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1월10일 강원도 인제군 신월리 ‘달 뜨는 마을 보금자리’에 동물단체가 구조한 소 5마리가 입주했다. 동물해방물결 제공
“소들아 행복하게 살렴. 미안해. 이제 외면하지 않을게.”
2022년 11월10일 강원도 인제군 신월리 ‘달 뜨는 마을 보금자리’ 울타리엔 소들을 맞이하는 환영 인사글이 나란히 나붙었다. “새살(3살) 축하해”. 앞으로 소를 돌볼 ‘살림이 가족’의 5살 구성원 ‘가이아’가 쓴 환영 팻말도 한쪽에 세워졌다. ‘가이아’는 소들을 돌보기 위해 이곳에 이주한 김지영, 추현욱씨 부부의 아이 이름이다.
2022년 11월10일 강원도 인제군 신월리 ‘달 뜨는 마을 보금자리’에 동물단체가 구조한 소 5마리가 입주했다. 동물해방물결 제공
머위, 메밀, 부들, 엉이… 들풀처럼 살아남아라
오전 9시 홀스타인 남성(동물단체에서는 ‘수컷’ 대신 ‘남성’이란 표현을 쓴다) 소 5마리를 실은 운송트럭이 50~70대 마을 주민 80여 명이 모여 사는 작은 마을 신월리로 들어섰다. 3살을 넘기며 부쩍 커진 소들의 머리는 거의 트럭 천장에 닿을 지경이었다. 국내 축산업에서 비육우(살이 찌도록 기르는 소)는 태어난 지 18~24개월에 도축된다. 3살을 넘겨 살아 있는 소는 동물해방물결이 구조한 ‘꽃풀소’들이 거의 유일하다. “이제 소들 몸무게가 1톤(t)이 넘었어요. 미국 생크추어리의 19살 소는 지금 2.5t이래요.” 동물해방물결 이지연 대표가 웃으며 말했지만 내심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일주일 전 이곳으로 이동하기에 앞서 검사를 위해 채혈하다 넘어진 ‘미나리’가 결국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2021년 인천의 한 농장에서 도살 직전 구조된 소들에게는 강하게 살아남는 들풀처럼 살라는 의미로 머위, 메밀, 부들, 엉이, 창포, 미나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소들은 축사 철거를 앞두고 도축될 운명이었으나, 근처 불법 개농장을 찾았던 동물권 활동가들이 사정을 알리며 ‘소 구하기’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시민 1700여 명이 소들의 새 삶을 위해 후원했고, 2021년 8월 소들은 죽음에서 벗어나 강원도 인제의 임시보호처로 왔다. 이 구조 작업에는 ‘꽃풀소 프로젝트’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날 소들은 임시보호처에서 1년3개월 ‘하숙생 생활’을 마치고 평생을 늙어갈 300여 평 면적(내실 120㎡, 방사장 800㎡)의 보금자리(생크추어리)로 첫발을 내디뎠다. 동물해방물결은 소들의 보금자리, 비건 청년마을 조성을 위해 ‘신월리 달 뜨는 마을’ 공동체와 30년간의 업무협약을 맺고 사업을 진행 중이다. 이들은 2019년 폐교한 부평초등학교 신월분교장을 중심으로 동물 보금자리, 책방 인제 풀무질, 비건 청년 마을, 비건 축제 등으로 구성되는 ‘인제 해방촌’을 조성할 계획이다.
2022년 11월10일 강원도 인제군 신월리 ‘달 뜨는 마을 보금자리’에 동물단체가 구조한 소 5마리가 입주했다. 동물해방물결 제공
많은 사람의 관심 속에 드디어 운송트럭에 실려 있던 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동물 운송트럭의 발판에서 가장 먼저 나온 소는 창포였다. 창포는 트럭에서 내리자마자 방을 확인하는 것처럼 내실로 마련된 하우스로 다가갔다.
톱밥과 왕겨가 포근히 깔린 내실이 마음에 들었는지 창포가 그 앞에 서자 뒤따라 나온 ‘고집쟁이’ 부들도 내실을 기웃거렸다. 부들은 전날 수송열(비육장·가축시장으로 수송해 집단화한 소들 사이에 생기는 바이러스성 질환) 예방접종을 하지 않겠다고 40분간이나 버텨 활동가들을 애먹였던 것과 달리, 순순히 보금자리에 내려 새 환경에 호기심을 보였다. 엉이는 여러 사람에게 둘러싸여 어리둥절한지 한동안 사람들을 응시하며 울타리 가까이 다가왔다.
“머위 좀 보세요. 좋은가봐요!” 한 활동가가 말했다. 대장소인 머위는 트럭에서 내리자마자 껑충껑충 달려 넓은 방사장으로 향했다. 머위가 달리자 부들과 메밀도 덩달아 공간을 탐색했다. 특히 메밀은 다른 소들이 미리 마련해둔 짚 위 바나나와 귤 등 간식을 먹을 때도 한동안 내실에 혼자 머물렀다. “메밀이는 군대 제대한 느낌인데? 맨날 다른 소들한테 밀렸으니 혼자 있고 싶나봐.” 홍성환 동물해방물결 활동가의 그럴싸한 농담에 다른 활동가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현장엔 신월리 이장 손영식씨가 나와 훈수를 들었다. “그렇게 밖에서 먹이를 주면 안 돼. 내실에서 먹이는 버릇을 들여야지. 사람도 오늘은 조심조심 걸으라고. 소들도 따라 겅중겅중 뛴단 말이야.” 건축업을 하는 손영식 이장은 과거 오랫동안 소를 키운 경험을 살려 9~10월 현장가들과 직접 내실을 짓는 등 보금자리 마련에 실질적인 도움을 보탰다.
소들이 입주한 소감을 물었더니 손 이장은 “힘들었지. 어차피 내 손이 다 가야 해”라고 엄살을 피웠다. 그는 앞으론 다 같이 만들어갈 거라고 말했다. 현재 신월리에는 소들을 돌보기 위해 김지영·추현욱 부부 활동가가 이주한 상태다. 이곳으로 주소를 옮긴 활동가도 4명이다. 마을 주민들은 처음엔 소를 반려동물로 키운다고 하니 집 안에서 키우는 것이냐고 되물었지만, 죽을 때까지 돌보는 거라고 설명하니 오히려 반대하는 목소리가 없었다고 한다.
신월리에는 소들을 돌보기 위해 김지영·추현욱 부부 활동가가 자녀를 데리고 이주했다. 한겨레 김지숙 기자
꽃풀소 프로젝트에 참여해온 전범선 작가는 소를 돌보는 문화가 우리 세대가 잃어버린 감각이라고 했다. “공장식 축산으로 소고기, 우유를 마음껏 먹은 건 불과 50년도 되지 않는 일입니다. 그 전까지 우린 소를 가족으로 대했죠. 같이 일하고, 같이 먹고, 같이 늙어갔어요. 꽃풀소 5마리의 얼굴은 그 끊어진 감각을 이어주는 선이 될 겁니다.” 기후위기 시대 가장 먼저 재고해야 할 것이 소 축산업이란 설명도 덧붙였다.
공장식 축산을 벗어난 소들은 앞으로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 보금자리에 내린 지 한 시간 남짓, 소들은 그새 본능에 따라 칡뿌리를 찾아 씹고 자연스레 배변 장소를 가리고 있었다.
인제=김지숙 <한겨레> 콘텐츠기획부 기자 suoop@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