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순 미국 올드도미니언대 교수
[토요판] 엄마의 콤플렉스
초등학교 3학년인 딸아이의 꿈은 선생님이 되는 것이다. 하루는 학교에서 자기의 꿈이 뭔지 적고 그 꿈을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써오라는 작문 숙제를 내줬다. 딸애가 쓴 글의 내용은 이랬다. “나는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습니다. 좋은 선생님이 되려면 난 행복한 사람이 돼야 합니다. 왜냐하면 선생님이 행복해야 애들한테 화도 덜 내고 많이 웃어주고 편안하게 대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도둑이 제 발 저리듯 나는 가슴이 뜨끔했다. “그래, 엄마는 행복한 선생님 같으냐?” 눈치 빠른 아이는 대답을 망설였지만 그걸로 벌써 내겐 대답이 됐다. 해야 할 일들에 쫓겨 늘 허덕거리고, 곁에서 맴도는 아이에게 잔뜩 찌푸린 얼굴로 응대하곤 했는데 애한테 반면교사가 됐던 게 분명하다.
세상을 바꿔보겠다고 청운의 푸른 꿈을 키우던 20대 때 우리가 쓰던 관용구는 “우리 자식 세대에게는 이런 세상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현재의 고난은 미래의 영광을 위해 감내해야 할 몫이었다. 자신의 현재를 기꺼이 헌납한 많은 이들 덕분에 세상이 조금은 변했는지 모르지만 우리가 진짜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었던 게 무엇인지 모호해졌다. 그때는 몰랐다. 대의를 위해 포기하자고 했던 소소한 것들이 사실은 소소한 것들이 아니었음을. 대의의 명분 아래 사사로운 정을 버려야 한다는 생각에 다른 친구들과 척을 지고, 강철 같은 규율로 단련되지 못한 자신을 타박하고 부끄러워했다. 4월에 피는 진달래가 고운 줄 모르고 5월에 피는 아카시아 향기가 최루탄 냄새에 버무려졌던 시절, 전염병처럼 떠돌던 자괴감과 음울함을 치유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실천의 동력으로 여겼다.
그 시절 나는 스스로 행복해지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 스스로 행복하고 현재를 즐기는 부모가 되지 못한 나는, 내 자식을 행복한 아이로 만들어야 한다는 새로운 대의에 쫓긴다. 아이가 잘 놀게 도와줘야 한다고 맘먹지만 아이와 놀면서 난 편안하게 웃음 짓는 행복한 엄마가 아니다. ‘아이와 놀아주기’는 내 ‘투두(To do) 리스트’에 항목 하나를 더한 것일 뿐이어서 번번이 난 피곤에 지친 얼굴을 딸에게 들킨다. 고민을 토로했더니 선배 언니가 충고를 해줬다. 아이 데리고 동물원이나 박물관 가려고 애쓰지 말고 집안일을 놀이처럼 애랑 같이 해보라고. 모처럼 쉬는 주말에 아이랑 ‘청소놀이’ ‘요리놀이’를 하기로 했다. 걸레질을 하라고 했더니 청소기를 밀겠다고 하고 프라이팬 볶기를 하라고 했더니 칼질을 하겠단다. 엄마가 하는 게 더 재미있어 보이는 모양이었다. 들쑥날쑥 썰린 감자볶음을 낄낄거리고 먹으면서 모처럼 나는 편안한 주말을 보냈다. “모든 이론은 회색이며 오직 영원한 것은 저 푸른 생명의 나무다.” 내 혼잣말에는 아랑곳없이 딸애는 김치담그기 놀이는 언제 할 거냐며 나를 채근한다. 신록이 푸른 5월이다.
이진순 미국 올드도미니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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