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수성 가득, 잡음까지 멋져” 20~30대 손님들 급증
전용바·레코드페어 등서 인기…홍대 전문매장 등장
전용바·레코드페어 등서 인기…홍대 전문매장 등장
지난 19일 오후 4시, 청바지 차림의 양홍석(31)씨는 서울 강남구 논현동에 자리잡은 복합문화공간 ‘플래툰 쿤스트할레’ 1층 한편에서 골판지 상자에 가득 쌓인 엘피판을 뒤적이는 데 여념이 없었다. 이날 플래툰 쿤스트할레에서는 국내 첫 엘피와 시디 판매·전시 행사인 서울레코드페어가 열렸다. 양씨는 영국 출신 록그룹 핑크플로이드 앨범 한정판 3장을 발견하자마자 6만6000원을 내고 선뜻 구매했다. 경기도 용인시에서 베이커리 카페를 운영한다는 그에겐 의외로 엘피 플레이어(턴테이블)가 없다. 양씨는 “이제 막 엘피를 알아가는 단계로 한정판이 희소가치가 높아질 것 같아서 수집할 겸 샀다”며 “엘피판 고유의 아날로그적인 느낌이 마음에 들어 카페에 장식해두면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날 행사에 참여한 2000여명 중에는 과거 엘피 문화를 많이 접해본 중장년층뿐 아니라 양씨 또래의 30대나 20대들도 많았다. 행사장에서 만난 대학생 조민경(22)씨는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엘피판들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구경하고 있었다. 조씨는 “엘피를 접해 본 적이 거의 없는데, 들어보고 싶다”고 말했다. 디자이너인 추승민(30)씨는 이미 2000여장의 엘피판을 보유한 수집가다. 이제는 들을 수 없는 옛날 흑인음악·솔펑크 앨범을 찾는 데 관심이 많다.
디지털 음원에 익숙한 20·30대들이 엘피의 매력에 눈을 뜨고 있다. 젊은이들이 자주 찾는 서울 지하철 2호선 홍대입구역 인근엔 예전에 중구 황학동이나 남대문 회현전문상가에서 볼 수 있던 엘피 전문매장 두 곳이 최근 문을 열었다. 10월부터 영업을 시작한 재팬레코드 전도영 대표는 “예전엔 클래식 음반이 많이 팔렸다면 요즘은 (구매자) 연령층이 내려가 재즈·팝·블루스·메탈 등을 찾는 이들이 많다”며 “손님 중에는 원래 구매자층인 50대 이상뿐만 아니라 20대도 많다”고 전했다. 엘피를 찾는 연령대가 다양해지면서 엘피 플레이어 판매도 늘고 있다. 서울 용산 전자상가 2층에서 오디오 기기를 판매하는 김영신(42)씨는 “불과 5년 전만 해도 용산 전자상가에서 엘피 플레이어를 취급하지 않았다”며 “그러나 지금은 우리 가게에서만 한달에 5~6대의 엘피 플레이어를 판다”고 전했다.
감수성을 울리는 듣기 편한 소리와 좋은 음질 등은 모든 세대에게 다가가는 엘피의 매력이다. 특히 젊은층에는 엘피가 예스러우면서도 세련된 문화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직장인 최아무개(30)씨는 “엘피가 돌아가면서 나는 잡음도 음악과 섞이면 그 자체로 멋지다”라고 말했다. 국내 인디음반사 ‘비트볼뮤직’ 이봉수 대표는 “가지고 다니기 편한 시디는 엠피3 음원과 큰 차별성이 없는 것에 비해 엘피는 사이즈가 클뿐더러 풍기는 이미지도 좀더 감각적”이라고 분석했다. 퓨전 국악밴드 ‘고래야’ 멤버인 안상욱(28)씨는 “빠르게 또는 느리게 들을 수 있고 즉흥 음악연주도 가능해 엘피를 갖고 노는 게 즐겁다”고 말했다.
엘피는 20·30대들이 어린 시절 즐기던 90년대 문화나 가요를 추억하는 매개체가 되기도 한다. 엘피를 틀어주는 바나 카페가 늘어나는 것도 이런 영향이 크다. 화요일이었던 지난 8일 밤 9시, 서울 홍익대 인근에 있는 ‘ㅂ’ 엘피 바에서는 1990년대 히트 가요인 4인조 혼성그룹 투투의 ‘1과 2분의 1’이 흘러나오자 1층 홀을 꽉 채운 20·30대 50여명이 목청껏 따라부르기 시작했다. 일부는 흥에 겨워 자리에서 일어나 당시 유행한 춤을 추기도 했다. 서울 강남역과 한남역 인근에도 매장이 있는 ‘ㅂ’ 바에는 20대 초반부터 40대 초중반 손님이 매일 300명가량 찾아든다. 직장 동료들과 이곳을 찾은 이한볕(25)씨는 “요즘은 유행하는 노래가 자주 바뀌는데, 예전에 가요 순위프로그램에서 10주간 1위 한 노래를 들으면 새롭다”며 “90년대 학창시절을 보낸 사람들에겐 이런 곳이 7080세대가 찾는 통기타 라이브카페인 셈”이라고 설명했다. 토요일이었던 지난 12일 홍익대 인근의 ‘ㄱ’ 엘피 바에서도 80~90년대 음악이 흘러나왔다. 대학 친구들과 이곳을 찾은 김아무개(31)씨는 “어릴 때 듣던 노래는 금방 따라부를 수 있다”며 “여기 온 사람들이 모두 같은 추억을 갖고 있어서 그런지 다 같이 어우러져서 노는 분위기가 좋다”고 말했다.
글 박현정 최우리 기자 sara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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