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강신화 박태준 별세
시련과 좌절의 정치 20년
3당 합당 뒤 YS와 ‘알력’
문민정부 내내 해외방랑
‘DJT연합’ 정권교체 기여
2000년에 총리 맡았지만
재산 문제로 불명예퇴진
시련과 좌절의 정치 20년
3당 합당 뒤 YS와 ‘알력’
문민정부 내내 해외방랑
‘DJT연합’ 정권교체 기여
2000년에 총리 맡았지만
재산 문제로 불명예퇴진
박태준. 그는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철의 사나이’였지만, 정치인으로서는 영광보다는 좌절과 시련이 더 많았다. 자의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 정치의 길에 들어선 결과일지 모른다.
부산 기장 출신으로 육사(6기)를 졸업한 박태준은 1961년 5·16 군사쿠데타 직후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초대 비서실장으로 발탁되면서 정치와 첫 인연을 맺었다. 이후 포항제철 사장으로 재직하면서 포철을 키우는 데 전념하던 그가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은 12·12 쿠데타(1979년)로 집권한 신군부 세력의 강력한 요구 때문이었다. 전두환이 이끄는 신군부 세력은 5·18 광주학살 등 집권 과정의 불법성과 잔혹성을 분칠하기 위해 각계의 민간 엘리트를 ‘차출’했다. 포철을 국제적 기업으로 키운 박태준도 그 대상의 하나였다. 그는 생전에 1980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참여와 이듬해 민정당 전국구 의원 진출에 대해 “포철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여러차례 얘기했다. 실제로 그는 당시 ‘여의도’보다는 ‘포항’에 더 많이 머물렀다.
박태준을 정치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불러들인 것도 그의 뜻이 아닌 외부의 힘이었다. 노태우 당시 대통령이 이끌던 민정당은 여소야대 현상을 타파하기 위해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과의 3당 합당을 추진했다. 당시 박준규 대표는 합당설을 미리 언급했다가 역풍을 맞고 89년 12월 말에 낙마했다. 노태우 당시 대통령은 포철 업무로 해외 출장 중이던 박태준을 급거 호출해 집권당인 민정당 대표를 맡겼다.
90년 초 3당 합당 이후 그는 민자당 내 최대 계파인 민정계의 대리 관리자였다. 하지만 민정계는 그에게 정치적 수장이 될 것을 요구했으며, 그도 한때 대통령이 되겠다는 큰 꿈을 꾸기도 했다. 그러나 특유의 친화력과 조직력으로 당내 대세를 장악해 가는 민주계 김영삼에게 대적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모래알처럼 흩어지는 민정계를 보면서 그는 결국 92년 대선을 두달여 앞두고 포철 회장직 사퇴와 함께 민자당 탈당을 결행했다. 그로서는 스스로 내린 최초의 정치적 선택이자 권력에 대한 최대의 저항이었다.
하지만 정치적 반대자의 길을 간 대가는 혹독했다. 포철 명예회장직에서도 쫓겨났을 뿐 아니라 표적 사정의 대상이 돼 김영삼 집권 기간 거의 대부분을 해외에서 방랑생활을 해야 했다.
그러나 시대 흐름은 이번에는 그의 편이었다. 그는 김영삼 정권이 퇴조기에 접어든 1997년 7월 경북 포항북구 보궐선거를 통해 화려하게 재기에 성공했다. 이어 97년 대선 때는 ‘디제이티(DJ+JP+TJ) 연합’에 동참해 정권교체에 기여했다. 공동여당인 자민련 총재에 이어 2000년 1월 김대중 정부의 두번째 국무총리를 맡아 처음으로 ‘박태준 정치’를 실천할 기회를 잡았다. 그것은 정치 역학관계에 좌우되는 ‘정치 총리’보다는 국정 운영에 전념하는 ‘행정 총리’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서울 중구 을지로 소재 토지 29평과 건물 96평의 지분 일부 등 재산 일부를 명의신탁으로 관리해온 사실이 밝혀지면서 4개월 만인 2000년 5월 그는 총리직에서 중도하차했다. 자산관리 미숙 등에 따른 것이라고 했지만, 이는 청렴결백함이 최대 자산이었던 그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불명예 퇴장이었다.
박태준은 경제개발 시대를 온몸으로 개척해온 대표적 인물답게 보수적 입장을 견지했지만, 진보도 필요하다는 공존의 정신을 지니고 있었다. 1988년 5월 <한겨레> 창간 당시 포철이 공기업으로서는 처음으로 <한겨레> 창간 광고를 예약했던 것은 그의 그릇을 보여주는 한 예다.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