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말 배울 수 있게 도와주세요”
“한국말을 꼭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러시아 국적을 가졌지만, 고려인의 얼굴을 러시아 민족처럼 바꿀 수는 없는 것입니다.”
1만5천여 고려인(옛 소련 지역 거주 한인)들이 사는 연해주 우스리스크에서 ‘연해주 민족학교 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는 조 엘레나(41)씨는 고려인들이 한국어를 익혀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19세기 중반부터 연해주로 넘어가기 시작한 고려인들은 현재 3~6세들이 주축을 이뤄 한국어를 모르거나 서툰 이들이 많은데, “한국말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분위기”라고 조씨는 전했다.
조씨가 지난 5일 서울에 온 이유는 오는 9월 ‘한민족 문화교육을 포함한 제3학교’로 새 출발하는 민족학교에 대한 지원을 호소하기 위해서다. 초·중·고교 과정을 아우르는 ‘우스리스크 제3학교’에서는 그동안 보충수업을 통해서나 한국어 교육이 이뤄졌다. 그러다가 고려인들의 청원으로 한국어를 정규과목으로 하고, 이름을 바꿔 민족학교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학생 750여명 중 210여명이 고려인이다. 한국어를 정규과목으로 지정하기로는 ‘모스크바 1086학교’ 이후 두번째다.
그런데 제대로 민족학교의 틀을 갖추려면 갈 길이 멀다고 조씨는 말한다. “교실이 모자라 3부제 수업을 하고, 필수 교과목으로 지정되는 한국어 수업은 다른 기관 건물을 빌려야 할 형편”이라고 한다. 한국어 교사들의 연수를 실시하고 한국문화 교육을 늘리는 데도 재정문제가 걸린다고 했다. 교육기자재들도 부족한데, 만약 이런 문제들이 해결되면 더 많은 고려인 학생들이 찾을 것이라고 조씨는 설명했다.
이런 상황을 이겨보고자 동북아평화연대( www.wekorean.or.kr )가 조씨와 세르게이 안드레이비치 교장 등을 초청했고, 지난 6일 송월주 전 조계종 총무원장 등이 참여한 ‘연해주 민족교육 살리기 추진위원회’가 발족했다.
고려인 3세로 교사 출신인 조씨가 사는 우스리스크는 일제 시대에 이상설, 최재형 선생 등이 독립운동을 벌이다 산화해 간 곳이다. 또 1937년 스탈린정권의 강제이주 때 수많은 고려인들이 집과 땅을 버리고 떠나간 현장이기도 하다. 한-러 국경 근처 포시에트에서 고려인을 가르치던 할아버지를 비롯한 조씨 가족들도 그 때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당했다고 한다. 우즈베키스탄에서도 임시학교를 열어 학생들을 가르치던 할아버지는 이듬해 밤중에 들이닥친 소련 경찰에 끌려갔다고 한다.
“아버지는 지난해에야 할아버지가 1943년 강제노역 중 돌아가신 것을 확인했고, 아직 유해를 찾고 있다”고 말하는 조씨의 얼굴에 우리 민족의 어두운 과거가 드리운 그림자가 스쳤다.
이본영 기자 ebon@hani.co.kr
이본영 기자 e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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