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사진 오른쪽)와 함께 생전에 아버지가 보내온 편지와 사진을 들고 있는 류연상씨.
‘강제동원’ 아버지 묘소 확인위해 사할린 떠나는 류연상씨
일제 때 징용 뒤 66년간 생이별
지난해 러 공동묘지서 비명 확인
“한맺힌 가족들에 유해 봉환돼야”
일제 때 징용 뒤 66년간 생이별
지난해 러 공동묘지서 비명 확인
“한맺힌 가족들에 유해 봉환돼야”
광복절인 오는 15일, 올해 예순여덟인 류연상씨는 노모 라준금(86)씨를 모시고 러시아 사할린주 코르사코프로 향한다. 66년 전 그가 두살 때 사할린으로 강제징용 당한 아버지의 산소를 찾아 나서는 두번째 여정이다. 모자는 4년 전 광복절에도 무작정 코르사코프로 떠났다. 비가 오던 날 조선인들이 묻혔다는 공동묘지에서 아버지 산소를 찾아 헤맸지만 허사였다.
시름에 잠겨 있던 그에게 기적이 일어났다. 지난해 한 일간지에 게재된 사진 속 묘비에서 아버지와 자신의 이름을 발견한 것이다.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강제동원규명위)가 2007~2008년 코르사코프 공동묘지에서 벌인 표본조사 당시 찍은 사진이었다. 아버지 산소가 있음을 확인했지만, 그가 소원하는 유해 봉환은 까마득한 일이다. 지금까지 사할린에 묻힌 강제징용 피해자 유해가 한국으로 돌아온 경우는 공식적으로 한 건도 없다. 산소조차 찾지 못한 피해자 가족도 있다. 모자에겐 시간이 많지 않다. 노령인 어머니 건강이 언제 나빠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지난 6일 서울 숭실대에서 열린 ‘일제강제동원 & 평화위원회’ 창립식에 참여한 류씨는 강제징용 피해자 가족으로서 겪었던 고통을 한·일 역사 연구자들에게 설명했다. 한·일 연구자와 시민활동가들이 함께하는 민간 네트워크 ‘일제강제동원 & 평화위원회’는 아직 다 규명되지 않은 강제동원 문제를 지속적으로 연구하고, 이를 대중에게 알리는 작업을 할 계획이다.
전라북도 완주군 운주면 고당리 싸리재에서 태어나 농사를 짓던 류씨의 아버지 류흥준씨는 1945년 음력 정월 초나흗날, 집으로 찾아온 면서기들에 이끌려 길을 나섰다. 할머니와 어머니가 전해준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다. 그해 8월 조선은 해방됐지만 사할린에 끌려간 3만여 조선인들은 돌아오지 못했다. 전쟁 막바지에 마을이 불타면서 류씨와 어머니는 아버지가 보낸 편지마저도 챙겨 나오지 못하고 피란을 떠났다.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아버지는 그렇게 류씨 가슴속에 묻혔다. 30여년간 가난과 싸우며 대학원 공부까지 마치고 사회에서 자리를 잡아가던 1976년, 그는 대구에 있던 ‘화태 억류 교포 귀환촉진회’라는 곳에서 보낸 엽서 한통을 받게 된다. 당시 일본에 있던 ‘사할린 동포 귀환촉진회’에선 사할린 동포들의 편지를 모아 한국에 전달했는데, 그중엔 류씨 아버지가 보낸 편지도 포함돼 있다는 내용이었다. “나랑 어머니가 살아 있는지 모르고 작은아버지 앞으로 보냈더라고요. 아버지 글씨를 처음으로 봤는데 낯설지가 않았어요. 이상하게….” 설레는 마음으로 아버지에게 편지를 썼다. 아버지도 아들에게 답장을 보냈다. 서로 살아 있음을 확인했으니, 함께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기쁨은 잠시였다. 1977년 사할린에서 낯선 사람이 편지를 보냈다. 아버지가 별세했다는 소식이었다.
그렇게 또다시 30여년이 흘렀다. 그동안 소련 공산정권이 무너지고, 정부 차원에서 강제동원 피해 진상규명도 시작했다. 그러나 류씨의 사부곡은 끝나지 않았다. 그는 미국이 한국전쟁 당시 북한에서 전사한 자국민 유해를 송환한다는 뉴스를 볼 때면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피해자 유족들도 얼마 남아 있지 않아요. 유해 봉환을 서둘러야 합니다. 60여년 전에 일어난 일이라고 남들은 과거라고 하는데, 계속 외면하다 보면 잊혀져 진짜 과거가 되겠죠. 그러나 나같이 한맺힌 사람이 살아 있으니 사할린 강제징용 문제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입니다.” 글·사진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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