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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공포는 존재하였기 ‘때문에’ 지금 존재한다

등록 2012-11-09 20:55

정희진 여성학 강사
정희진 여성학 강사
[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경제적 공포>, 비비안 포레스테 지음, 김주경 옮김, 동문선, 1997

아직도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는 이들을 만난다. 이 헌신적인 사도들에 대한 내 감상은 세 가지다. ‘아, 저 열정이 부럽다.’ ‘천당이 그렇게 좋으면 먼저 가시지.’ ‘여기가 지옥인데 뭘 벌써부터 걱정을….’ 사는 게 지옥이라 사후 지옥이 안 무서운 사람, 나뿐일까.

<경제적 공포 - 노동의 소멸과 잉여 존재>의 저자 비비안 포레스테는 그의 다른 명저 <고요함의 폭력>에서 이 상황을 요약한다. “지옥은 비어 있고 악마들은 다 여기 있다.”

이 책은 <자본론> 이후 가장 많이 팔린 경제학서다. 1996년 프랑스에서 출간 직후 17개 언어로 번역되었다. 책 내용은 매일 실감하면서도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경제가 성장할수록 고용은 줄어든다”-과 이 현실이 인류에게 미칠 영향을 분석한다. 저자는 묻는다. “살아갈 권리를 갖기 위해서는 살아남을 수 있는 ‘자격’(강조는 저자)이 필요한가?”(20쪽)

‘똑똑한’ 한명이 십만명을 먹여 살린다는 ‘인재경영’ 시대. 몇 년 전 어떤 신문사는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며 ‘우리의 나아갈 길’을 제시한 바 있다. 산업화 시대에 100만원 상당의 자원을 생산하려면 100일 동안 100명의 노동이 필요했다. 지금은 1명이 하루에 가능하다. 그렇다면 나머지 99명은 99일 동안 무얼 하고 살아야 하는가. 일자리는 바닥났다. 10대들은 공부를 하기 싫은 게 아니라 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안다.

소설가이자 비평가인 지은이는 자본주의가 지구를 삼켜버리고 인간은 인간성 밖으로 추방된 시대의 인간의 조건을 탐구한다. 돈 앞의 인간, 특히 계급 심리 분석이 뛰어나다. 지성과 입장(당파성)을 겸비한 자의 글쓰기란 이런 것이다. 문장은 빼어나고 정치적 입장은 올바르다. 학문간 경계 지키기에 문지기(gate keeper) 역할을 하면서 앎에 겁먹은 ‘지식인’에게 다학제 연구의 모범이 되는 책이다.

전제가 있다. 책이 재미있으려면 어느 정도는 독자가 자신을 ‘쓸모없는 존재, 잉여 인간’과 동일시해야 한다. 그런 성숙한 자세가 없다면, 아니 성숙할 필요까지도 없고 현실을 직시하지 않으면, 비참하고 심란하고 놀라워서 도중에 책을 덮을 확률이 높다. 가장 문제적인 독자는 “남 얘기”로 치부하고 안도하면서 타인을 불쌍하게 생각하는 타입.

기약할 수 없는 인생은 이 시대 패러다임이다. 저출산이 가장 뚜렷한 징표다. 저출산은 양육의 어려움 때문이 아니라 책보다 현실인식이 빠른 여성들의 지혜(결혼 기피와 만혼)의 결과다. 주지하다시피 저출산은 프랑스와 일본에서 1970년대부터 시작된 인류의 자구책이었다. 데이비드 핀처도 영화 <세븐>(1995)에서 모건 프리먼을 통해 브래드 핏에게 말하지 않았던가. “이런 시대에 아기를 낳는 것은 아이에 대한 죄악이야.” 고용과 노동의 시대는 끝났다. 이제 대다수 인류는 착취당할 기회마저 박탈당한, 빼앗기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없는 “귀찮고 성가신 존재”가 되었다.

“공포는 태초부터 있었다…공포는 모든 것을 영원히 지배할 것이다. 공포의 지칠 줄 모르는 현실성, 즉 인간이 매 순간 공포를 느끼는 이유는 그것의 속성이 과거완료이기 때문이다. 과거에 공포가 존재하였기 ‘때문에’(강조는 저자) 지금 공포가 존재하는 것이다…관습은 정당성을 갖는다. 과거에 받아들여졌다는 단 한 가지 이유로 권위를 갖는다.”(79쪽)

그러나 공포는 반응이지 현실이 아니다. 공포는 겁먹은 자에게만 효과가 있다. 공포는 가장 강력한 인간의 행위 동기여서 오랫동안 편리한 통치수단이 되어왔다. 인간의 과거는 다양하다. 그중 어떤 경험에 정당성을 부여할 것인지는 상상력에 의한 인간 스스로의 선택에 달려 있다. “세계화를 겪는 훈련이 아니라 ‘세계화로부터 빠져나오는’ 훈련을 함으로써 세계화에 부응할 수는 없는 것일까?”(259쪽)

지금 이 체제에 시너를 부을 것인가? 폭탄을 설치할 것인가? 자폭할 것인가? 필요한 것은 앎이다. ‘무능한 잉여’의 유일한 자원은 생각하는 능력뿐이다. 필독을 권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 인생, 자녀 교육, 투표에 대한 생각이 근본적으로 달라질 것이다.

정희진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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