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원옥 할머니
‘1000번째 수요시위’ 길원옥 할머니의 눈물
당뇨약 삼키며 힘든 싸움
“처음 왔을때나 다를게 없어
답변이 하나도 없으니까…”
당뇨약 삼키며 힘든 싸움
“처음 왔을때나 다를게 없어
답변이 하나도 없으니까…”
14일 아침, 길원옥(83·사진) 할머니는 보라색 한복을 차려입었다. 검은 장갑 위에 빨간 털장갑을 하나 더 꼈다. 양말 위에는 버선을 신었다. 길 할머니는 온몸이 아프고 손발이 시리다고 했다. 당뇨 때문이다. 할머니는 집을 나서기 전 아침에 들렀던 병원에서 처방받은 약을 한 움큼 삼켰다. 이제야 외출 준비가 끝났다. 이날은 1992년 1월8일 처음 시작한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수요시위’가 1000번째로 열리는 날이다. 길 할머니와 함께 사는 김복동(85) 할머니도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에 있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 쉼터 ‘우리집’을 나섰다. 두 할머니는 트위터 사용자들의 기부로 마련한 ‘희망승합차’에 올라탔다.
길 할머니는 서울 종로구 중학동의 일본대사관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지난 13일 세상을 떠난 일본군 ‘위안부’ 김요지(87) 할머니의 발인 날짜를 착각했다. “옛날에는 한 번 듣고 두 번만 들으면 다 알았는데 지금은 백 번을 들어도 몰라.” 길 할머니는 요즘 치매가 올까 봐 무섭다고 했다. 하지만 옛날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고 말한다.
평양에 살던 길 할머니는 열두 살 때인 1940년 돈을 벌게 해주겠다는 일본군의 꾐에 속아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갔다. 5년 동안 중국 만주와 허베이성 스자좡 지역에서 일본군 ‘위안부’ 생활을 했다. 그리고 열일곱 살이 되던 해에 인천항으로 돌아왔다. 길 할머니는 늦깎이 수요시위 참여자다. 시위 소식을 텔레비전으로 접하면서도 주위에는 “세상 사람들이 다 알게 왜 저렇게 떠드느냐”며 짐짓 탐탁지 않은 듯 말을 했다. 하지만 길 할머니의 속마음은 달랐다. “위안부가 왜 죄인이야. 피해잔데. 죄인은 일본 정부고 한국 정부지 어째서 위안부가 죄인이냐.” 이런 생각에 수요시위가 시작된 지 6년이 지난 1998년부터 한두 번 얼굴을 내밀던 길 할머니는 결국 단골 참가자가 됐다. 한국에 돌아온 지 53년 만인 1998년에 위안부 신고를 했고, 2007년에는 유럽 4개국을 돌며 피해 사실을 증언했다. 길 할머니의 고통스러운 증언은 네덜란드와 유럽연합(EU) 의회의 ‘일본 정부 사죄 촉구 결의안’으로 결실을 맺었다.
길 할머니는 이날 1000회 수요시위에 김복동·강일출·박옥선·김순옥 할머니와 함께 참여했다. 전국여성연대·한국 천주교 여자수도회 장상연합회 등 여성·사회·종교 단체와 시민 2000여명도 힘을 보탰다. 일본대사관 앞에는 ‘평화비’가 세워졌다. ‘위안부’ 소녀가 의자에 앉아 있는 모양을 본뜬 평화비는 일본대사관이 잘 보이는 곳에 터를 잡았다. 길 할머니는 잠시 평화비 옆에 앉았다. 그리고 어깨를 쓰다듬었다. 김복동 할머니는 ‘생존자 발언’에 나섰다. 김 할머니는 “이명박 대통령이 백발의 늙은이들이 아우성치는 걸 모르지는 않을 것”이라며 “사죄할 것은 사죄하라고 일본 정부에 엄중하게 이야기해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무대 위에서는 한명숙 민주당 상임고문, 정몽준 한나라당 의원, 이정희 통합진보당 대표의 발언이 이어졌다. 서울 중구 충무아트홀에서 <버자이너 모놀로그>를 공연하고 있는 김여진씨 등 세 배우도 무대에 올랐다. 배우들은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를 위해 쓴 연극 속 대사를 읽었다. “우리의 이야기가 사라지기 전에 우리가 죽기 전에 일본 정부여 말하라. 제발 미안하다고 말하라.” 배우들의 외침에 길 할머니는 눈물을 흘렸다. 길 할머니의 머리에는 커다란 상처가 있다. 옷을 벗기려고 달려들던 일본군이 저항하던 길 할머니의 머리를 칼집으로 내려쳐 생긴 흉터다. 할머니는 그때를 기억하며 “(일본군이) 만일 칼을 빼서 내려쳤으면 얼마나 편안했겠어”라고 말했다. 하지만 길 할머니는 다시 “일본이 사죄하는 걸 보려고 내가 지금까지 산 모양”이라고 했다. 1000번째 수요시위는 참가자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일본대사관을 향해 7개의 요구사항을 외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전쟁범죄 인정, 진상 규명, 공식 사죄, 법적 배상, 책임자 처벌, 일본 역사 교과서 기록, 추모비와 사료관 건립.” 일본대사관에는 수요시위 장면을 내려다볼 수 있는 정사각형 모양의 창문이 18개가 있다. 모든 창문에는 흰색 블라인드가 쳐져 있었다. 출입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거리를 내려다보는 것은 일본대사관 2층 난간에 걸친 폐쇄회로텔레비전(CCTV) 한 대뿐이었다. “내가 처음 수요시위에 참가했을 때나 1000번째나 하나도 다르지 않아. 저기서 답변이 있어야 하는데 답변이 하나도 없으니까.” 메아리 없는 외침에 길 할머니의 한숨소리도 깊어졌지만, 일본 정부가 과거를 반성하고 진심 어린 사과를 할 때까지 할머니들의 외침은 계속될 것이다. 21일에는 1001번째 수요시위가 열린다. 정환봉 기자 bonge@hani.co.kr
1992년 1월8일 미야자와 기이치 당시 일본 총리의 방한을 앞두고 30여명으로 처음 시작한 수요시위(위 사진)가 14일 오후 1000회를 맞아 2000여명의 시민들이 서울 중학동 주한 일본대사관 앞을 가득 메운 채 열리고 있다(아래 사진). <한겨레> 자료사진, 공동취재사진
무대 위에서는 한명숙 민주당 상임고문, 정몽준 한나라당 의원, 이정희 통합진보당 대표의 발언이 이어졌다. 서울 중구 충무아트홀에서 <버자이너 모놀로그>를 공연하고 있는 김여진씨 등 세 배우도 무대에 올랐다. 배우들은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를 위해 쓴 연극 속 대사를 읽었다. “우리의 이야기가 사라지기 전에 우리가 죽기 전에 일본 정부여 말하라. 제발 미안하다고 말하라.” 배우들의 외침에 길 할머니는 눈물을 흘렸다. 길 할머니의 머리에는 커다란 상처가 있다. 옷을 벗기려고 달려들던 일본군이 저항하던 길 할머니의 머리를 칼집으로 내려쳐 생긴 흉터다. 할머니는 그때를 기억하며 “(일본군이) 만일 칼을 빼서 내려쳤으면 얼마나 편안했겠어”라고 말했다. 하지만 길 할머니는 다시 “일본이 사죄하는 걸 보려고 내가 지금까지 산 모양”이라고 했다. 1000번째 수요시위는 참가자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일본대사관을 향해 7개의 요구사항을 외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전쟁범죄 인정, 진상 규명, 공식 사죄, 법적 배상, 책임자 처벌, 일본 역사 교과서 기록, 추모비와 사료관 건립.” 일본대사관에는 수요시위 장면을 내려다볼 수 있는 정사각형 모양의 창문이 18개가 있다. 모든 창문에는 흰색 블라인드가 쳐져 있었다. 출입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거리를 내려다보는 것은 일본대사관 2층 난간에 걸친 폐쇄회로텔레비전(CCTV) 한 대뿐이었다. “내가 처음 수요시위에 참가했을 때나 1000번째나 하나도 다르지 않아. 저기서 답변이 있어야 하는데 답변이 하나도 없으니까.” 메아리 없는 외침에 길 할머니의 한숨소리도 깊어졌지만, 일본 정부가 과거를 반성하고 진심 어린 사과를 할 때까지 할머니들의 외침은 계속될 것이다. 21일에는 1001번째 수요시위가 열린다. 정환봉 기자 bon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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