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 판사
시각장애 최영 판사 재판 공개
노트북에 이어폰 ‘기록과 씨름’
별도 사무실·사무보조원 지원
“내부서도 소수자 인식 달라져”
노트북에 이어폰 ‘기록과 씨름’
별도 사무실·사무보조원 지원
“내부서도 소수자 인식 달라져”
301호 법정으로 가는 복도에는 시각 장애인을 위한 노란 점자 블록이 깔려 있다. 점자 블록은 9층 민사11부 사무실, 6층 도서관, 3층 법정, 지하식당 등으로 이어진다. 지난 2월27일부터 서울북부지법으로 출근하고 있는 최영(32·사법연수원 41기) 판사는 이 점자 블록의 도움으로 법원 청사를 오간다.
11일 오전 10시 최영 판사는 민사11부 재판에 참석했다. 북부지법은 최 판사가 재판에 참석하는 모습을 이날 처음 언론에 공개했다. 다른 판사들이 판결 서류를 살펴보는 동안, 최 판사는 노트북에 연결된 이어폰을 한쪽 귀에 꽂고, 서류를 음성으로 전환한 파일을 들었다. 변호인들의 주장을 듣다가 중요한 내용은 노트북에 타이핑하며 메모했다.
시각장애인으로는 처음으로 최 판사가 법관에 임용된 뒤 법원에는 작은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다.
9층 ‘제11민사부실’ 옆방에는 지원실이 새로 생겼다. 활자를 음성으로 변환하는 프로그램이 깔린 컴퓨터, 소송 자료를 빠르게 읽어주는 장비가 있다. 합의재판부 배석판사는 보통 2명이 함께 사무실을 쓰지만, 법원은 최 판사를 위해 따로 사무실을 마련했다. 지난 3월부터 최선희(30) 실무관이 최 판사를 돕고 있다. 한국 법원에서 ‘최초로 생긴’ 직업이다.
두 사람이 한 사건의 자료을 읽는데 2~3시간 걸린다. “법학 용어가 어려워 내가 설명하다 막히는 부분이 있으면, 판사님이 침착하게 알려준다. 항상 성실하게 노력하셔서 배울 점이 많고, 개인적으로도 이런 의미있는 일을 할 수 있어 보람을 느낀다”고 최 실무관은 말했다.
최 판사는 고3 때인 1998년 망막색소변성증 진단을 받았다. 서울대 법대에 진학했지만 2005년부터 책을 읽을 수 없을 정도로 병이 깊어졌다. 시각장애 1급 판정을 받은 그의 시력은 방에 불이 들어왔는지 정도만 구별할 수 있다. 법률서적을 음성 파일로 변환해 들으며 공부했고, 다섯번 도전 끝에 2008년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법원 안팎에서는 최 판사의 발령 소식을 듣고 기대와 함께 걱정도 있었다고 한다. 앞을 볼 수 없는 판사가 ‘기록과 싸워야 하는’ 업무를 잘 해낼 수 있을에 대한 걱정이었다. 이날 한시간여만에 재판이 끝난 뒤 최 판사는 “시각장애인 판사라서 부담스럽기보다는, 판사라서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고 기자들에게 말했다. “시각장애인 판사를 지원하기 위한 업무 시스템이 마련되는 등 법원이 변화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나도 변화하고 있다. 국민이 주신 사법권 행사를 책임감있게 행사하겠다”는 말도 했다.
북부지법의 한 관계자는 “비장애인 판사와 똑같이 일하는 모습을 보고 법원 내부에서도 소수자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는 분위기”라며 “판사들도 법원을 찾는 사건 당사자들의 처지를 좀 더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갖게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최 판사를 위해 깔아 놓은 301호 법정 앞의 점자블록은 앞으로 이 법정을 찾은 시각장애인들도 이용할 것이다.
이경미 기자 kmlee@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