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준하 선생의 추락을 본 목격자는 단 한 명, 김용환씨다. ‘실족사’라는 장 선생의 공식 사인은 그의 증언에 기대 있다. 1975년 장준하 선생이 숨진 채 발견된 경기 포천 약사봉의 계곡에서 장 선생과 함께한 동지와 후배들이 돌비석을 세우고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장준하 기념사업회 제공
[토요판/커버스토리] ‘목격자’ 자처하는 김용환씨 인터뷰
정부가 두번이나 조사했는데
보통 조사를 했겠어요?
그런데 또 한다면 정당한가
날 짓밟는 거밖에 안돼 같은 말도 두번 하면 다르잖아
그런 걸 자꾸 말바꾸기래
언론에 다 얘기하면 속시원해도
이상하게 악용하니 말 못해 “새로운 증거? 있을 수가 없어요. 왜 죄 없는 사람을 몹니까? 나는 당당한 사람이여.” 밀짚모자 쓰고 농약통 멘 노인은 댓바람에 화부터 냈다. “난 피해자여. 그것 때문에 맨날 방황하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자꾸 건드리지 말라는 거여.” 완고한 표정의 노인은 질문 하나 던질 겨를도 주지 않았다. “선생님하고 저는 한마음으로, 함께 움직이고 그랬어요. 뭐가(타살 의혹) 없어요. 있을 수가 없어요.” 노인은 ‘장준하 의문사 사건’의 진실을 손에 쥔 김용환(77)씨다. 의문점에 대한 물음은 거칠게 거부 그는 장준하 선생의 죽음 한가운데 서 있었다. 추락 시뮬레이션 등 의문사위의 여러 조사는 ‘실족 추락사’의 가능성이 낮다고 가리키지만, 이런 시나리오는 모두 ‘목격자 김용환’의 증언을 맞닥뜨리고 깨진다. 지난달 16일과 지난 19일 두 차례 충남 당진의 한 시골마을에 사는 그를 만났다. 의문점에 대한 물음 자체를 거칠게 거부하는 탓에 인터뷰라기보다는 그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들을 수밖에 없었다. 김씨는 사건 뒤 고향의 한 고교에서 1999년 2월 정년퇴임할 때까지 교편을 잡았다. 지금은 2005년 예전 집 위에 새로 양옥을 짓고 농사일을 하며 부인과 함께 지내고 있다. 무엇보다 김씨는 자신이 ‘목격자’가 아니라 ‘피의자’로 취급받는다고 확신했다. “내가 선생님하고 옆에 이렇게 서 있었는데 내가 죽였다고 하면 돼? 난 그렇게 비정상적인 사람이 아녀, 정신병자도 아녀, 난 술도 안 먹는다고.” 여전히 그는 1975년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일어난 장준하 선생 추락사건에 대해 ‘슬픈 목격자’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국가기관과 언론에 당한 ‘피해자’라고도 했다. “내가 지금 수염도 못 깎고 이러고 있어요. 내가 뭐 죄인이오? 결국은 나를 짓밟는 거밖에 안 돼. 내가 죄가 있으면 벌써 밝혀졌지.” 김씨는 특별법을 만들어 사건을 재조사하려는 움직임에도 강한 불쾌감을 드러냈다. “벌써 두 번이나 특별법 적용했잖아요. 세 번 한다는 건 아마 역사상 없을 거예요. 그게 정당한 겁니까? 정치·사회 모든 면에서 바람직하지 않아요.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문제’가 깔려 있기 때문에 정치·사회 모든 면에 직접 영향을 준다는 거야. 그래서 얘기를 못 해.” 그러나 정치적 문제가 정확히 무엇인지 더는 말이 없었고 자신의 결백을 줄곧 강조했다. “국가기관이 두 번이나 조사를 했는데 보통 조사를 했겠어요? 그냥 지나갔겠어요? 그런데도 밝힐 수 없다는 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생각을 해보세요. ‘진상규명 불능’이라고 나왔는데 그게 무슨 뜻이라고 생각하세요? 내가 그런 죄를 지었을지도 모른다, 그 전 정권에서 그런 짓을 했을지도 모른다, 이 두 가지를 놓고 하는 거 아녀?” 기자들에 대한 불신, 끊임없이 쏟아낸 말
최근 새로 확인된 장준하 선생의 두개골 얘기도 꺼냈지만 법의학자들의 판단은 믿을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다른 의문점들과 마찬가지로 구체적인 내용은 언급 자체를 회피했다. “(머리 뒷부분을 가리키며) 여기하고 여기가 결정적이라고 그러는 거 아녀? 근데 보는 사람마다 다 다를 수 있지. 부정적인 입장, 긍정적인 입장… 다 자기 위주로 보는 거여.” 그러면서 ‘진실’은 이미 예전에 다 말했다고 했다. “<월간조선>에 보면 내가 그때 심경이나 과정이라든가 다 적었어. 찾아보면 알아요. 근데 그걸 부정적으로 보면 이해가 안 가는 거여. 선생님하고 불행했던 그 가슴 아픈 걸 자꾸 얘기하라면 안 되는 거지. 난 용납이 안 돼.”
2004년 <월간조선>과 한 인터뷰에서 그는 장준하 선생의 사인은 실족 추락사이며 “맹세코 정보부의 끄나풀이 아니다”고 밝힌 적이 있다.
그 또한 예전 조사 당시 자신의 진술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는 지적을 의식하는 듯했다. “내가 한 말을 똑같이 할 순 없죠. 같은 얘기도 두 번 하면 두 번 다 달라요. 접속사가 다르다든가.”
기자들에 대한 불신도 인터뷰 내내 이어졌다. 김씨와 같은 고교에서 근무한 한 인사는 “피해의식이 많은 것 같았다. 자기 차가 있는데도 일부러 버스를 타고 다니기도 했다. 자기가 납치될지도 모른다는 말도 했다. 퇴직 후에는 학교와도 연락을 끊고 집안 애경사도 외부에 알리지 않았다”고 전했다. 김씨의 하소연은 이렇다. “나를 가지고 논단 말이여.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 줄 알아요? 민주당이 조사하면서 이리 오라 저리 오라.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도 두 번이나 받았어요. 노무현 정부 때도 받고. 근데 또 지금 기자들이 이렇게 장난쳐서 또 하자는 얘기여.” 자신을 둘러싼 의혹이 사라지지 않는 책임이 모두 언론 탓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 또한 조만간 이뤄질지도 모르는 재조사에 신경이 크게 쓰이는 듯했다. 대비, 준비라는 말을 여러 차례 했다. “앞으로 어떤 상황이 올라는지… 나도 대비를 해야 할 거 아녀. 도와줄 수 있는 건 언론이여. 그런데 언론이 나를 죽일라고 그래, 계속 그래.” <한겨레>에 대한 불신은 더 강했다. “한겨레 엉터리여. 너무 지나치게 공격했어. 그전에도 한겨레신문사에서 자주 왔어요. 내가 아파서 드러누워 있는데도… 내 병도 결국 이것 때문에 생긴 거여. 37년을 나를 볶아대니 살겠어요?” 김씨는 고혈압과 위장병을 앓고 있다고 했다.
김씨는 기자와 만나는 내내 말할 거리가 없다면서도 끊임없이 말을 쏟아냈다. “내가 나와서 이렇게 얘기하면 속이 시원해요. 근데 얘기를 하고 싶어도 난 못한단 말이여. 얘기한 걸 이상하게 악용한다고.” 마지막으로 그는 선뜻 알아듣기 어려운 투로 운명이라는 말을 꺼냈다. “내가 요즘 운명이라는 말을 자주 하는데, 난 그걸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여. 운명이 아니고야 어떻게 어려운 고비를 못 넘기고 결국은 (선생님이) 그리됐냐 이거여. 난 사실상 불쌍한 사람이여.”
당진/전진식 기자 seek1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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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 선생 추락사의 ‘유일한 목격자’ 김용환씨는 충남 당진의 한 시골마을에서 살고 있다. 두 차례 인터뷰를 했으나 오락가락한 진술 등에 대해 명쾌한 해명을 듣지 못했다. 전진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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