 대전 시티즌 감독을 지내던 그가 통산 200승 고지를 눈앞에 두고 있을 때였다. 그는 200승 달성 소감으로 “며느리와 손자에게 영광을 돌린다”고 했다. 이제 큰아들은 다행히 몸이 나아 서울의 한 고교에서 체육교사로 일하며 축구부를 맡고 있지만, 상실감은 쉽게 메워지지 않았다. 마침 통영에서 유소년 축구클럽 감독직 제의가 들어왔다. 지난 3월, 그는 홀로 낙향했다.

그에게 통영 생활은 50년 타향살이의 꿈이었다. 고향에 돌아가 후배들을 육성하고 싶다는 생각을 줄곧 해왔다. “한국은 아직까지도 어른들이 지역으로 돌아가 그동안 쌓아온 노하우를 전수해주며 사회에 기여하는 시스템이 정착되지 않았다.” 고향의 유소년 축구 감독 자리는 그에게 최고의 제안이었다.

고향으로 돌아간 이유는
큰아들 가족 교통사고 상실감
프로 200승 달성뒤 홀로 낙향

■ 수백명의 손주들을 얻다

통영에서 그의 직책은 여러가지다. 우선 통영중·고 축구부 ‘제2의 감독’이다. 그는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는 새벽 5시에 일어나 수업 시작 직전까지 통영중·고 축구부를 지도한다. “똘똘하고 기량이 뛰어난 선수들이 꽤 많다.” 중학교 시절 코스모스밭에서 국가대표를 꿈꿨던 그는 이제 아이들에게 “너희도 국가대표가 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수요일과 목요일에는 ‘방과후 선생님’이다. 통영시내 초등학교를 돌며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을 모아 축구를 가르친다. 방과후에 진행되는 이 프로그램은 인기가 좋아 갈 때마다 아이들이 늘어난다. 그는 “갈 곳이 없어 혼자 컴퓨터 게임이나 하고 놀면 개인주의에 빠지기 쉬운데 함께 축구를 하면 사람들과 어울리는 법을 배울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주말이면 비로소 ‘김호 감독’이다. 지난 4월부터 통영 공설운동장에 나가 6살부터 초등학교 6학년까지의 남녀 아이들로 구성된 유소년 축구클럽을 지도하고 있다. 그가 연령별 훈련 계획을 세우면 4명의 코치가 아이들을 가르친다. 그가 오기 전 50명에 불과했던 클럽 회원은 6개월 사이 300명으로 불어났다. 4살짜리 손자를 하늘로 보내야 했던 할아버지는 이제 수백명 손주들의 사랑을 받는다.

클럽의 홍평대(9)군은 “감독님이 축구를 잘 가르쳐주셔서 정말 재밌다”고 말했고, 정인희(9)양은 “커서 (17살 이하 여자월드컵의 주역인) 여민지 언니처럼 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지난 7월에는 17살 이하 여자월드컵 우승을 거둔 최덕주(50) 감독이 통영을 다녀갔다. 김호 감독의 동래고 제자인 최 감독도 통영 출신이다. 김 감독은 “최 감독이 여자축구를 육성하는 데 몇년 더 노력을 기울이겠다기에 그 일이 끝나면 함께 통영에서 후배들을 육성하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자타 공인 ‘축구계의 야권’
“스타 됐다고 큰 자리로만…
그러면 한국축구 미래없다”

■ “축구 스타들 예스맨처럼 살면 안 돼”

통영은 이순신 장군의 혼이 깃든 곳이다. 김 감독은 어린 시절부터 이순신 장군을 좋아했다. ‘충무 앞바다에 앉아 국제정세를 꿰뚫어본 전략가’였다는 게 김 감독의 평가다. 그는 요즘 통영에 앉아 한국 축구의 미래를 걱정하고 있다.

김 감독은 2002년 월드컵 이후 쏟아져 나온 ‘축구 스타’들에게 쓴소리를 했다. 그는 “스타가 됐다고 예스맨처럼 살아선 안 된다”며 “차범근, 홍명보, 황선홍 선수처럼 국민들의 사랑을 많이 받은 이들은 정식으로 유소년 축구부터 지도자 과정을 차근히 밟아야지 큰 자리로만 가려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축구협회가 축구 스타들에게 한자리씩 내주고 선거 때가 되면 이들을 동원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면 한국 축구의 미래는 없다”고 단언했다.

그는 통영에서 시작하는 큰 꿈을 꾼다. 이곳에서 기틀을 닦아 경남 축구를 발전시키고 세계로 나아가겠다고 했다. 유소년 축구를 잘 다져 좋은 선수들을 길러내고, 무엇보다 ‘행복하게 공을 차는 아이들’이 많아지도록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김 감독은 “통영엔 기량이 좋은 아이들이 많아 세계에 이름을 날릴 선수가 나올 듯하다”고 기대를 나타냈다. 그리고 자신도 더 오래 축구를 할 생각이다. “50년을 했는데도 아직도 축구가 재미있네요.” 통영/글·사진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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