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 고 윤이상 선생이 작곡한 ‘광주여 영원히’가 초연된다며 재독 한국인여성모임에서 동포들에게 돌린 안내장. (오른쪽) 미 문화원 방화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은 문부식·김현장씨 구명을 위해 독일의 민주화운동 인사들이 독일어로 펴낸 소식지 <남한: 사형선고 부산 프로세스>의 표지.
원병호씨, 민족연구소 기증 “조악해보일지 모르지만 민주 꿈꾸던 이들의 손때”
‘<알림> 광주의거 1주년을 맞아 윤이상 선생님이 노작 ‘광주여 영원히’를 완성해 아래와 같이 초연하오니 동지들은 물론 친지 동료들에게까지 알려 많은 참석을 바랍니다. 일시: 1981년 5월8일 저녁 8시. 장소: 쾰른시 괴른제니치.’
‘<재독민주한인회> 문서 1호-1980년 9월27일 각 지역대표 위원회 회의 보고 및 한국 민주화와 김대중씨 및 민주인사 구출 연합운동 통보.’
1980년대 독일에서 민주화 운동을 펼치던 재독 동포들이 주고받은 자료 가운데 일부다. 지난달 한국에 온 재독 민주화 운동가 원병호(58)씨는 81~89년 사이 동포들이 펴내고 주고 받은 민주화 운동 관련 자료들을 17일 민족문제연구소에 기증했다. 기증 자료는 △독일 내 민주화 운동 단체들이 서로 주고 받은 문서 △민주화 운동 기념행사 초대장 △재독한인노동자연맹의 정기 소식지 <노연통신> 등 100여편에 이른다.
자료 가운데는 미 문화원 방화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은 문부식·김현장씨 구명을 위해 재독 동포들을 상대로 발행된 소식지도 들어 있다. <남한: 사형선고 부산 프로세스>라는 제목의 24쪽짜리 소식지에는 △방화에서 사형 선고까지 사연 △이돈명 변호사의 변론 △김수환 추기경이 전한 문·김씨의 항변 △문·김씨의 법정 최후 자기변론 △한국 교회와 가톨릭계에서 발표한 성명 등이 차례로 실려 있다.
기증자 원씨는 “지금 보면 조악한 문서들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조국의 민주화를 꿈꾸던 이들의 손때 묻은 소중한 자료들이어서 함부로 다룰 수 없었다”며 “제대로 보존하고 후손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한국으로 가져왔다”고 말했다.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은 이 자료들에 대해 “재독 한국인들의 조국에 대한 뜨거운 애정과 민주화에 대한 염원, 통일에 대한 열망을 확인할 수 있는 역사의 증언 자료들”이라며 “미국이나 일본에 비해 덜 알려졌던 유럽 쪽 민주화 활동을 조명하는 귀중한 증거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원씨는 애초 ‘파독 광부’였다. 외화를 벌기 위해 70년 독일로 건너갔고, 역시 간호사로 독일에 파견된 부인을 만나 가정을 꾸렸다. 탄광회사와 선반공을 거치면서 78년엔 보쿰대학에서 동양정치학과 독일역사 공부도 시작했다.
가끔씩 가톨릭노동청년회에서 조국의 현실을 전해들으며 답답해 하는 정도였던 그를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도록 만든 것은 ‘80년 5월의 광주’. 그는 “독일 방송에서는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너무 많은 사람을 죽여 정권을 잡을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며 “하지만 결국 미국이 전두환을 승인하면서 5공화국 정권이 기정 사실화되자 독일에서도 자연스레 ‘반미’와 ‘반전반핵’을 외치게 됐다”고 말했다. ‘반전반핵’은 당시에는 미국의 한반도 핵무기 철수를 요구하는 민주화 운동가들의 구호였다.
그는 83년 재독한인 5~6명과 함께 재독반전반핵연맹을 결성하고, 매달 본·프랑크푸르트·베를린 등 대도시에서 전두환 정권과 미국을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다. 그는 “광원 등 현지 동료들과 알음알음으로 전개한 운동이어서 ‘유명한’ 윤이상 선생이나 송두율 교수 등은 한두 번 본 것이 전부”라며 겸손해했다. 글·사진 이순혁 기자 hyuk@hani.co.kr
재독 민주화 운동가 원병호(58)씨가 1980년대 독일에서 발행된 민주화 운동 자료들을 가리키며 설명하고 있다.
그는 83년 재독한인 5~6명과 함께 재독반전반핵연맹을 결성하고, 매달 본·프랑크푸르트·베를린 등 대도시에서 전두환 정권과 미국을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다. 그는 “광원 등 현지 동료들과 알음알음으로 전개한 운동이어서 ‘유명한’ 윤이상 선생이나 송두율 교수 등은 한두 번 본 것이 전부”라며 겸손해했다. 글·사진 이순혁 기자 hyuk@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