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국의 소리 31일 오전 ‘광복 60돌 사할린 피징용 한인을 위한 위령제’에 참석차 사할린에 온 조계종 법장 총무원장(왼쪽)이 몽산 스님과 함께 코르사코프에 거주하는 양수철(86·중앙)씨 집을 방문해 라디오를 전달했다. 양씨는 사할린 1세대로 20살에 강제징용돼 에밀스크의 한 탄광에서 일하다 6년 전 완전히 시력을 잃었다. 지난 6월 사할린을 방문한 몽산 스님에게 ‘눈이 안 보이니 소리로라도 고국의 소식을 듣고 싶다’며 라디오를 요청했고 마침내 약속이 이뤄졌다. 코르사코프/홍용덕 기자
“원혼이여, 넋이라도 편히 쉬소서” 1세대 대부분 숨져…4천명 한국 귀국 기다려
일제 시대 사할린으로 징용됐다가 귀국하지 못한 채 숨진 동포들의 넋을 달래기 위한 위령제가 광복 60년 만에 처음으로 현지에서 열렸다. ‘사할린 피징용 한인 위령제 추진위원회’(공동대표 한명숙 열린우리당 의원, 몽산 대한불교 조계종 대흥사 주지)는 28일 샥조르스크, 29일 우글레고르스크에서 위령제를 했다. 러시아 말로 ‘석탄의 도시’인 우글레고르스크와 ‘광부의 도시’라는 샥조르스크는 일제가 패망하기 직전 3200명의 한인동포를 ‘전환노동자’라는 이름으로 재징용한 역사적 기록이 남아 있는 유일한 곳이다. 당시 끌려온 동포들이 일했던 탄광 10여곳 중 지금은 미쓰비시 탄광 1개가 갱도 등 당시 흔적을 유일하게 간직하고 있지만, 그나마 곧 폐광될 예정이다. 샥조르스크는 겨울이 10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이어지는 북위 50도 부근에 위치해 있다. 긴긴 겨울 동안 영하 20~40도의 삭풍 속에서 한인동포들이 몸을 껴안고서 잠을 잤다는 일제식 목조 연립주택인 ‘나가야’가 유일하게 이곳에 한 채 남아 있다. 샥조르스크의 한인 동포 위령제는 미쓰비시 탄광 인근의 한인 위령탑 위에 제사상을 차려놓고 치러졌다. 1942년 탄광 폭발사고로 70여명의 한인동포가 목숨을 잃자 일본이 세웠다는 높이 10여미터의 위령탑은 밑동이 부러진 채 숲속에 잔해로 나뒹굴고 있었다. 샥조르스크 한인회 부회장 김원진(64)씨는 “당시 탄광에 가스가 차 위험하다고 했지만 일본인 탄광책임자가 전시라 빨리 석탄을 캐야한다며 동포들을 내몰다 폭발사고가 났다”고 말했다. 이어 위령제는 우글레고르스크(29일), 해방 뒤 고향으로 돌아갈 배를 기다리며 항구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서 한인동포들이 모여 있었다는 코르사코프의 ‘망향의 언덕’(30일), 유즈노사할린스크(31일)에 이르기까지 장장 800여킬로미터를 달리며 이뤄졌다. 위령제는 억울하게 죽어간 한인동포와 후손에게는 ‘해원의 자리’였고 ‘눈물의 자리’였다. 500여명의 동포가 참가한 우글레고르스크 위령제에서 만난 한덕현(82) 할머니는 기자의 손을 잡고 “멀리에서 와줘서 고맙다”고 눈물을 흘렸다. 망향의 언덕에서 한국에서 가져온 흙을 사할린 흙과 섞은 뒤 항구 아래 남녘 바다로 뿌리던 박영애(71) 할머니는 “고향 얘기만 하면 술을 마시던 남편 생각이 난다”고 눈시울을 적셨다. 조계종 범패공연단과 명원문화재단, 국악공연단 아우레 꼬레아를 이끌고 위령제를 추진한 몽산 스님은 “강제징용 60년의 한을 안고 숨져간 분들 넋이라도 위로하고 싶었다”며 “이젠 한을 풀고 극락세계든 천당이든 원하시는 곳에 가셔서 편히 쉬시라”고 넋을 빌었다. 일제에 의해 사할린으로 끌려온 한인동포는 모두 15만여명에 이르렀다. 일본이 패전하기 직전 다시 규슈 등지로 끌려간 10만여명을 빼고도 1945년 광복 때 5만여명의 동포가 사할린 땅에 억류돼 있었다. 이 가운데 그동안 한국으로 영주귀국한 동포는 1163명에 불과하다. 그 사이 1세대 동포의 대부분은 숨졌다. 현재는 4천여명이 귀국을 고대하고 있다. 일본은 부모나 조부모 가운데 1명이 일본인으로, 본인이 희망하면 모두 귀국시켜왔다. 그 결과 사할린에 남은 일본인 2, 3세는 300여명에 불과하다. 사할린/홍용덕 기자 ydh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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