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공 “유서 대신 써줘 분신종용” 민주화세력 매도
국과수 “김기설씨 유서 스스로 작성했다” 번복
진실화해위, 2007년에 “대필 아니다” 재심 물꼬
국과수 “김기설씨 유서 스스로 작성했다” 번복
진실화해위, 2007년에 “대필 아니다” 재심 물꼬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의 시작은 199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4월26일 명지대 1학년 강경대씨가 시위 도중 경찰의 쇠파이프에 맞아 숨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러자 전국 곳곳에서 대학생과 재야단체 인사들이 이에 항의해 잇따라 분신하는 이른바 ‘분신정국’이 이어졌고, 5월8일에는 서강대 본관 옥상에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씨가 유서를 남기고 몸에 불을 붙인 뒤 투신해 숨졌다. 그러자 박홍 당시 서강대 총장은 “죽음을 선동하고 이용하려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고 주장했고, 열흘 뒤인 5월18일 검찰은 “김기설씨의 유서와 가족이 제출한 김씨의 필적이 다르다”고 발표했다. 검찰은 김씨의 유서를 대신 쓴 인물로 강기훈 당시 전민련 총무부장을 지목했고, 6월24일 강씨를 자살방조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노태우 정권은 “유서까지 대신 써주며 분신을 종용했다”고 민주화운동 세력을 매도하고 나섰다.
강씨는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유서를 대필하지 않았다고 일관되게 주장했지만, 이듬해 7월24일 대법원은 강씨에게 징역 3년과 자격정지 1년6월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치열한 법정 공방이 벌어지는 동안 이 사건은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이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1994년 8월17일 형기를 모두 채우고 출소한 강씨에게 명예회복의 기회를 열어준 것은 노무현 정부의 과거사 정리 작업이었다. 2005년 12월 경찰청 과거사위원회는 “(김기설씨의) 유서는 김씨 친필로 보이나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는 못했다”고 발표했다. 1991년 사건 당시 김씨의 유서 필적감정을 했던 국립과학수사연구소도 ‘김씨의 유서는 김씨 본인이 작성한 것’이라는 필적 재감정 결과를 내놓았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당시 위원장 송기인)는 2007년 11월13일 “강씨가 김씨의 유서를 대신 쓰지 않았다”며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고, 국가에 재심을 권고했다. 강씨는 2008년 1월31일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고, 2009년 9월16일 서울고법 형사10부(재판장 이강원)는 재심 개시 결정을 내렸다. 재판부는 “분신한 김기설씨의 유서가 김씨의 필적과 일치한다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와 감정기관의 감정 결과가 나왔다”며 “유죄의 확정판결을 더이상 유지할 수 없는 고도의 개연성이 인정된다”고 밝혔다.
하지만 강씨의 명예회복 노력은 검찰과 보수세력의 반발에 발목이 잡혔다. 서울고검 공판부(부장 임권수)는 재심 개시 결정에 불복해 대법원에 즉시항고했다. 대법원은 검찰의 즉시항고 이후 2년10개월이 지나도록 결정을 미루고 있다.
유신재 기자 oho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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