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어(Dear) 청춘’에 출연한 프로레슬러 김남훈씨가 하니티브이 스튜디오에서 강연을 하고 있다.
[디어 청춘 7회] ‘낭만 레슬러’ 김남훈
‘원시 농경사회 스펙’이 전하는 청춘 그리고 사랑

‘원시 농경사회 스펙’이 전하는 청춘 그리고 사랑
김남훈. 그분이 오셨다! 그의 이름 앞에 수식어가 화려하다. 자칭 ‘한국이 자랑하는 꽃미남 프로 레슬러’. 그는 링 위에서 여느 프로 레슬러와 다름없는 악당이다. 한해 300번 넘게 링 바닥에 쓰러진다. 치열한 싸움을 끝내고 링을 내려오면 곧바로 전국의 ‘특수 지역’으로 향한다. 그가 말하는 특수 지역은 “고등학교, 전방 군부대, 교도소”다. 청춘들이 아파하는 곳, 위로가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 달려간다. 그가 스스로 ‘낭만 레슬러’가 된 것은, “진심으로 청춘을 응원하기 위해”서다.
“지리산에 야생 반달곰의 숫자가 30마리 정도 된다고 하는데, 한국에 있는 현존 프로 레슬러가 30명 정도 됩니다. 확률로 따지자면 여러분은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야생 반달곰에게 강연을 듣고 계신 거죠.”(웃음)
그는 막 특수 지역 순회강연을 마치고, ‘디어 청춘’ 공개 녹화장인 한겨레 스튜디오로 달려오는 길이었다. 지금부터 김남훈의 가슴 떨리는 고백을 들어보자.(이하 김남훈의 강연을 1인칭으로 정리했다.)
“패기와 야심 찬 청춘은 옥상으로 끌려가기 마련”
청춘들에게 선배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은 “꿈과 패기가 없다. 자신만만하지 못하다”라는 이야기다. 그런 질문을 할 때, 진정성이 있느냐 하는 것에 의문이 있다.
선배들은 청춘들이 자신감 있고, 패기 넘치기를 바라지 않는다. 실제로 사회생활에서 패기 있고, 야심이 있는 친구들은 화장실이나 건물 옥상으로 끌려간다.(웃음) 거기서 혼나고, 개인의 개성을 박탈하는 것이 선·후배 사회의 논리다. 좀 비겁하다. 진심으로 원하지도 않으면서 “20대에게 꿈을 가져라. 왜 패기가 없느냐”라고 말한다.
현재 청춘이 견디기 어려운 가혹한 상황을 만든 건, 선배들이다. 만약, 지금의 20대가 패기 없고, 꿈이 없다면 그건 지금의 20대가 살아남을 수 있는 최선의 해결책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인 거다. 어떻게 보면 20대의 윗세대가 거꾸로 얼차려를 받아야 한다. 이런 상황을 만든 사람들은 아무런 책임감이 있지 않다. 그러면서 20대에게 ‘너희는 왜 이렇게 꿈이 없고, 야망이 없나’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모순이다. 그럼, 지금 20대의 삶의 모습이 가장 최적의 모습인가? 이것에 대해 또 의문이 든다.
“스펙 권하는 기득권, 스펙을 추종하는 청춘”
‘스펙(spec)’이란 단어는 (자세한) 설명서, 사양(仕樣)이란 뜻이다. 이 단어는 영미권에서 기계에 적용하는 말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사람한테 쓰이게 되었다. 왜 기계한테 쓰는 말을 사람에게 쓰게 되었을까? 스펙이란 단어를 가장 애용하는 집단은 바로 기득권이다. 거대한 자본을 만드는 회사가 자신들의 편의에 맞춰서 사용하는 말이다. 이들이 스펙을 정하고, 20대는 그 기준을 충족시키려고 눈물나게 노력한다. 기업의 입장에서는 최대 이윤을 만들어낼 사람을 가장 좋은 인재라고 생각한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 ‘인재’다. 이 말은 사람을 재료로 취급하는 말이다. 삶을 스펙에 맞춰 살아가면 결국 거대한 자본을 위해 하나의 잉여이익을 생산하기 위한 인재로 전락하는 상황에 처한다.
“스펙은 대중과 자신을 구별하기 위한 하나의 조건일 뿐”
그럼, 김남훈의 스펙은 어떨까? 일단, 현대 사회에 적합하지 않은 스펙을 가졌다. 원시 농경사회였더라면 왕이었을 것이다.(웃음) 집안에서 동물성 단백질을 섭취하는 유일한 방법은 수컷이 밖에 나가서 사냥하는 수밖에 없다. 나는 그런 세대에 최적화된 사람이다. 지금처럼 고도로 분업화된 사회에 어울리지 않는 스펙을 갖고 있다.
또 하나 이 시대와 어울리지 않는 것은 외모적인 스펙이다. 배우 송중기씨와 나는 똑같은 인간 생명체다. 두 발로 걷고, 입으로 이야기하는데, 사람들의 눈은 왜 송중기씨를 향하는 걸까? 이 대목에서 여러분은 웃음을 참지 않아도 된다.(좌중 폭소)
이처럼 스펙은 대중과 나를 구별하기 위한 하나의 조건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는 기계가 아닌 사람에게 쓰이고 있고, 그 스펙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게 문제다.
“과정과 감동이 없는 교육”
스펙을 쌓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찾기 위해서 살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왜냐면 한국의 교육은 오직 상급 학교 진학에 유리한 것만 가르치기 때문이다.
지난해,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소개된 ‘남자의 자격 합창단’을 봤나? 그걸 보고 우리는 왜 눈물을 흘리고, 손뼉을 쳤을까? 그런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다. 엄격하지만 자애로운 선생님에게 지도를 받고, 친구들과 공통의 과제를 해결하는 과정과 감동을 느껴보지 못했다. 공교육을 통해 그런 것을 배워야 한다. 하지만, 학교에 가면 친구들을 경쟁상대로 생각하고 등수를 매기는 줄서기 교육만 받아왔다. 교양이 없는 소외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스스로 좋아하는 것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너 어제 술 먹고 일본어로 이야기하더라”
좋아하는 것을 찾았다면 작은 것부터 시작하자. 2003년부터 2007년까지 격투기 프로그램의 해설자를 모집하는 공고를 보고 서류를 냈다. 대한민국에 있는 모든 방송국에 다 냈다. 그런데 단 한 번도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때 스스로 나를 알리자고 생각했다. 개인 블로그에 칼럼을 쓰고, 격투기와 관련된 동영상을 제작해 인터넷에 올렸다. 여러 격투기 기술을 소개하는 영상을 제작했는데, 문화관광부에서 상도 받았다. 그런 활동이 알려져 방송국에서 먼저 연락이 왔다. 오디션을 보고, 격투기 해설자로 활동할 수 있었다.
오토바이 잡지를 읽기 위해서 일본어 공부를 시작했다. 문법, 회화, 한자 공부를 차근차근했다. 어느 날, 부모님이 “너 어제 술 먹고 일본어로 이야기하더라”는 얘길 했다. (웃음) 좋아하는 것을 위해 시간을 투자하고, 공부하는 즐거움을 25살에 처음 느꼈다. 이렇게 작은 성취들을 통해 다시 도전할 수 있었다.
6개월 하반신 마비를 극복하게 해준 아버지와 햄버거
2004년, 링 위에서 사고를 당했다. 반년 동안 하반신 마비가 된 적이 있다. 절망에 빠져서 체중도 지금보다 늘었고, 건강 상태도 최악이었다. 그때 다시 일어서야겠다고 생각했던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어느 날, 아버지가 올라오셨다. 같은 방에서 잠을 자는데, 아버지가 내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오랜만에 아버지 손을 잡았는데, 내 손 안에 감촉이 너무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내가 누워서 아버지 손을 잡는 것도 좋지만, 다시 일어나서 안아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다른 한 가지 이유는 ‘햄버거’가 정말 먹고 싶었다.(좌중 폭소) 누가 사다준 햄버거가 아니라, 내 두 발로 매장에 걸어 들어가서 사먹고 싶었다. 그런 이유 때문에 걷는 연습을 시작했다. 그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 ‘천천히 성취하자(small victory)’는 마음이었다.
오랜 시간 걷는 연습을 했고, 어슬렁어슬렁 걸을 수 있게 되었다. 햄버거를 먹기 위해 첫차를 탔다. 매장 앞에 도착해서 가게 문이 열리기까지 2시간을 기다렸다. 점원이 공포에 젖어 있었다.(웃음) 햄버거를 주문하고, 쟁반을 들 힘이 없어서 점원에서 부탁했더니 점원이 또 놀란다.(좌중 폭소) 햄버거 빵과 양상추를 씹어 넘기는데 눈물이 났다. 점원은 실신할 것 같은 표정이었다.(웃음)
햄버거를 먹으면서 대성통곡했고, 그 길로 고속버스를 타고 집으로 내려가서 아버지를 안아 드렸다. 그리고 다시 링 위를 뛰어다니게 되었다. 진심으로 원하는 것이 있다면 욕심을 버리고, 작은 것부터 실천해갔으면 좋겠다.
뛰어내릴 것인가? 떨어질 것인가?
꿈을 향해 간다는 건, 용기와 결단력이 필요하다. 소설가 고 이윤기씨가 생전에 “학교란 컨베이어 벨트에서 뛰어내린 걸 자신이 한일 중 가장 잘한 일이라고 자부한다”라고 했다. 컨베이어 벨트는 자동생산과 대량화를 의미한다. 똑같은 제품이 생산된다는 이야기다. 고 이윤기씨는 똑같이 찍어내는 공장과 같은 삶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길을 찾아갔다. 이 컨베이어 벨트에서 뛰어내리는 것과 떨어지는 것은 전혀 다르다. ‘뛰어내리는 것’은 자신의 삶에 대한 목표와 용기, 결단력을 가진 상태에서 뛰어내리는 것이다. ‘떨어지는 것’은 인생을 열정적으로 낭비하는 것이다. 흔히, 인생을 열정적으로 낭비하는 것과 꿈을 좇아가는 것을 혼동하기 쉽다. 이것은 자신에게 처절하게 물어야 하는 질문이다. 나는 뛰어내린 것인가. 떨어진 것인가? 다시 올라갈 수 있는가?
“미래는 너무 눈부시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
꿈을 향해 살아간다는 건, 험한 바다와 같다. 육지는 부모님과 선생님, 선배가 만든 길을 따라가는 것이다. 꿈을 향해 살아가는 것은 불확실성의 바다에 몸을 던지는 것이다. 정말 원하는 것이 있다면 차가운 바다에 몸을 던질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또 하나는 타인의 삶에 공감해야 한다. 홍대 앞 두리반이나, 영화 도가니만 보더라도 많은 사람이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고 같이 싸웠다. 당대 최고의 스펙을 쌓고, 엄청난 부와 명예를 가졌던 이완용은 결국은 최악의 선택으로 역사의 오명을 남겼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이 우리의 미래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 것은 너무 밝고, 눈부셔서 보이지 않는 것이다. 미래는 없기 때문에 안 보이는 것이 아니라, 너무 눈부시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이란 말씀을 꼭 드리고 싶었다. 영상·글 박수진 피디 jjin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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