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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한국전쟁 이후 사회운동의 서막을 연 4월혁명과 기념공간 (상)

등록 2005-07-12 11:19

국립4·19묘지, 4·19혁명 기념관 그리고 기념도서관

2003년은 4·19혁명이 일어난 지 43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리고 박정희 정권에 의해 ‘의거’로 격하되었던 ‘4·19’가 ‘혁명’이라는 명칭을 갖게 된지 정확히 10년이 되는 해이다. 이러한 명칭의 변화가 우리에게 어떤 실천적 의미를 갖게 되었는가에 대해서 말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혁명’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면서부터 국가적 차원의 대우가 달라졌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월이 흐를 수록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서 4·19혁명에 대한 기억이 점차 희미해져 가고 있다는 점 또한 부인할 수 없다.

1960년 사건이 발발한 이후, 4월혁명에 대한 공식적 평가는 대체로 학생들을 주체로 설정하고, 이들의 도덕적 열정과 순수성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이는 박정희 군사정권 하에서도 마찬가지였고, 문민정부 하에서도 약간의 뉘앙스 차이는 있지만 크게 다르지 않았다. 1)

그러나 1980년대와 1990년대 초 대학과 노동현장에서의 ‘4·19’는 학생들의 순수한 열정과 정의감에 기초한 민주주의의 추구도, 희생자에 대한 평화로운 애도와 추모의 시간도 아니었다. 오히려 ‘4·19’는 당시 쟁점이 되고 있던 사회운동을 위해 기억 속에서 새롭게 불러내어졌고, 최루탄과 돌멩이가 서로 뒤엉킨 집회와 시위 현장을 지켜내는 이념적 자산이었다. 4월혁명은 ‘미완의 혁명’이라는 널리 알려진 평가와 같이,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한국사회의 모순이라는 역사의 짐을 벗어버리지 못한 모습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1980년대와 1990년대 초의 ‘4·19’는 1960년의 ‘4·19’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4·19’는 해방 이후 점차 고착화되던 한국의 정치·사회체제 전반에 대한 발본적 문제의식과 저항의 지점들로 다시 독해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의 4월혁명은 극단적 파시즘체제는 아니지만 반공주의에 기초한 이승만 정권의 ‘국민총동원체제’에 대한 항거였고, 정치·사회적 변화를 꿈꾸었던 민중들의 항쟁으로 해석되었다.

국립4·19묘지의 기원과 역사성

%%990002%%4월혁명은 한국전쟁 이후 발생한 최초의 국가폭력에 의한 집합적 죽음이었다. 3·15의거 희생자를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185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고, 부상자도 수 천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4월혁명은 이승만 정권의 몰락을 가져왔던 만큼, 즉시 희생자들에 대한 기념사업이 추진될 수 있었다. 지난 호에서 서술한 3·15의거에 이어 4·19혁명의 기념사업이 진행된 형태를 구분해 보면, 크게 세 가지 형태였다. 첫 번째는 기념묘지 조성이었고, 두 번째는 상징조형물과 기념물 건립, 그리고 세 번째는 기념도서관 건립이었다. 상징조형물과 기념물 건립이 사건의 종료 직후부터 현실화되었던 반면, 기념묘지 조성과 기념도서관 건립은 5·16군사정권이 들어선 이후에 실현되었다.

이 글에서 주로 살펴볼게 될 4·19묘지는 1963년 9월 박정희 군사정권 하에서 조성되었다. 당시 조성된 4·19묘지는 협소한 공간에 매우 단조로운 구성 요소들, 즉 묘역과 기념탑, 부조, 화신영상, 수호신상 등이 일체를 이룬 기념물, 연못, 그리고 유영봉안소 등이 전부였다. 2)

이는 민주화운동을 기념하는 첫 집단묘지의 탄생이었다. 당시 서울의 도시공간에서 보면, 4·19묘지는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외곽에 위치했는데, 가장 큰 이유는 4·19묘지가 다른 반정부 시위를 촉발시키는 저항의 장소가 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4·19묘지는 1970년대 초에 유영봉안소가 추가로 건립되고, 몇 번의 묘역 확장과 부대시설 공사가 이루어졌으나, 1993년에 국립4·19묘지 조성사업이 시작되기 전까지 그 모습을 거의 그대로 유지했다. 따라서 1980년대 거리정치적 사회운동이 활발했던 시절에 이곳을 찾았던 사람들은 아직도 이 때의 모습으로 4·19묘지를 기억하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4·19묘지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방문을 했지만, 누구에 의해서, 왜 이렇게 만들어졌는가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이는 4·19묘지의 방문이 사회운동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기념공간의 역사성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990003%%4·19묘지를 설계하고, 조형물 등을 제작한 사람은 조각가로 유명한 김경승이었다. 그는 반민족문제연구소가 발행한 ·친일파 99인·에서는 대표적 ‘친일 부역자 미술가’로 평가받는 사람이다. 뿐만 아니라, 해방 이후에도 전두환 정권에 이르기까지 관과 대학에서 발주한 무수한 동상과 기념물 등의 건립에 있어서 중책을 역임한 사람이다. 물론 동학농민전쟁의 기념사업에도 그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친일 경력 그 자체로 그의 작품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할 수는 없으나, 그가 정치적·역사적 문제의식이 없이 예술활동을 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는 이승만 대통령과 인연이 있는 인하대의 재학생들이 1983년과 1984년 두 번에 걸쳐 교내에 세워진 ‘이승만 동상 철거 운동’을 전개한 다음해인 1985년에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이승만 박사 동상’ 건립이 이루어졌는데, 바로 김경승이 이것을 제작했다는 사실에서 잘 알 수 있다. 3)

문민정부 하에서 “역사바로세우기”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추진된 국립4·19묘지 조성사업에서는 이 점을 몰랐거나 문제시되지 않았다. 4·19묘지는 묘역과 잔디밭을 수직적 기념탑을 중심으로 한 대칭형 부조벽을 둘러쳐 구분하고, 기념탑 앞에 잔디밭을 기념행사를 위한 공간으로 배치함으로써 산 자와 죽은 자를 구분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설물들은 시기적으로 동작동 국립현충원의 충혼탑보다 앞선 것인데, 결과적으로는 국가가 건립한 기념묘지 내의 기념탑과 관련시설들의 기원처럼 자리잡게 되었다. 국립4·19묘지는 이를 한층 더 강화시켜 기념시설물이 정확하게 좌우 대칭형 구도로 만들었고, 입구에서 묘역과 유영봉안소에 단차를 둠으로써 권위성과 위계성을 강조하였다. 이는 당시의 집단적 기념묘지에 대한 일반화된 관념의 반영으로 볼 수도 있지만, 4·19혁명에 대한 인문사회과학적 검토와 재평가가 충분하게 선행되지 못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라고 볼 수도 있다. 4)

그리하여 1995년 4월에 완공된 국립4·19묘지는 기존 묘지의 유산들이 재질과 위치를 바꾸었을 뿐 그대로 유지되었다. 30여 년의 세월 속에 4·19묘지의 대표적 상징물로 굳어져 버린 ‘4월학생혁명기념탑’과 석벽부조, 화신영상 그리고 전면부의 좌우측에 세워진 수호신상이 그대로 존속하고 있는 것이다.

1) 4·19묘지를 상징하는 기념물인 ‘4월학생혁명기념탑’에는 “반민주독재와 불의에 항거하여 용감하게 싸우다가 생명을 바친 순국학도들의 거룩한 정신을 역사의 산 증거로 후세에 전하는 동시에 의혈의 대가를 널리 세계만방에 빛내게 하기 위함”이라고 건립 목적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1997년 공보처가 발행한 책자에는 “4·19혁명은 반독재 민주화를 위한 젊은이들의 숭고한 정열과 의지가 담긴 운동”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2) 서울특별시 종합건설본부가 1993년에 발간한 "4·19묘역 성역화사업 조성공사 실시 설계 종합보고서"는 기존 묘지의 공간구성에 대해 ‘묘역 공간의 협소, 공간적 전이상의 불균형, 산만한 공간 구성’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또한 ‘단차에 의해 이용공간과 성역공간으로만 확연하게 구분되어 있었으며, 연못이 부지 내에 비교적 큰 규모로 차지하고 있어 공간의 위계적 질서를 저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3) 이 외에도 관심을 끄는 것은 4·19묘지의 탑문을 작성한 사람이 시인 이은상인데, 그 또한 친일경력을 갖고 있어 현재에도 많은 논란이 되고 있으며, 박정희 정권에 유착했던 인물이라는 점이다.

4) 당시 국립4·19묘지는 문민정부 하에서 신속하게 사업을 마무리지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기존 묘지의 역사성과 공간적 미학에 대한 충분한 성찰의 시간을 갖지 못한 채 추진되었고, 4·19혁명에 대한 학술회의와 공청회가 개최된 것은 신 묘지의 완공이 임박한 때였다.

정 호 기(한국현대사회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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