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혜미 양에게 보낸 고 리영희 선생의 답장
리영희 선생 1주기
‘소통 열망’ 담은 편지들
‘소통 열망’ 담은 편지들
리영희 선생은 언론인 출신답게 소통을 중시했다. 그의 이런 모습을 잘 보여주는 것이 편지다.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 리영희 선생의 조교 생활을 했던 최영묵 성공회대 교수는 리 선생의 연구실 책상 위에는 언제나 엽서가 20~30장씩 쌓여 있었다고 전한다. 선생께 저서를 보내주거나 연락을 해오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만년필로 정중히 감사의 뜻을 엽서에 적어 보냈다는 것이다. 유족들도 선생께서 “어떤 모임에서 만난 분이나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진 독자분들께도 꼼꼼히 편지를 보내셨다”고 말한다.
대부분의 편지에는 인간적인 정감이 묻어난다. 가령, 1989년 <한겨레> 방북 취재 구상 건으로 구속수감됐던 서울구치소에서 당시 초등학교 6학년인 노혜미양에게 보낸 편지(사진)에는 할아버지 같은 따뜻함이 배어 있다. 노혜미양은 당시 위로편지를 보낸 이들 중 최연소자였다. 선생은 혜미양에게 감옥에서 쓰는 봉함 편지의 앞면에 빼곡히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그리고 편지의 뒷면에 추신을 쓴 뒤, 또다시 조그만 여백을 발견하고는 “가을 좋은 계절을 맞아 책을 읽으려면 <창작과 비평> 출판사의 소년·소녀를 위한 아동전집이 참 좋을 것 같다”고 친손녀에게 하듯 독서를 권하기도 했다.
리영희 선생의 편지는 옥고를 치르고 있거나 고생하는 이들에게도 배달됐다. 임수경씨는 북한에서 열린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구속돼 있던 1992년 리영희 선생으로부터 주소 없는 편지를 받았다. 임씨는 당시 수감돼 있던 청주여자교도소의 우편번호와 “148번지 임수경”이라고만 써서 보낸 편지를 받으면서 “신선함을 느꼈다”고 말한다. 그 전에 어떤 접촉도 없었지만, 대학생 신분으로 엄청난 상황을 맞이한 상대방에게 ‘감방 선배’로서 동지애를 전한 것이다.
하지만 그가 쓴 편지 중에서 가장 슬픈 것은 1977년 어머니의 임종을 못한 상태에서 어머니의 영전에 바치는 편지일 것이다. 당시 그는 <우상과 이성> 출판과 관련해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된 상태였다. 그는 “어디로 간다고 말씀도 드리지 못한 채 집을 나와 지금 몸의 자유를 잃고 있는” 상태에서 찾아든 어머니의 부고에 진정으로 가슴 아파했다.
<한겨레>가 리영희 연구를 위한 기초자료로 수집해온 편지에는 이밖에도 선생이 주고받은 다양한 내용들이 모이고 있다. 리영희 선생의 편지는 생전뿐 아니라 지금 이 시대에도 그의 목소리를 전하는 메신저가 되고 있다.
김보근 기자 tree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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