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신도(89) 할머니
재일위안부 송신도 할머니의 외침
13년만에 고국 땅 다시 밟아 ‘아시아연대회의’서 피해 증언
“지진때 한국분들 많이 도와줘 직접 만나 고마움 전하고 싶어”
13년만에 고국 땅 다시 밟아 ‘아시아연대회의’서 피해 증언
“지진때 한국분들 많이 도와줘 직접 만나 고마움 전하고 싶어”
“비빔밥?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인데. 한국에 가면 꼭 먹고 싶었어. 빨리 (식당으로) 가자.”
점심 메뉴가 비빔밥이라는 말에 할머니는 아이처럼 좋아했다. 일본군 위안부 생활과 타국에서의 오랜 차별 등을 겪으며 한국인임을 숨기기 위해 한국말조차 잊어야 했지만, 타고난 입맛만은 절대 잊혀지지도 변하지도 않았다.
재일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인 송신도(89) 할머니가 1998년 이후 13년 만에 고국 땅을 밟았다. 지난 13일 서울 종로구 한국기독교 100주년 기념관에서 열린 ‘제10차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아시아연대회의’에 참석한 송 할머니는 그동안 한국에 가자는 제안을 여러 차례 받았지만 거절해왔다고 했다. 겉으로는 “귀찮아서”라고 했지만, 속마음은 그게 아니었다. 1993~2003까지 10년에 걸쳐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군 위안부 배상 소송’에서 결국 패소한 할머니는 자신의 억울함을 한국 정부가 풀어주길 바랐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미온적이었고, 이에 대한 섭섭함이 고국을 향한 할머니의 발길을 붙잡았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한국에 가자”는 말이 나오자마자 짐을 싸기 시작했다. “쓰나미 났을 때, 한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나를 걱정하고 도와줬어. 그 정이 고마워 직접 만나 인사하고 싶었지.”
지난 3월 진도 9.0의 지진과 함께 쓰나미가 덮쳤을 때, 할머니는 피해가 집중됐던 미야기현에 살고 있었다. 대피를 하자는 사람들에게 할머니는 14년 동안 가족처럼 아낀 애견 ‘마리꼬’를 맡겼다. 혹시라도 대피 행렬에서 뒤처지면 마리꼬마저 위험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홀로 고지대 건물에서 하루를 버틴 할머니는 다음날 인근 공사장 인부의 등에 업히기도 하고 또 걷기도 하며 6㎞를 이동해 센다이 대피소에 도착했다. 구조된 뒤 할머니는 한국과 일본에서 모금해 준 돈으로 도쿄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얻었다.
“쓰나미가 무섭지 않았느냐”고 묻자 송 할머니는 “총알이 날아다니는 전쟁에서도 살아남았는데, 질긴 목숨이 허무하게 죽을 리 없다고 생각했어”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송 할머니는 ‘삶’에 대한 애착이 강했다. 16살이던 1938년 중국 무창으로 끌려가 7년 동안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했을 때도, 위안부 생활 중 낳은 아이를 남의 손에 맡겨야 했을 때도, 50년 넘게 일본에서 손가락질당하고 차별받을 때도, 할머니는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고 했다. “일본놈들에게 ‘제대로 된 사과’를 받아낼 때까진 죽을 수 없지. 내 마음만은 일본에도, 죽음에도 절대 지지 않아.”
할머니는 이날 행사에서 대만·일본·타이·필리핀 등 9개 국가 70여명 앞에서 군 위안부 생활에 대해 증언했다. 행사를 마치고 헤어질 때 할머니는 기자의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 다 잊었다던 ‘한국말’로 인사했다. “잘 가. 너도. 건강해야 돼.”유선희 기자 duc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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