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애 전 진실화해위 조사관이 31일 공개한 ‘특무대 문서철’의 일부. 사진 속 문서는 “9연대가 1951년 2월7일 오전11시께 산청군 금서면 방곡부락에 도착하자 부락민 7명이 근처 뒷산으로 도피하므로, 부락민을 전원 집결시켜 도피한 놈이 몇 놈이냐고 물으니, 묵묵부답한 이유로 전원 총살시켰다”는 보고내용이다. 안정애씨 제공
빨치산 토벌 빌미 “적의 손에 있는 사람 전원 총살”
전 진실화해위원 논문서 발표…“명백한 국가 책임”
전 진실화해위원 논문서 발표…“명백한 국가 책임”
한국전쟁 당시, 국군이 빨치산 토벌을 위해 경남 산청·함양 지역 양민 학살을 지시한 내용이 담긴 문서 원본(영인본)이 처음으로 공개됐다.
산청·함양사건 양민희생자 유족회는 31일 서울 여의도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산청·함양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 60주년 학술대회’를 열고, 학살 당시 국군의 지시 내용 등이 담긴 ‘특무대 문서철’을 공개했다. 특무대는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특명을 수행한 방첩부대다.
산청·함양사건 기록은 522쪽 분량의 이 문서철 중 헌병사령부가 작성한 보고서에 나온다. 보고서의 ‘연대작전명령제5호부록(1951년 2월2일)’을 보면, 국군11사단이 “적의 손에 있는 사람은 전원 총살하라”고 명령한 것으로 돼 있다. 자료를 공개한 안정애 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조사관은 “당시 토벌 대상 지역이 됐던 산청·함양 일대는 유엔군이 북진한 이후에도 정부가 치안을 확보하지 못했던 곳”이라며 “‘적의 손에 있는 사람’이란 대다수 지역주민을 뜻한다”고 설명했다.
이 작전명령이 포함된 보고서는 특무대로 이관되면서 특무대 문서철에 통합됐다. 이후 이 자료는 수십년간 잠자고 있다 2007년 안 전 조사관이 진실화해위 활동을 하던 중 이를 발견해 영인본을 특무대의 후신인 기무사로부터 건네받았다. 이를 토대로 진실화해위가 보고서를 발간하고 안 전 조사관이 논문을 발표하면서 국군이 양민 학살을 지시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한겨레> 2010년 10월11일치 10면)
안 전 조사관은 “이번 공개로 산청·함양사건 학살이 명백한 국가의 책임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됐다”며 “가해자인 국가가 나서 피해자의 상처를 치유해야 한다”고 말했다.
산청·함양사건은 1951년 2월7일 경남 산청·함양군 일대에서 국군 제11사단 9연대가 지리산 빨치산 토벌 과정에서 지역 주민을 논으로 불러모아 705명(유족회 주장)을 총살한 사건이다. 11사단 9연대는 산청·함양사건 이틀 뒤인 9일부터 11일까지 거창에서 700여명을 학살했고, 이는 ‘거창 양민학살’로 세상에 알려졌다.
이경미 기자 km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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