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사회 사회일반

<비상사태>는 예외가 아니라 상례다

등록 2012-05-18 21:38

정희진 여성학 강사
정희진 여성학 강사
[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역사철학테제’,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발터 벤야민 지음, 반성완 옮김, 민음사, 1983

왜 우리 사회에는 행정부, 정당, 시민사회 할 것 없이 비상대책위원회가 많을까. 요즘 통합진보당 관련 뉴스를 보며 나는 이 점이 궁금할 뿐이다. 이 정당은 ‘비상’만으로는 부족했는지 이름 자체가 ‘혁신비상대책위원회’다. ‘당원 비대위’까지 생겨서 비대위가 2개다. 내 생각에는 2개의 비대위 상황이 진짜 비상사태 같은데, 비상의 의미에 충실하려면 이에 대처하기 위한 제3의 비대위가 또 있어야 할 것 같다.

참여정부 당시 한나라당은 정부가 위원회를 남발한다며 방계 조직을 키운다느니, 코드 인사니 맹공을 퍼부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의 위원회들도 만만치 않다. 전 정부의 ‘국방발전’이든, 현 정부의 ‘동반성장’이든 흔히 그 자체로 국정 목표로 간주되는 가치가 위원회 대상이다. 전통적으로 통치자의 입장에서 비상사태는 국민의 반란을 의미한다. 지배자는 자신의 위기를 ‘계엄 비대위’로 대처한다.

비상은 정상을 전제한다. 그러므로 비상에 대처하는 이들의 행동이 비상(식)이냐 정상이냐를 따지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무엇이 정상인가에 대한 판단이다. 그러나 이는 애초에 불가능한 일. 자유무역협정(FTA) 반대가 국익을 해친다고 비난하는 세력도 있고 국익을 위해 재협상을 주장하는 집단도 있는 것처럼, 어느 조직에나 있는 그 모든 ‘당권파’와 ‘비당권파’의 정상 인식이 같을 리 없다.

그래서 절차는 절대로 ‘진리’를 이길 수 없는 법이다. 비상, 혼란, ‘멘붕’을 정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비상은 정치의 필연이며 비대위는 상시 조직일 수밖에 없다. 비상과 정상은 인식자의 입장이 다를 뿐, 같은 말이다. 문제는 비상/정상 개념이 아니라 누가 누구를 위협하는 비상사태인가이다.

발터 벤야민은 1940년 그가 자살하던 해 ‘역사철학테제’ 여덟번째 장에 이렇게 썼다. “억눌린 자들의 전통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교훈은 <비상사태>가 예외가 아니라 상례라는 점이다… 진정한 비상사태를 도래시키는 것이 우리의 임무다… 파시즘이 승산이 있는 이유는, 그 반대자들이 진보를 역사적 규범으로 삼아 이를 들고 파시즘에 맞서고 있다는 사실이다.”(1994년 1판 4쇄, 347쪽)

여성주의는 ‘전쟁과 평화’가 국가 주권 단위를 기준으로 한 것이며, 사회적 약자의 일상과 무관한 구별이라고 비판해왔다. 폭력피해 여성, 위험한 환경의 성산업 종사 여성, 인신매매를 당한 여성, 난민 여성은 사는 게 전쟁이다. 벤야민의 테제가 바로 이것이다. 고통받는 사람에겐 인생의 시시각각이 비상이고, 민중의 고통으로 품위를 유지하는 지배자의 입장에서는 민중의 각성이 비상이다. ‘벤야민과 우리’는 진정한 비상사태, 즉 억눌린 자를 위한 봉기를 일으켜야 하는데, 지배자와 역사관을 공유한 진보 진영이 이를 가로막고 있다.

‘역사철학테제’는 당시 독일 사회의 통속적 마르크스주의자를 향한 비판이었다. 이 짧은 글은 지금도 대부분의 지구인들이 공유하는 근대적 역사관을 폭파하는 혁명시다. 역사, 시간, 노동, 예술, 신에 대한 기존의 인식과 완전히 단절한 혁명. 신학적·미학적 비유와 열정적인 문체의 시. 그가 그토록 비판한 역사주의는 인과관계에 기초한 역사의 연속성, 기원을 전제한 단선적 진화발전주의, 도달해야 할 바람직한 미래가 있다는 신념을 말한다. 바로 우리 모습이 아닌가? 그는 진리는 불꽃처럼 순간적이며, 역사는 원래부터 파편적이고 또 과거의 승리자와 동일시해서 기록한 것이므로 ‘잘못된 것’이라고 보았다.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며 진보는 ‘그날’을 위한 것이 아니다!

한국의 보수, ‘자주파’, ‘민중파’ 같은 정치 세력들은 사회의 인간화보다는 강한(좋은) 국가에 관심이 많다. 이들은 공동체의 민주주의와 인권이 아니라 그들이 상상하고 욕망하는, 서구가 먼저 도달한, 정상 국가 건설 방법을 놓고 싸운다. 벤야민은 탈식민을 외치고 있다. 나도 생각했지만, 지제크가 말했다. 인류 역사상 정상 국가가 실현된 시기와 지역은 단 한 번도 없다고. 정상 국가, 규범적 진보 개념은 존재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잘못된 것이므로, 우리가 알고 있는 비상대책위원회도 필요 없다고.

정희진 여성학 강사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사회 많이 보는 기사

전광훈 ‘지갑’ 6개 벌리고 극우집회…“연금 100만원 줍니다” 1.

전광훈 ‘지갑’ 6개 벌리고 극우집회…“연금 100만원 줍니다”

하늘이 영정 쓰다듬으며 “보고 싶어”…아빠는 부탁이 있습니다 2.

하늘이 영정 쓰다듬으며 “보고 싶어”…아빠는 부탁이 있습니다

‘윤석열 복귀’에 100만원 건 석동현…“이기든 지든 내겠다” 3.

‘윤석열 복귀’에 100만원 건 석동현…“이기든 지든 내겠다”

검찰, 김정숙 여사 ‘외유성 출장’ 허위 유포 배현진 불기소 4.

검찰, 김정숙 여사 ‘외유성 출장’ 허위 유포 배현진 불기소

‘장원영’이 꿈이던 하늘양 빈소에 아이브 근조화환 5.

‘장원영’이 꿈이던 하늘양 빈소에 아이브 근조화환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