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레이저’로 자체 삭제뒤 업체 찾아 영구삭제
보고서 빼돌려 들고다니거나 집에 숨겨놓기도
보고서 빼돌려 들고다니거나 집에 숨겨놓기도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창성동 별관 4층의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지원관실). 한때 ‘암행감찰반’으로 불리며 공직사회를 벌벌 떨게 할 정도로 위세를 떨쳤지만, 2010년 7월 초순 이곳엔 불안감이 감돌 뿐이었다. 정치권과 언론을 통해 케이비한마음 대표 김종익(56)씨를 불법사찰한 사실이 알려지자 총리실은 자체 조사를 거쳐 검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불법사찰의 전모가 밝혀지는 것은 시간문제인 듯 보였다.
장아무개(37·불구속 기소) 지원관실 기획총괄팀 주무관은 7월5일 새벽 일찍 출근했다. 직속상관인 진경락(43·구속 기소) 기획총괄과장의 지시대로 지원관실 컴퓨터 하드디스크의 저장자료를 완전히 삭제하기 위해서였다. 장 주무관은 아침 6시30분에 사무실에서 ‘이레이저’ 프로그램을 다운받아 휴대용 유에스비 메모리에 저장했다. 이레이저는 하드디스크 파일뿐만 아니라 인터넷 로그 기록과 전자우편 관련 자료까지 모두 삭제하는 프로그램이다. 장 주무관은 내려받은 이레이저를 점검 1팀원들의 컴퓨터 9대에 차례차례 꽂아 자료 삭제를 시작했다. ‘확인필요사항(KB한마음).hwp’, ‘남경필의원내사보고.hwp’ 등의 사찰 자료를 지웠다. 작업은 오전 중에 끝났다. 검찰이 특별수사팀을 꾸려 수사에 착수한 바로 그날이다.
정부중앙청사 안에서 저질러진 조직적인 증거인멸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장 주무관은 이틀 뒤인 7일, 지원관실 컴퓨터 하드디스크의 내용을 영구 삭제하는 추가 작업에 들어갔다. 장 주무관은 청와대 고용노사비서관실 최아무개 행정관한테서 휴대전화를 받아왔다. 최 행정관이 그날 오전에 개설한 ‘대포폰’이었다. 그는 이 전화로 수원의 한 업체에 영구 삭제를 부탁했다. ‘디가우서’라는 장비에 하드디스크를 넣으면 강력한 자력으로 데이터를 완전히 지우는 방식이었다. 장 주무관은 지원관실 하드디스크 4개를 본체에서 떼어내 수원으로 갔다. 하드디스크 1개의 자료가 영구 삭제되는 데는 40초가 채 걸리지 않았다. 장 주무관은 다시 서울로 돌아와 대포폰을 최 행정관에게 돌려준 뒤 하드디스크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컴퓨터 본체에 다시 끼워넣었다. 검찰의 지원관실 압수수색은 이틀 뒤인 9일에야 이뤄졌다.
증거인멸에는 디가우싱 등 첨단 기술뿐만 아니라 고전적인 방법도 동원됐다. 점검 1팀원인 권아무개(39·불구속 기소)씨는 김충곤(54·구속 기소) 팀장에게서 건네받은 ‘김종익씨 허위사실 유포건 처리결과 보고서’를 직접 들고 다니거나 집에 숨겨놓았다. 또 사무실에서 쓰던 자신의 컴퓨터를 아예 반출하는가 하면 하드디스크가 손상된 ‘깡통 컴퓨터’를 자신의 책상에 올려놓기도 했다.
검찰은 지원관실이 조직적으로 벌인 증거인멸의 단서는 포착했지만, 이를 지시한 사람 등 ‘윗선’은 밝혀내지 못했다. “진 과장의 지시를 받았다”는 장 주무관의 주장과 “그런 적이 없다”는 진 과장의 반박이 엇갈렸는데, 검찰은 어느 쪽이 진실인지 판단하지 못한 채 수사를 끝냈다.
김태규 기자 dokb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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