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지 조직이 국내 브로커 경유 임차해 범행…SK는 “몰랐다”
지난 9월 민아무개(63)씨는 “우체국 직원인데 본인 명의의 카드가 무단 발급된 듯하니 당장 통장의 돈을 이체하라”는 전화를 받았다. 보이스피싱이 아닐까 순간 의심을 했지만 휴대전화에 뜬 발신번호가 ‘02-6410-****’라는 서울 시내 전화번호였기에 안심하고 통장 잔액 500만원을 전화 목소리가 불러준 계좌로 이체했다. 사기를 당하는 데는 5분도 걸리지 않았다.
놀랍게도 전화 발신지는 중국이었다. 지난해 5월부터 국제전화 식별번호제를 도입해 보이스피싱을 막아보려던 노력을 비웃듯 범행 수법이 진화한 셈이다.
어떻게 중국에서 걸려온 전화가 서울 시내 전화번호로 둔갑할 수 있었을까? 회선을 추적하던 서울 송파경찰서는 그 과정에 국내 기간통신사업자인 에스케이(SK)브로드밴드가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흐름은 이렇다. 보이스피싱 조직이 사용한 전화 회선 1800개는 모두 에스케이브로드밴드가 내준 회선으로, 서울 지역번호 ‘02’에 ‘6410’, ‘6411’이란 국번이 붙어 있었다. 에스케이브로드밴드로부터 1800개의 회선을 임대받은 이는 에스(S)인터넷폰이라는 회사의 대표 박아무개(47)씨였다. 박씨는 서울 동대문구 용두동에 회사를 차려놓고 사내 전화망으로 1800개의 회선을 임대받았다. 그 뒤 중국의 30개 가맹점을 통해 이 회선들을 보이스피싱 조직에 회선당 1만5000~2만원씩에 임대했다. 이를 통해 보이스피싱 조직은 지난 3년간 430여건의 범죄를 저질렀고, 박씨는 2억3500만의 부당이익을 취했다.
1800개의 회선이 보이스피싱 범죄에 활용됐지만 에스케이브로드밴드 쪽은 “몰랐다”는 태도다. 회사 관계자는 “고속도로를 건설한 업체가 그 위로 범죄 차량이 돌아다니는 것을 알 수 없듯이 우리도 회선을 통해 벌어지는 범죄를 알 방법이 없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경찰은 “해당 기간통신사업자는 지난 3년간 수사기관으로부터 해당 회선의 가입자를 확인하기 위한 통신자료 제공 요청만 430여건을 받았다”며 “해당 가입자가 무등록 별정통신업자인데 이러한 사실을 몰랐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밝혔다. 에스케이브로드밴드는 1800개 회선에 대해 한달에 72만원씩 지난 3년 동안 2500만원 상당의 수입을 올렸다.
경찰은 박씨를 전기통신사업법 위반으로 구속영장을 신청했고 에스케이브로드밴드에 대해서는 범죄 방조 혐의를 두고 수사를 계속할 계획이다.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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