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장준하 선생의 공식적인 사인인 ‘실족 추락사’는 유일한 목격자 김용환씨에게 기대어 있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 시절부터 이 사건을 파헤치고 있는 고상만씨(왼쪽)는 김씨의 진술을 믿을 수 없다고 말한다. 지난 16일 낮 경기도 고양시 고양어울림누리 노천 카페에서 김씨가 <한겨레> 기자에게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고양/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토요판/커버스토리] ‘조사관’ 고상만의 네 가지 의문
▶ 추락했지만 깨끗한 주검, 오락가락하는 목격자의 진술, 정보기관의 수상한 행적… 1975년 장준하 선생의 죽음은 추리소설보다 더 미스터리적이다. 진상조사는 1988년 경기도 포천경찰서와 1993년 민주당 진상규명조사위원회, 2001년 대통령 소속 1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2003년 2기 의문사위 등 네 차례 이뤄졌다. 최종 결론에 이르지 못했지만 2기 의문사위는 그간 제기된 모든 의혹을 검토해 가장 종합적인 조사 결과를 내놓았다. 네 가지 의문을 중심으로 장 선생의 죽음을 정리하고 ‘목격자’를 자처하는 김용환씨를 인터뷰했다.
‘추락한 거 직접 봤다’ ‘못봤다’
‘당일 새벽에 현장 갔다’ ‘안갔다’
김용환은 수시로 말을 바꿨다
사건 뒤 10시간 사라졌던 그는
괴전화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1975년 8월17일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선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깎아지른 듯한 벼랑 밑에서 장준하 선생이 숨진 채로 발견됐다. 목격자는 단 한 명. 그는 장 선생이 벼랑에서 떨어졌다고 말했다. 하지만 2003년 제2기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실족 추락사라는 기존의 수사 결과를 정면으로 뒤집었다. 의문사위에서 1년 동안 장준하 선생 의문사 조사를 도맡았던 고상만 당시 조사관은 “사건 당일 장준하 선생은 약사봉 등산을 하지 않았으며, 실족 추락사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고 단언했다. 고씨를 비롯해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 3명이 장준하 선생 사건 전담팀을 꾸려 조사한 결론은 70쪽짜리 보고서에 담겨 국가기록원에 보관돼 있지만 정부는 이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 고씨는 “사망 당시 조사는 목격자를 자처하는 김용환씨의 말로 시작해 그의 말로 끝났다. 정부여당은 ‘목격자가 있는데, 그가 봤다는데 뭐가 문제냐’며 서둘러 사건을 덮었다”고 말했다. 장준하 선생과 김용환씨의 인연은 1967년 김씨가 장 선생의 국회의원 선거 사무실에 찾아와 자원봉사를 자청하면서 시작됐다. 1971년 총선에서 장 선생이 낙선한 뒤 김씨와 장 선생의 만남이 목격된 것은 장 선생이 숨진 당일이 유일했다. 김씨는 ‘장 선생과 헤어진 뒤 어떻게 살았느냐’는 질문에 ‘아버지가 운영한 충남 당진~인천을 오가는 화물선에서 일했다’고 답했지만, 김씨의 형제들은 화물선은 1964년에 처분됐다고 말했다. 조사팀은 목격자 김용환에 대해 △뭘 보았는지 △사건 발생 뒤 10시간 동안 어디서 뭘 했는지 집중적으로 따져 물었으나 시원한 답변을 듣지 못했다. 또 △산행과 추락사고는 과연 있었는지 △정보기관과 청와대는 몰랐는지에 대해 강한 의문을 제기했다. <의문 1> ‘목격자’ 김용환씨 뭘 보았나? - 김용환씨의 진술 내용을 소개해달라. “김용환은 1975년 당시 장준하 선생 추락사고 목격자를 자처하면서 ‘장준하 선생이 소나무 가지를 잡다가 휘어져 추락한 것을 봤다’고 여러차례 진술했다. 사건 발생 다음날인 8월18일 오후 장 선생 빈소에서 문익환, 계훈제, 함석헌 선생 앞에서 ‘선생님이 나무 윗부분을 잡다가 나무가 휘어서 추락한 것을 보았다’고 한 증언이 문익환 목사가 녹음한 67분 분량의 녹취록에 담겨 있다. 김씨는 같은 날 오전 검찰(의정부지청 서돈양 검사) 조사 때도 같은 내용을 진술했다. <동아일보> 장봉진 기자는 당시 검찰 조사를 마치고 나온 김씨로부터 이 이야기를 듣고 19일치 신문 기사를 작성했다고 밝혔다. 당시 수사기관은 목격자를 자처하는 김씨의 진술을 바탕으로 ‘실족 추락사’로 결론지어 지금까지 공식기록은 실족 추락사로 돼 있다. 하지만 김씨는 이러한 핵심 진술을 13년 뒤인 1988년 포천경찰서 재조사 때 뒤집었다. 김씨는 ‘장준하씨가 실족 추락할 때 소나무를 잡았는지 안 잡았는지 보지 못했는데, 며칠 뒤 동아일보 기사를 보고 소나무를 잡고 내려오다 떨어졌다는 것을 알게 돼 말한 것’이라고 말했다. 김씨에게 75년 진술과 88년 포천경찰서 조사 기록이 왜 다르냐고 따져 묻자 ‘88년 경찰 조사 기록을 진술한 적이 없다. 한희권(포천서 수사관)이 멋대로 작성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씨는 의문사위에서 조사받을 때 몇 시간씩 기록을 살피며 표현 하나하나 따질 만큼 치밀한 사람인데, 경찰의 재조사 기록이 마음대로 쓰였을 가능성이 없다고 봤다. 김씨는 의문사위 조사에서도 ‘억 소리가 나서 돌아보니 장 선생이 추락하고 있었다’ ‘먼저 뛰어내렸는데 아무 소리가 없어 돌아보니 장 선생이 없었다’는 등 매번 오락가락하며 진술을 번복했다.” - 김씨가 진술을 수시로 번복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진술이 일관성이 없이 오락가락한 것은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그때그때 상황과 필요에 따라 수시로 말을 바꾼 것이다. 그가 마지막으로 진술한 내용은 ‘계곡 지점에서 먼저 뛰어내렸는데 뒤를 돌아보니 장 선생님이 없었다. 그래서 떨어졌다고 생각했다. 정신없이 내려가보니 장 선생님이 떨어져 있었다’는 것이다. ‘추락한 것을 못 봤다’는 것이 현재까지 조사된 목격자 김씨의 최종 진술이다. 나무를 잡다가 실족 추락사했다는 진술은 더이상 사실이 아니다. 의문사위가 ‘김씨가 본 것이 없었다’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는 이유다. 김씨는 ‘했다더라’ ‘봤다더라’와 같이 제3자 의견을 전달하는 투의 특이한 어법을 사용했다. 왜 그렇게 말하냐. 직접 본 것을 말하라고 하니 ‘충청도 사람이라 그렇다’고 대답했다. 재판으로 결정날 사건 같았으면 벌써 끝났을 사건이다.” 장준하 밀착감시한 중정에선
사망 당시 기록만 없고
기무사도 보고서 없다고 발뺌
의문사위 ‘진상규명 불능’ 판단은
재조사를 위한 조처로
누가 왜 죽였는지 확인작업 필요 <의문 2> 사건 발생 뒤 10시간 김용환의 행적은? -사고 뒤 김씨가 현장에서 사라졌다는데, 어디서 누구를 만났는지 궁금하다. “장 선생의 사망 시각은 8월17일 오후 1시께. 김용환씨는 식사를 준비하는 장소로 달려가 호림산악회 김용덕 회장 일행에게 추락 사실을 알렸다. 사건 현장이 협소해 칡넝쿨 등을 이용해 계곡가 검안바위로 주검을 300m가량 옮겨놓은 시간이 오후 3시. 이 시간부터 김씨가 갑자기 사라져 다음날 오전 1시께 의정부지청 서돈양 검사가 현장을 지휘한 사건 현장에 다시 나타날 때까지 약 10시간 동안 김씨의 행적이 사라졌다. 아무도 김씨의 행선지를 몰랐고 어디서도 김씨의 흔적을 확인할 수 없었다. 김씨의 주장은 ‘산악회장 김용덕씨가 당신이 목격자이니 이동지서에 가서 신고하라고 해서 점퍼를 벗어 장 선생의 얼굴을 가리고 러닝셔츠만 입고 지서에 갔다. 지서 경찰관이 경찰서에 가자고 해 경찰서의 숙직실인지 당직실인지 긴 의자에 앉아 있다가 다음날 장 선생 부인 김희숙씨가 식구와 같은 사람이니 내보내 달라며 신원보증을 해줘 풀려났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동지서나 포천경찰서, 의정부경찰서 어디서도 김씨를 본 사람이 없고 김씨가 다녀갔다는 기록(조서 등)이 전혀 없다. 당시 이동지서에 근무했던 경찰관 4명에게 물어보니 ‘당일 지서에는 장 선생의 부인과 아들 등 유족들과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다녀갔으며, 속옷만 입은 사람은 지서에 오지 않았다. 기록도 없다. 아무리 70년대지만 그 당시에도 그런 특이한 복장으로 왔다면 기억을 못할 리 없다’고 말했다. 산악회장 김용덕씨는 ‘김씨에게 지서에 가서 신고하라고 말한 적이 없으며, 장 선생의 주검을 검안바위에 옮기고 나서 김씨를 찾으니 없었다. 아무도 그의 행방을 몰랐다’고 말했다. 3시30분께 돌아가는 버스에 탄 산악회원(김응식)에게 신고하라고 말했으며, 김응식씨가 지서에 신고했다. 김희숙씨는 ‘그럴 경황도 없었고, 가뜩이나 의심 가는 사람에게 그런 말을 했겠나’라며 즉각 부인했다. 의문사위는 ‘김용환씨가 사건 발생 뒤 어디로 가서 누구를 만났는지’가 사건 규명의 핵심 열쇠라고 봤다. 놀라운 것은 아무리 찾아도 없던 김씨가 자정이 넘은 시간에 사건 현장에 나타났다는 것이다. 당시 사건을 담당한 의정부지청 서돈양 검사의 증언이다. 당직이던 서 검사는 서울 수유리 자택에서 밤 11시께 장준하 선생이 약사봉에서 실족 추락사했다는 연락을 받고 현장을 살펴보기 위해 자정~오전 1시께 의정부시에서 검안 의사를 데리고 현장을 방문했다. 의사와 경찰관을 대동하고 손전등을 들고 검안바위와 계곡 사이 300m를 오르내리며 현장조사를 하던 중 누군가 ‘이 사람이 김용환이라고 합니다’라며 사라진 김씨를 데려왔다는 것이다. 서 검사는 경찰관에게 ‘데리고 갔다가 내일 데려와라’고 지시했다. 김씨는 의정부경찰서 수사과장실에서 밤을 새우고 다음날 의정부지청에서 조사를 받았다. 김용환씨는 88년 포천경찰서 재조사 때 ‘당일 밤 검사에게 사건 경위를 설명한 사실이 있고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은 사실이 있다’고 말했지만, 의문사위 조사 때는 사건 현장에 가지 않았다고 부인했다.” - 사고 직후 유족에게 소식을 전한 괴전화의 실체는 밝혀졌나? “풀리지 않는 의문 가운데 하나가 당일 오후 3시께 장 선생의 가족에게 사고 소식을 전한 전화의 주인공이 누구냐는 문제였다. ‘장 선생이 사고가 났다. 서울에서 많은 사람이 와야 모셔갈 수 있다’고 사고 직후 전화를 건 익명의 남자가 사건의 진실을 알 만한 사람이라 여겨졌다. 유족 등도 전화의 주인공을 찾으면 사건의 실마리가 풀릴 수 있을 것으로 보고 백방으로 수소문했지만 알 수 없었다. 의문은 중앙정보부가 제공한 뜻밖의 문서에서 풀렸다. 다른 문서에 섞여서 들어온 75년 8월17일 밤 9시 작성된 ‘중요상황보고’ 문서에 적혀 있는 전화의 발신자는 다름 아닌 김용환이었다. 깜짝 놀라 혹시 동명이인이 아닐까도 의심해봤지만 ‘동 일행인 김용환’(동대문구 이문동 거주)이라고 분명히 적혀 있었다. 인근에 전화라고는 이장(이장은 한번도 남에게 전화를 빌려준 적이 없다고 말함) 집에 행정전화 한 대밖에 없는 시골마을에서 김씨는 과연 ‘어디서’ 전화를 했을까. 김씨는 전화한 사실을 극구 부인하다가 중앙정보부의 문서를 들이밀자 ‘문서가 조작됐다. 조사를 거부한다’며 조사 도중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김씨가 통화 사실을 시인할 경우 그가 ‘어디서 전화를 했는지’ 설명해야 하기 때문에 부인한 것으로 봤다.” <의문 3> 산행과 추락사고는 있었나? -산행이 없었다고 단정한 이유는? “2기 의문사위원회는 장 선생과 목격자 김용환씨가 당일 산행을 하지 않은 것으로 최종 판단했다. 그 근거로 20여차례 현지조사 결과 만약 산행을 했다면 적어도 1시간30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하지만 12시30분께 산행을 시작한 김씨가 사건 발생 시간인 1시까지 불과 30~40분 사이에 군인과 만나 커피를 마시고 난 뒤 산 정상까지 올라갔다가 샌드위치를 나눠먹고 하산하는 것은 시간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봤다. 당시 사건을 조사한 의정부지청 서돈양 검사의 의견도 같았다. 서 전 검사는 “장준하 선생과 김용환씨가 산행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당시 판단했다. 그 짧은 시간에 정상까지 가서 샌드위치를 먹고 다시 하산했다는 것은 시간상 불가능해 당일 산행은 없었던 것으로 판단했다”고 말했다. 따라서 이전의 조사 기록이나 에스비에스의 <그것이 알고 싶다> 프로그램이 산행 코스라고 보여준 내용은 잘못이다. 김씨에게 산행 코스를 수도 없이 물었지만 단 한번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의문사위는 김씨를 더이상 ‘목격자’로 볼 수 없다고 보고 ‘동행자’로 바꿔 부르기로 했다. 장 선생의 산행은 이를 뒷받침하는 김씨의 새로운 진술이 없는 한 현재로는 사실이 아니다.” -사망의 직접 원인이 실족 추락사가 아니라고 본 이유는? “최근 이장 과정에서 공개된 유골을 보면 6㎝ 크기의 후두부 원형 함몰 흔적과 엉치뼈 골절만 있었다. 사망 당시에도 다른 상처가 전혀 없이 깨끗했다. 만약 14.7m 높이에서 굴러떨어졌다면 당연히 물이끼 등이 옷에 묻었어야 할 텐데 입고 있던 아이보리색 윗옷은 깨끗했고 물이끼도 훼손된 흔적도 없었다. 샌드위치와 함께 먹기 위해 커피를 담아 왔다는 배낭 안의 ‘보온병’이 멀쩡한 것도 추락이 없었다는 하나의 증거로 볼 수 있다. 두개골이 함몰되고 엉치뼈가 부러질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다면 보온병의 유리막이 박살 났어야 했다. 홍익대 최형연 교수팀에 의뢰해 조사한 ‘시뮬레이션을 활용한 장준하의 추락과정 재구성 연구 결과’를 보면, 각각 다른 12가지 경우를 가정해 추락시켰더니 추락물의 초기 자세 모두 두부에 외상을 동반한 골절이 발견됐다. 또 12가지 자세 가운데 11가지의 경우 흉부에 찰과상과 좌상이, 8가지의 경우 안면에 찰과상과 좌상이 발견됐다. 12가지 자세 모두 두부에 가해진 3회 이상의 충격으로 골절과 찰과상 및 좌상이 발생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 교수팀은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장준하가 추락했다고 알려진 장소에서 추락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다.” <의문 4> 정보기관과 청와대는 몰랐나? -기무사와 국정원 등 정보기관은 의문사위 조사에 얼마만큼 협조했나? “기무사령부(당시 보안사령부)는 ‘우리는 그 현장에 간 적이 없다. 우리와 상관이 없기 때문에 가지 않았다’며 모르쇠로 일관했다. 하지만 여러가지 정황상 분명히 현장에 갔을 것이란 의심이 들었다. 약사봉 인근 105보안부대 한치규 부대장(대령)의 운전병을 찾아 당시 밤 12시께 현장에 갔었다는 증거를 내밀자 기무사는 그때에야 ‘현장에 갔다’고 자백하고, 16절지 텔레타이프를 작성해 진종채 당시 보안사령관에게 직보했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관련자료를 요청하자 기무사는 ‘존안자료 없음’이란 말을 되풀이하며 단 한장의 문서도 내주지 않았다. 장준하 선생 사건뿐 아니라 허원근 일병 사건, 박창수 사건, 이철규 사건, 이내창 사건 등 당시 보안사가 개입되거나 자료가 있을 것으로 예상된 사건 모두 마찬가지였다. 의문사위 조사관 20여명이 기무사령부 앞에서 실지조사를 요구하며 항의하자 철문을 걸어 잠그고 출입을 막았다. 민주정부가 들어섰다고 하지만 정보기관의 거대한 벽을 느꼈다. 사건 직후 박정희 대통령이 진종채 보안사령관과 47분 동안 독대를 했는데 무슨 말이 오갔는지 공개해야 한다. 장 선생의 동향을 밀착감시해온 국가정보원(당시 중앙정보부)도 장 선생이 1주일 전 무등산에 등산한 보고서는 시간 단위별로 많이 보관돼 있었지만 유독 약사봉 등산 기록은 남기지 않았다. 중앙정보부로부터 협조받은 문서 분량은 많았지만 장준하 선생 사망 전후를 기록한 자료는 달랑 한장뿐이었다. 장 선생 사망 뒤 가족들의 행동과 장례식장의 조문객까지도 꼼꼼히 기록으로 남겼는데 유독 사망 당시 상황만 빠져 있었다. 중정 직원들이 현장을 방문했고 이동지서에 와서 사건기록을 필사해 가면서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함구를 지시한 것이나, 산악회 관광버스 운전기사 집에까지 찾아가 조사하고 입조심하라고 경고한 자료마저 내주지 않았다. 중정 관계자들조차 사망 뒤 추가보고 등 자료가 없는 것이 이상하다고 말할 정도였다. 존안자료가 없는 것에 대해 조사하겠다고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 -추가 조사가 필요한 이유를 설명해달라. “당시 중앙정보부의 ‘위해분자 관찰계획 보고서’에는, 15년형을 선고받고 10개월 만에 석방된 장준하 선생이 유신반대 2차 서명운동을 시작할 경우 ‘보고 후 조치’할 계획이라고 쓰여 있었다. 실제로 장 선생은 2차 서명운동을 추진했고 4개월 뒤 의문사를 당했다. ‘보고 후 조치’라는 것이 뭘 의미하는지 추가조사가 필요하다. 또 서울시경이 1964년 중앙정보부에서 사설정보원으로 활용할 수 있는 인물을 추천한 명단인 ‘특수인물 정황카드’에 김용환씨가 포함돼 있었다. 중앙정보부가 이들을 사설정보원으로 활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1967년 장준하 선생을 찾아온 김씨가 그 전부터 중정 사설정보원으로 활동했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연좌제(삼촌이 월북)로 취직을 못하고 떠돌던 김씨는 장 선생 사망 1년 뒤 공화당 소속 국회의원에 출마한 사람이 이사장으로 있는 사립학교의 정식교사로 부임했다. 김정렴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은 장준하 사건을 박 대통령에게 보고했느냐고 묻자 ‘장준하가 누구냐. 그런 사람 모른다’고 잡아뗐다. 박 대통령도 장준하를 모르냐고 재차 따져묻자 ‘내가 모르는데 각하가 알았겠냐’며 전면 모르쇠 작전으로 일관했다. 계속 부정하기가 멋쩍었던지 ‘당시는 경제발전 위해 엄청 바쁜 시기였다. 알 필요도 없고 그런 것 신경 쓸 만큼 한가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당시 중앙정보부와 함께 유신정권 안위를 위해 충성경쟁을 벌였던 청와대 경호실도 모르쇠로 일관했다. 2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장준하 사건을 ‘진상규명 불능’으로 판단한 것은 국가정보원과 기무사령부 등 정보기관의 조사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아 차기 위원회에서 재조사를 하기 위해 남겨둔 조처였다. 국회에서 특별법이 제정돼 민관 합동의 조사기구가 꾸려지면 반드시 검찰 수사에 준하는 ‘강제수사권’(압수수색, 구인 등)과 현장에 가서 조사할 수 있는 ‘실지조사권’을 부여해야 한다. 유골에 대한 법의학적 검증과 함께 기무사령부와 국가정보원에 들어가서 자료를 열람하고 실제로 조사할 수 있어야 사건의 의혹을 해결할 수 있다.” 박경만 기자 mani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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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환은 수시로 말을 바꿨다
사건 뒤 10시간 사라졌던 그는
괴전화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1975년 8월17일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선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깎아지른 듯한 벼랑 밑에서 장준하 선생이 숨진 채로 발견됐다. 목격자는 단 한 명. 그는 장 선생이 벼랑에서 떨어졌다고 말했다. 하지만 2003년 제2기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실족 추락사라는 기존의 수사 결과를 정면으로 뒤집었다. 의문사위에서 1년 동안 장준하 선생 의문사 조사를 도맡았던 고상만 당시 조사관은 “사건 당일 장준하 선생은 약사봉 등산을 하지 않았으며, 실족 추락사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고 단언했다. 고씨를 비롯해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 3명이 장준하 선생 사건 전담팀을 꾸려 조사한 결론은 70쪽짜리 보고서에 담겨 국가기록원에 보관돼 있지만 정부는 이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 고씨는 “사망 당시 조사는 목격자를 자처하는 김용환씨의 말로 시작해 그의 말로 끝났다. 정부여당은 ‘목격자가 있는데, 그가 봤다는데 뭐가 문제냐’며 서둘러 사건을 덮었다”고 말했다. 장준하 선생과 김용환씨의 인연은 1967년 김씨가 장 선생의 국회의원 선거 사무실에 찾아와 자원봉사를 자청하면서 시작됐다. 1971년 총선에서 장 선생이 낙선한 뒤 김씨와 장 선생의 만남이 목격된 것은 장 선생이 숨진 당일이 유일했다. 김씨는 ‘장 선생과 헤어진 뒤 어떻게 살았느냐’는 질문에 ‘아버지가 운영한 충남 당진~인천을 오가는 화물선에서 일했다’고 답했지만, 김씨의 형제들은 화물선은 1964년에 처분됐다고 말했다. 조사팀은 목격자 김용환에 대해 △뭘 보았는지 △사건 발생 뒤 10시간 동안 어디서 뭘 했는지 집중적으로 따져 물었으나 시원한 답변을 듣지 못했다. 또 △산행과 추락사고는 과연 있었는지 △정보기관과 청와대는 몰랐는지에 대해 강한 의문을 제기했다. <의문 1> ‘목격자’ 김용환씨 뭘 보았나? - 김용환씨의 진술 내용을 소개해달라. “김용환은 1975년 당시 장준하 선생 추락사고 목격자를 자처하면서 ‘장준하 선생이 소나무 가지를 잡다가 휘어져 추락한 것을 봤다’고 여러차례 진술했다. 사건 발생 다음날인 8월18일 오후 장 선생 빈소에서 문익환, 계훈제, 함석헌 선생 앞에서 ‘선생님이 나무 윗부분을 잡다가 나무가 휘어서 추락한 것을 보았다’고 한 증언이 문익환 목사가 녹음한 67분 분량의 녹취록에 담겨 있다. 김씨는 같은 날 오전 검찰(의정부지청 서돈양 검사) 조사 때도 같은 내용을 진술했다. <동아일보> 장봉진 기자는 당시 검찰 조사를 마치고 나온 김씨로부터 이 이야기를 듣고 19일치 신문 기사를 작성했다고 밝혔다. 당시 수사기관은 목격자를 자처하는 김씨의 진술을 바탕으로 ‘실족 추락사’로 결론지어 지금까지 공식기록은 실족 추락사로 돼 있다. 하지만 김씨는 이러한 핵심 진술을 13년 뒤인 1988년 포천경찰서 재조사 때 뒤집었다. 김씨는 ‘장준하씨가 실족 추락할 때 소나무를 잡았는지 안 잡았는지 보지 못했는데, 며칠 뒤 동아일보 기사를 보고 소나무를 잡고 내려오다 떨어졌다는 것을 알게 돼 말한 것’이라고 말했다. 김씨에게 75년 진술과 88년 포천경찰서 조사 기록이 왜 다르냐고 따져 묻자 ‘88년 경찰 조사 기록을 진술한 적이 없다. 한희권(포천서 수사관)이 멋대로 작성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씨는 의문사위에서 조사받을 때 몇 시간씩 기록을 살피며 표현 하나하나 따질 만큼 치밀한 사람인데, 경찰의 재조사 기록이 마음대로 쓰였을 가능성이 없다고 봤다. 김씨는 의문사위 조사에서도 ‘억 소리가 나서 돌아보니 장 선생이 추락하고 있었다’ ‘먼저 뛰어내렸는데 아무 소리가 없어 돌아보니 장 선생이 없었다’는 등 매번 오락가락하며 진술을 번복했다.” - 김씨가 진술을 수시로 번복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진술이 일관성이 없이 오락가락한 것은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그때그때 상황과 필요에 따라 수시로 말을 바꾼 것이다. 그가 마지막으로 진술한 내용은 ‘계곡 지점에서 먼저 뛰어내렸는데 뒤를 돌아보니 장 선생님이 없었다. 그래서 떨어졌다고 생각했다. 정신없이 내려가보니 장 선생님이 떨어져 있었다’는 것이다. ‘추락한 것을 못 봤다’는 것이 현재까지 조사된 목격자 김씨의 최종 진술이다. 나무를 잡다가 실족 추락사했다는 진술은 더이상 사실이 아니다. 의문사위가 ‘김씨가 본 것이 없었다’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는 이유다. 김씨는 ‘했다더라’ ‘봤다더라’와 같이 제3자 의견을 전달하는 투의 특이한 어법을 사용했다. 왜 그렇게 말하냐. 직접 본 것을 말하라고 하니 ‘충청도 사람이라 그렇다’고 대답했다. 재판으로 결정날 사건 같았으면 벌써 끝났을 사건이다.” 장준하 밀착감시한 중정에선
사망 당시 기록만 없고
기무사도 보고서 없다고 발뺌
의문사위 ‘진상규명 불능’ 판단은
재조사를 위한 조처로
누가 왜 죽였는지 확인작업 필요 <의문 2> 사건 발생 뒤 10시간 김용환의 행적은? -사고 뒤 김씨가 현장에서 사라졌다는데, 어디서 누구를 만났는지 궁금하다. “장 선생의 사망 시각은 8월17일 오후 1시께. 김용환씨는 식사를 준비하는 장소로 달려가 호림산악회 김용덕 회장 일행에게 추락 사실을 알렸다. 사건 현장이 협소해 칡넝쿨 등을 이용해 계곡가 검안바위로 주검을 300m가량 옮겨놓은 시간이 오후 3시. 이 시간부터 김씨가 갑자기 사라져 다음날 오전 1시께 의정부지청 서돈양 검사가 현장을 지휘한 사건 현장에 다시 나타날 때까지 약 10시간 동안 김씨의 행적이 사라졌다. 아무도 김씨의 행선지를 몰랐고 어디서도 김씨의 흔적을 확인할 수 없었다. 김씨의 주장은 ‘산악회장 김용덕씨가 당신이 목격자이니 이동지서에 가서 신고하라고 해서 점퍼를 벗어 장 선생의 얼굴을 가리고 러닝셔츠만 입고 지서에 갔다. 지서 경찰관이 경찰서에 가자고 해 경찰서의 숙직실인지 당직실인지 긴 의자에 앉아 있다가 다음날 장 선생 부인 김희숙씨가 식구와 같은 사람이니 내보내 달라며 신원보증을 해줘 풀려났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동지서나 포천경찰서, 의정부경찰서 어디서도 김씨를 본 사람이 없고 김씨가 다녀갔다는 기록(조서 등)이 전혀 없다. 당시 이동지서에 근무했던 경찰관 4명에게 물어보니 ‘당일 지서에는 장 선생의 부인과 아들 등 유족들과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다녀갔으며, 속옷만 입은 사람은 지서에 오지 않았다. 기록도 없다. 아무리 70년대지만 그 당시에도 그런 특이한 복장으로 왔다면 기억을 못할 리 없다’고 말했다. 산악회장 김용덕씨는 ‘김씨에게 지서에 가서 신고하라고 말한 적이 없으며, 장 선생의 주검을 검안바위에 옮기고 나서 김씨를 찾으니 없었다. 아무도 그의 행방을 몰랐다’고 말했다. 3시30분께 돌아가는 버스에 탄 산악회원(김응식)에게 신고하라고 말했으며, 김응식씨가 지서에 신고했다. 김희숙씨는 ‘그럴 경황도 없었고, 가뜩이나 의심 가는 사람에게 그런 말을 했겠나’라며 즉각 부인했다. 의문사위는 ‘김용환씨가 사건 발생 뒤 어디로 가서 누구를 만났는지’가 사건 규명의 핵심 열쇠라고 봤다. 놀라운 것은 아무리 찾아도 없던 김씨가 자정이 넘은 시간에 사건 현장에 나타났다는 것이다. 당시 사건을 담당한 의정부지청 서돈양 검사의 증언이다. 당직이던 서 검사는 서울 수유리 자택에서 밤 11시께 장준하 선생이 약사봉에서 실족 추락사했다는 연락을 받고 현장을 살펴보기 위해 자정~오전 1시께 의정부시에서 검안 의사를 데리고 현장을 방문했다. 의사와 경찰관을 대동하고 손전등을 들고 검안바위와 계곡 사이 300m를 오르내리며 현장조사를 하던 중 누군가 ‘이 사람이 김용환이라고 합니다’라며 사라진 김씨를 데려왔다는 것이다. 서 검사는 경찰관에게 ‘데리고 갔다가 내일 데려와라’고 지시했다. 김씨는 의정부경찰서 수사과장실에서 밤을 새우고 다음날 의정부지청에서 조사를 받았다. 김용환씨는 88년 포천경찰서 재조사 때 ‘당일 밤 검사에게 사건 경위를 설명한 사실이 있고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은 사실이 있다’고 말했지만, 의문사위 조사 때는 사건 현장에 가지 않았다고 부인했다.” - 사고 직후 유족에게 소식을 전한 괴전화의 실체는 밝혀졌나? “풀리지 않는 의문 가운데 하나가 당일 오후 3시께 장 선생의 가족에게 사고 소식을 전한 전화의 주인공이 누구냐는 문제였다. ‘장 선생이 사고가 났다. 서울에서 많은 사람이 와야 모셔갈 수 있다’고 사고 직후 전화를 건 익명의 남자가 사건의 진실을 알 만한 사람이라 여겨졌다. 유족 등도 전화의 주인공을 찾으면 사건의 실마리가 풀릴 수 있을 것으로 보고 백방으로 수소문했지만 알 수 없었다. 의문은 중앙정보부가 제공한 뜻밖의 문서에서 풀렸다. 다른 문서에 섞여서 들어온 75년 8월17일 밤 9시 작성된 ‘중요상황보고’ 문서에 적혀 있는 전화의 발신자는 다름 아닌 김용환이었다. 깜짝 놀라 혹시 동명이인이 아닐까도 의심해봤지만 ‘동 일행인 김용환’(동대문구 이문동 거주)이라고 분명히 적혀 있었다. 인근에 전화라고는 이장(이장은 한번도 남에게 전화를 빌려준 적이 없다고 말함) 집에 행정전화 한 대밖에 없는 시골마을에서 김씨는 과연 ‘어디서’ 전화를 했을까. 김씨는 전화한 사실을 극구 부인하다가 중앙정보부의 문서를 들이밀자 ‘문서가 조작됐다. 조사를 거부한다’며 조사 도중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김씨가 통화 사실을 시인할 경우 그가 ‘어디서 전화를 했는지’ 설명해야 하기 때문에 부인한 것으로 봤다.” <의문 3> 산행과 추락사고는 있었나? -산행이 없었다고 단정한 이유는? “2기 의문사위원회는 장 선생과 목격자 김용환씨가 당일 산행을 하지 않은 것으로 최종 판단했다. 그 근거로 20여차례 현지조사 결과 만약 산행을 했다면 적어도 1시간30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하지만 12시30분께 산행을 시작한 김씨가 사건 발생 시간인 1시까지 불과 30~40분 사이에 군인과 만나 커피를 마시고 난 뒤 산 정상까지 올라갔다가 샌드위치를 나눠먹고 하산하는 것은 시간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봤다. 당시 사건을 조사한 의정부지청 서돈양 검사의 의견도 같았다. 서 전 검사는 “장준하 선생과 김용환씨가 산행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당시 판단했다. 그 짧은 시간에 정상까지 가서 샌드위치를 먹고 다시 하산했다는 것은 시간상 불가능해 당일 산행은 없었던 것으로 판단했다”고 말했다. 따라서 이전의 조사 기록이나 에스비에스의 <그것이 알고 싶다> 프로그램이 산행 코스라고 보여준 내용은 잘못이다. 김씨에게 산행 코스를 수도 없이 물었지만 단 한번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의문사위는 김씨를 더이상 ‘목격자’로 볼 수 없다고 보고 ‘동행자’로 바꿔 부르기로 했다. 장 선생의 산행은 이를 뒷받침하는 김씨의 새로운 진술이 없는 한 현재로는 사실이 아니다.” -사망의 직접 원인이 실족 추락사가 아니라고 본 이유는? “최근 이장 과정에서 공개된 유골을 보면 6㎝ 크기의 후두부 원형 함몰 흔적과 엉치뼈 골절만 있었다. 사망 당시에도 다른 상처가 전혀 없이 깨끗했다. 만약 14.7m 높이에서 굴러떨어졌다면 당연히 물이끼 등이 옷에 묻었어야 할 텐데 입고 있던 아이보리색 윗옷은 깨끗했고 물이끼도 훼손된 흔적도 없었다. 샌드위치와 함께 먹기 위해 커피를 담아 왔다는 배낭 안의 ‘보온병’이 멀쩡한 것도 추락이 없었다는 하나의 증거로 볼 수 있다. 두개골이 함몰되고 엉치뼈가 부러질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다면 보온병의 유리막이 박살 났어야 했다. 홍익대 최형연 교수팀에 의뢰해 조사한 ‘시뮬레이션을 활용한 장준하의 추락과정 재구성 연구 결과’를 보면, 각각 다른 12가지 경우를 가정해 추락시켰더니 추락물의 초기 자세 모두 두부에 외상을 동반한 골절이 발견됐다. 또 12가지 자세 가운데 11가지의 경우 흉부에 찰과상과 좌상이, 8가지의 경우 안면에 찰과상과 좌상이 발견됐다. 12가지 자세 모두 두부에 가해진 3회 이상의 충격으로 골절과 찰과상 및 좌상이 발생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 교수팀은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장준하가 추락했다고 알려진 장소에서 추락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다.” <의문 4> 정보기관과 청와대는 몰랐나? -기무사와 국정원 등 정보기관은 의문사위 조사에 얼마만큼 협조했나? “기무사령부(당시 보안사령부)는 ‘우리는 그 현장에 간 적이 없다. 우리와 상관이 없기 때문에 가지 않았다’며 모르쇠로 일관했다. 하지만 여러가지 정황상 분명히 현장에 갔을 것이란 의심이 들었다. 약사봉 인근 105보안부대 한치규 부대장(대령)의 운전병을 찾아 당시 밤 12시께 현장에 갔었다는 증거를 내밀자 기무사는 그때에야 ‘현장에 갔다’고 자백하고, 16절지 텔레타이프를 작성해 진종채 당시 보안사령관에게 직보했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관련자료를 요청하자 기무사는 ‘존안자료 없음’이란 말을 되풀이하며 단 한장의 문서도 내주지 않았다. 장준하 선생 사건뿐 아니라 허원근 일병 사건, 박창수 사건, 이철규 사건, 이내창 사건 등 당시 보안사가 개입되거나 자료가 있을 것으로 예상된 사건 모두 마찬가지였다. 의문사위 조사관 20여명이 기무사령부 앞에서 실지조사를 요구하며 항의하자 철문을 걸어 잠그고 출입을 막았다. 민주정부가 들어섰다고 하지만 정보기관의 거대한 벽을 느꼈다. 사건 직후 박정희 대통령이 진종채 보안사령관과 47분 동안 독대를 했는데 무슨 말이 오갔는지 공개해야 한다. 장 선생의 동향을 밀착감시해온 국가정보원(당시 중앙정보부)도 장 선생이 1주일 전 무등산에 등산한 보고서는 시간 단위별로 많이 보관돼 있었지만 유독 약사봉 등산 기록은 남기지 않았다. 중앙정보부로부터 협조받은 문서 분량은 많았지만 장준하 선생 사망 전후를 기록한 자료는 달랑 한장뿐이었다. 장 선생 사망 뒤 가족들의 행동과 장례식장의 조문객까지도 꼼꼼히 기록으로 남겼는데 유독 사망 당시 상황만 빠져 있었다. 중정 직원들이 현장을 방문했고 이동지서에 와서 사건기록을 필사해 가면서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함구를 지시한 것이나, 산악회 관광버스 운전기사 집에까지 찾아가 조사하고 입조심하라고 경고한 자료마저 내주지 않았다. 중정 관계자들조차 사망 뒤 추가보고 등 자료가 없는 것이 이상하다고 말할 정도였다. 존안자료가 없는 것에 대해 조사하겠다고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 -추가 조사가 필요한 이유를 설명해달라. “당시 중앙정보부의 ‘위해분자 관찰계획 보고서’에는, 15년형을 선고받고 10개월 만에 석방된 장준하 선생이 유신반대 2차 서명운동을 시작할 경우 ‘보고 후 조치’할 계획이라고 쓰여 있었다. 실제로 장 선생은 2차 서명운동을 추진했고 4개월 뒤 의문사를 당했다. ‘보고 후 조치’라는 것이 뭘 의미하는지 추가조사가 필요하다. 또 서울시경이 1964년 중앙정보부에서 사설정보원으로 활용할 수 있는 인물을 추천한 명단인 ‘특수인물 정황카드’에 김용환씨가 포함돼 있었다. 중앙정보부가 이들을 사설정보원으로 활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1967년 장준하 선생을 찾아온 김씨가 그 전부터 중정 사설정보원으로 활동했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연좌제(삼촌이 월북)로 취직을 못하고 떠돌던 김씨는 장 선생 사망 1년 뒤 공화당 소속 국회의원에 출마한 사람이 이사장으로 있는 사립학교의 정식교사로 부임했다. 김정렴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은 장준하 사건을 박 대통령에게 보고했느냐고 묻자 ‘장준하가 누구냐. 그런 사람 모른다’고 잡아뗐다. 박 대통령도 장준하를 모르냐고 재차 따져묻자 ‘내가 모르는데 각하가 알았겠냐’며 전면 모르쇠 작전으로 일관했다. 계속 부정하기가 멋쩍었던지 ‘당시는 경제발전 위해 엄청 바쁜 시기였다. 알 필요도 없고 그런 것 신경 쓸 만큼 한가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당시 중앙정보부와 함께 유신정권 안위를 위해 충성경쟁을 벌였던 청와대 경호실도 모르쇠로 일관했다. 2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장준하 사건을 ‘진상규명 불능’으로 판단한 것은 국가정보원과 기무사령부 등 정보기관의 조사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아 차기 위원회에서 재조사를 하기 위해 남겨둔 조처였다. 국회에서 특별법이 제정돼 민관 합동의 조사기구가 꾸려지면 반드시 검찰 수사에 준하는 ‘강제수사권’(압수수색, 구인 등)과 현장에 가서 조사할 수 있는 ‘실지조사권’을 부여해야 한다. 유골에 대한 법의학적 검증과 함께 기무사령부와 국가정보원에 들어가서 자료를 열람하고 실제로 조사할 수 있어야 사건의 의혹을 해결할 수 있다.” 박경만 기자 mani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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