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의 ‘마더 존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연방군을 동원해 노동자들의 인권을 무지막지하게 짓밟았던 미국에는 검은 드레스 차림으로 파업현장을 누비며 특유의 독설로 자본가들의 비도덕성을 맹비난하고 투쟁심을 일깨웠던 마더 존스가 있었다. 아일랜드 이민자의 후예였던 그이는 1867년 남편과 자녀를 황열병으로 잃은 뒤 노동자와 미국의 현실에 눈을 떴다. 마더 존스는 ‘내 주소는 내 신발과 같아요. 어디든지 억압에 반대하는 투쟁이 전개되는 곳에 있으니까요.’라는 자신의 말대로 살았다. 그리고 한국에는 어머니 이소선이 있었다. 많은 이들이 피 흘리고 끌려가고 죽임 당했던 7, 80년대 한국의 고난과 투쟁의 현장에는 반드시 흰 저고리에 검은 치마, 수수하게 틀어 올린 머리에 화장기 없는 민낯의 이 열혈 여성이 있어 힘을 보태고 말을 보태고 용기를 보탰다. 그는 죽어가는 자의 손을 잡아주고 싸우는 자와 함께 싸웠으며 끌려가는 자와 함께 끌려갔다.
“지금이나 어머니, 어머니 하지 그때 이소선 씨를 누가 알아. 경찰들도 ‘저 여자 어떤 예펜네야.’ 하면서 말도 못하게 무시를 했다고. 나는 그래도 목사라는 사회적 지위가 있으니까 어느 정도는 대접을 해 주잖아. 근데 이소선 씨는 정말 처절하게 당했어요. 안기부에 끌려가서 두들겨 맞고 조롱당한 얘기하면서 참 같이 부둥켜안고 울기도 많이 울었지. 그때 생각하면 정말 화가 나고 가슴이 저려.
청계피복, 동일방직, 원풍모방, YH무역 등에서 뿌려진 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씨앗이 전태일의 죽음을 자양분으로 싹틔워진 것이라면, 이소선은 그 여린 싹들이 자라는 기쁨으로 비바람에 제 몸 삭는 줄도 모르는 나무 울타리 같은 존재였다. 그는 아들 전태일의 죽음이 던진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막연한 죄의식에 시달리던 나약한 지식인들을 한없이 부끄럽게 만들었다. 이들 가운데 몇몇은 그를 일러 ‘한국의 마더 존스’라 했다.
한국의 마더 존스
“70년 12월 청계피복 노조가 최초의 수난에 부딪쳤을 때 어머니를 뵈었어요. 노조 탄압에 맞서 결사 항전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평화시장으로 뛰어갔죠. 노조 사무실이 시장 옥상에 있었는데, 점심 때라 어린 시다들이 올라와 삼립빵 하나씩 먹고 내려가는 모습이 보였어요. 사무실은 불에 그을려 있고, ‘전태일 한 사람의 희생으로 부족하다면 우리 모두 한꺼번에 죽어주겠다.’며 석유 몇 말 사다놓고 하여간 결의가 대단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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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죽은 다음 해, 한영섬유 노동자 김진수가 노조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드라이버에 찔려 사경을 헤맬 때 맨 처음 발 벗고 나선 것도 이소선이었다.
“전태일 어머니가 왜 똑똑하다고 하냐면, 어차피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니까 명예라도 회복시켜줘야 한다, 가만히 있으면 영원히 묻혀 버리고 만다고 몇 번 강조하셨거든요. 그때 선거도 앞두고 있었고 노동운동이 한창 커나가는 때였지만 전태일 어머니처럼 목소리를 높여서 세상에 얘기를 해 준 사람은 없었다고 보거든요. 그게 자극제가 돼서 각 단체나 노동자의 권리 찾기가 커져 갔죠.”(박건영, 71년 사망한 김진수의 동료)
장기표는 나의 스승
죽은 아들의 마지막 부탁을 이루기 위해 무작정하고 뛰어든 노동운동 길. ‘돈도 없고 빽도 없고 배운 것도 없는’ 이소선에게 오죽이나 서럽고 험한 길이었을까. 전태일이 그토록 필요로 했던 ‘대학생 친구’들이 한국판 나로드니끼운동이라 할 대대적인 현장 이전을 감행하여 구속, 해고, 수배, 고문을 마다않는 헌신적인 투쟁으로 한국 노동운동의 르네상스를 일으킨 것은 80년 광주항쟁 이후. 그 젊은 동지들이 떼를 지어 노동현장에 몰려오기까지 이소선이 마음을 의지하고 조언을 구할 만한 사람은 함석헌, 장기표를 비롯한 몇 명뿐이었다. 특히 전태일 장례식을 계기로 평화시장에 드나들기 시작한 장기표는 이소선에게 ‘돌아온 아들’이자 노동운동의 나침반과도 같은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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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스승’으로 여길 만큼 절대적인 신뢰를 보냈던 장기표가 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되었을 때도 이소선은 그를 만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형사들은 이소선의 창동 집을 ‘빨갱이 합숙소’로 찍어놓고 드나드는 사람을 노골적으로 감시했지만, 노동자나 후배들 사이에서 ‘형사들도 지쳐 쓰러져 자는 새벽녘에 나타났다 날 새기 전에 사라지는 사람(김문수, 국회의원)’으로 통했던 장기표는 수배 중에도 이소선의 창동 집을 귀신 같이 드나들었다. 장기표가 홍길동처럼 신출귀몰할 수 있었던 데는 수배자에게 이불 보따리를 짊어지워 교묘하게 얼굴을 가리고 형사들 앞을 지나가게 하는 이소선의 뱃심과 지혜가 한몫을 단단히 했다.
77년 7월, 긴급조치위반 혐의로 구속된 장기표의 재판을 쫓아다니던 이소선은 ‘노동자들의 임금인상투쟁을 지원한 것은 북한의 지령에 의한 것이 아니냐.’는 재판장의 말에 격분해 ‘판사나 검사나 다 똑같은 놈’이라며 거칠게 항의하다 법정모욕죄로 구속되었다. 이소선과 청계노조의 활동을 눈엣가시로 여겨 온 정부는 이소선이 실장으로 있는 노동교실까지 강제 폐쇄했다. 분노한 노동자들은 ‘노동교실 탈환’, ‘이소선 어머니 석방’, ‘노동삼권 보장’ 등의 요구를 내걸고 청계피복노조사를 피로 아로새긴 9월 9일의 결사항전을 치르게 된다. 노조 간부와 조합원들의 투신·할복 기도가 잇달았던 치열한 이날의 싸움에서 중상을 입었던 민종덕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에게 어머니는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존재였어요. 어머니 그늘에서 운동을 해왔는데 그 바람막이를 구속시킨 거잖아요. 그래서 어머니가 그들이 함부로 탄압할 존재가 아니라는 것, 또 저들의 노조 탄압에 일정하게 타격을 줘야겠다는 생각에서 그런 극한투쟁을 해낸 거죠.민종덕과 같은 노동자가 제2, 제3의 전태일이 되어 한국 노동운동의 중추가 되기까지 이소선의 역할을 부인할 사람은 없으리라. 이소선은 그들 모두의 ‘어머니’였다. 인간은 누구나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존재’를 품고 죽을 때까지 살아간다. 그것은 어머니. 먹이고 입히고 재울 뿐만 아니라 어떤 갈등과 반목에도 편들어 주는 세상의 단 한 사람. 객지에 나와 무시당하고 설움 받고 외로움에 떠는 노동자들에게 ‘창동 어머니’ 이소선은 그런 존재였다.
“그러니까 정보기간에 잡혀가면 뭐라고 하는지 알아? 나보고 빨갱이래. 북에선 ‘김일성 아바이’ 하고 남에선 ‘이소선 어머니’ 하니까 한 통속이라고.”(이소선)
* 김 기 선1965년 서울 출생.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저는 열네 살 선영이에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시대의 불꽃> 중
『전태일』·『김진수』·『최종길』 편 발표.
현재 격월간 『삶이 보이는 창』의 기획위원으로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