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가 일본 겨눈 비수라 먹었다’ 가 어찌 교과서에…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의 교과서는 한반도가 일본을 겨눈 비수와 같아서 그냥 둘 수 없다는 둥, 어차피 러시아나 중국이 먹게 돼 있는 판에 우리가 먼저 먹었을 뿐이라는 둥, 그런 내용을 버젓이 실어놓고 있다. 어떻게 교과서에서 그따위 짓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모욕적인 일이 어디 있나? 한반도와 한반도 사람들의 주체성을 깡그리 무시하고 자신들의 부도덕하고 야만적인 행위를 정당화하는 저런 뻔뻔스런 태도를 어찌 그냥 놔 둘 수 있나? 이웃 나라와 민족에 대한 멸시와 자기 과대망상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면, 어떻게든 단호한 대응으로 충격을 줄 수밖에 없다.” 사람 좋아 보이는 서중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의 목청이 이 대목에서 다소 격앙됐다. 서 교수를 만난 것은 지난 15일. ‘아시아평화와 역사교육연대’ 상임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그를 성균관대에서 만나기 이틀 전 도쿄 인근 도치기현 오타와라 시 교육위원회가 후소사판 새역모 교과서를 중학교 역사교과서로 채택하기로 결정했다. 이로써 교과서 채택률이 0.039%에 머물렀던 2001년 새역모 파동 때와는 확연히 다른 양상이 구체화됐고 한·중·일 3국에 긴장이 감돌기 시작했다. 서 교수가 더욱 목청을 높인 것은 다음 대목이었다. “정치·경제·언론 등 일본 각계의 우익들이 개헌을 통해 위대한 일본, 강력한 일본, 전쟁을 할 수 있는 일본을 만들기 위해 총력전을 벌이고 있다. 지금 우리는 그들이 그리로 가는 데 날개를 달아주느냐, 그것을 저지하느냐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이미 일본은 히노마루(일장기), 기미가요(국가)를 부활시켰지만 새역모 교과서야말로 그런 움직임의 종합판이라 할 수 있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보다 훨씬 더 심각한 문제다. 이대로 가면 일본은 아시아의 큰 재앙이 될 것이다.” 경고는 계속됐다. “새역모 교과서는 1990년대 이후 엄청나게 확대돼온 한·중·일 3국간의 인적·물적 교류까지 위협하게 될 것이다. 그 교과서로 교육받은 일본인들이 그런 교과서적 발상으로 이웃나라에 가서 입을 열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나? 동아시아 지역 전체의 공생에 치명적인 해악을 끼치게 될 것이다. 최대 10%설까지 나오고 있는 채택률이 새역모가 겨냥한 3%만 넘어도 동아시아에 중대한 갈등 국면이 전개되고 역사전쟁은 심화한다. 그래서는 미래가 없다. 그런데도 왜 언론들은 침묵을 지키고 있나? 안타깝다. 이 마지막 고비가 정작 중요하다. 채택이 끝나는 7월 중·하순과 8월 초순이 결정적인 시기다. 이 중요한 시기를 놓치면 안 된다. 일본 시민들에게 신호를 보내고 그들을 지원하고 동참해야 한다.” 아울러 그는 일본 역사교과서 문제에 대한 대응이 중국쪽의 ‘동북공정 문제’를 풀어가는 데도 바로미터 역할을 할 것이라면서 적극적인 대응을 거듭 강조했다. “왜곡 교과서는 ‘전쟁할 수 있는 일본’ 종합판”
채택률 3%만 넘어도 이래 없어 지금 중대기로
일본 광고 내 마지막 호소…여로분도 동참을
-한국 내 대응 분위기가 2001년에 비해 가라앉아 있다. =2001년엔 일본이든 한국이든 분위기가 대단했다. 이번에도 지난 3, 4월 후소사 역사교과서 검정본 내용이 알려지고 독도 문제가 불거졌을 때까지는 분위기가 고조돼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이런 분위기라면 제대로 대응할 수 있겠다고 낙관했다. 그런데 4월 하순부터 관심이 옅어졌다. 일본에선 아예 거의 보도조차 하지 않는다. 일본이 저래서 그런 것인지, 특히 우리 방송들마저 관심이 없는 것 같아 유감이다. 미래 역사를 좌우할 중요한 일이다. 3국이 공동으로 집필해서 책(<미래를 여는 역사>)을 내놓은 건 그만큼 사태가 심각하다는 얘기도 된다. 타민족 멸시 자기 과대망상엔 충격 줘야 -오타와라 시교위의 후소사 교과서 채택 결정의 파장이 상당하지 않을까. =2001년 때보다 세를 얻고 있는 것 같다. 이번에 새역모의 3% 채택 목표 달성 가능성이 없지 않아 보인다. 저지하려는 시민운동단체 쪽도 더 세련되고 조직적,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으나 일본 지식인이나 언론 등이 너무 냉담한 것 같다. 그런 문제제기를 하는 쪽이 왕따로 몰리는 분위기인 듯하다. -주도 세력의 정체는 대체로 드러나 있는데. =새역모 활동가들, 일본헌법 개정을 노리는 우익 국가주의·군국주의 세력들이다. 우파세력의 대변인 역할을 해온 나카야마 나리아키 문부과학상의 망언이나 신사참배에 집착하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행태를 봐도 알 수 있듯이 일본 정부 자체가 새역모 목적에 찬동하고 후원하고 있다. 자민당 등 정치세력이 강력히 지지하고, <요미우리> <산케이>등 언론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들이 만든 역사교과서나 <국민의 역사> 따위를 보면 그 주장의 핵심 가운데 하나는 한마디로 한반도 역사 무시이며, 그것을 위해 사실왜곡과 과장을 일삼고 있다. 저의가 뭔가? =19세기 중반, 메이지 시대부터 한국 멸시 풍조가 강했다. 정한론도 그 맥락이다. 식민사관, 즉 한 번도 한반도의 자주적 주체적 역사는 없었다, 따라서 자주적 근대화도 애초에 불가능했다는 것이고, 이를 위해 당파싸움의 부정적인 면을 강조하는 등 외국 지배가 불가피했다는 논리를 만들어 자신들의 과거사를 정당화하려 한다. 뿐만 아니라 침략사를 영광으로 돌리고, 일본의 역사와 힘을 왜곡·과장함으로써 현재의 개헌 및 군사력 강화, 팽창의지를 뒷받침하는 추동력을 얻으려 한다. 그들은 교과서에서 2001년에는 없던 ‘조공’이란 말을 3번이나 사용함으로써 조선을 속국시하면서 3·1운동과 간토(관동) 대지진 때의 학살도 제대로 다루지 않고 군대 위안부라는 말도 빼버렸다. -지금 새역모 교과서 채택 반대 일본언론 광고 게재를 위한 모금사업 진척은? =5700만원 정도 모았다. 경제단체나 각 기관들도 호응하고 있어 1차 목표(3억원)는 달성할 것 같다. 하지만 최종목표(10억원)까지 가능할지 걱정이다. 다음주 중에 <아사히>나 <요미우리> 한 곳에 먼저 광고를 싣고, 그 다음주에 또 한 곳에 실을 계획이다. 8월 초순이면 교과서 채택이 대체로 끝나므로, 시간이 없다. 이런 작업은 마지막 호소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적극 움직여주는 것이 일본 내 시민단체들에도 힘이 될 텐데. =대통령이 말한 ‘균형자’ 역할은 이런 일에도 적용될 수 있다. 매우 중요하다. 일본에선 반중국 감정이 아주 강하다. 또 <아사히신문>이나 와다 하루키 선생 등 양심세력마저도 발언을 신중히 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가 있다. 그들은 한국 정부 시민단체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주길 고대하고 있다. 2001년에 채택률이 그것밖에 안된 데는 한국 시민단체들 역할도 컸다. 한·중·일 공동교과서 판매율 한국 가장 저조
<미래를 여는 역사>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여 주기 바란다. 이 책 판매상황은 한국쪽이 제일 저조하다. 원래 일본에선 많이 나가야 3만부 정도라 예상했는데 이미 7만부를 넘어섰고 중국에선 10만부를 훨씬 넘겼다. 동아시아 근현대사가 얼마나 얽혀 있나? 일국의 관점에선 풀어갈 수 없다. 공동으로 풀어가야 한다. 원래 중국에선 한국 역사에 관심없고 잘 알지도 못했다. 구한말에 위안스카이가 조선에 와서 얼마나 못된 짓을 많이 했나. 그런데 중국 사람들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더라. 관록 있는 교수들조차 그랬다. 그런데 공동집필 과정에서 한국역사를 제대로 볼 기회를 갖게 됐고 진정한 친선과 연대의 싹도 움텄다. 굉장히 중요한 일이다. -한국은 여전히 분단으로 고통받고 있고, 중국 역시 급속히 발전하고 있다고는 하나 대만과의 양안문제에다 경제적 낙후 등으로 고통당하고 있다. 따지고 보면 이웃의 이런 불행에 일본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다. 일본은 패전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비교적 좋은 날을 구가해왔다. 특히 지금까지의 기득권 유지에만 집착하고 있는 듯한 일본 지배세력한테서 이웃의 불행에 공명하고 함께 해결해나갈 선의와 상상력을 기대하긴 어려울까. 중국 ‘동북공정’ 문제 풀어갈 바로미터 =외부와 단절된 채 오랜 세월을 살아온 탓인지 그들 중 일부는 이웃의 불행과 고통을 이해하고 동정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걸 당연하다고 여기거나 비하하고, 이웃이 잘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 듯한 태도를 취하기도 한다. 북한과의 일본인 납치문제, 중국과의 축구장 내 감정적 응원사태 등도, 북한 중국쪽에 물론 문제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건수만 생기면 그것을 극대화하고 이용하려는 듯한 양태를 보이며 문제를 더욱 꼬이게 만들었다. ‘독도 문제’도 그렇다. 4개 공민교과서가 독도를 일본땅이라 명기한 데는 문부과학성의 입김이 느껴진다. 우파들은 민족감정이 쏠리게 마련인 영토문제를 제기함으로써 내부단결을 꾀하는 데 그것을 이용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 태도로는 민족주의를 넘어선 동아시아 공생의 길을 찾긴 어렵다. -중국의 동북공정 문제도 일본 역사교과서 문제에 우리가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큰 영향을 주게 될 텐데. =그렇다. 동북공정은 미국·일본의 동아시아 포위정책과도 관련이 있는 문제다. 중국을 설득할 수 있는 가장 큰 힘은 우리의 적극적인 관심과 공정한 자세다. 일본 교과서 문제를 제대로 풀어가는 데는 한국의 역할이 중요하다. 그것이 동북공정 문제에도 하나의 바로미터로 작용할 수 있다. 우리가 공정하게 풀어갈 경우 중국이 한국의 역량을 무시할 수 없게 될 뿐 아니라 상호 신뢰가 조성돼 좀더 건설적으로 해결 방안을 찾아가게 되지 않겠나. 우리 국민이 좀더 적극적으로 이 문제를 생각하고 상응한 실천을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일본 교과서 문제는 동북공정 문제 해결에도 직결되는 중차대한 문제라는 인식과 행동이 필요하다. 사진 이정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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