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협정 60년맞이 평화기행’ 참가자들이 6월29일 충북 영동 노근리 쌍굴다리 학살 현장에서 한국전쟁 당시에 생긴 총탄자국들을 살펴보고 있다. 참가자들은 4박5일 동안 서울 남산 안기부 터에서 제주 4·3 평화공원까지 한국전쟁 관련 현장을 둘러봤다.
정전협정 60년 ‘평화 기행’
7월27일 정전협정 60돌을 앞두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꿔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하지만 ‘평화협정 전환’은 우리만 목소리를 높인다고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미국이나 중국 등 한국전쟁에 참전한 강대국들의 동의가 없다면 현실화하기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국의 경우 일반 시민들은 물론 지식인 사회에서도 한국전쟁이 ‘정전상태’라는 것을 모르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한다. 평화협정 얘기를 꺼내면 “무슨 소리냐. 한국전쟁은 오래전에 끝난 것 아니냐”는 대답이 돌아오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러니 평화협정 전환 주장이 미국 사회에서는 생뚱맞은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는 상황인 것이다. 따라서 한반도에 평화체제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한국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미국이나 중국 사회에도 널리 알릴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지난 6월28일~7월2일 한국에서 진행된 ‘정전협정 60년맞이 평화기행’에 28명의 미국 학자와 박사과정생들이 참여한 것이 눈길을 끈다. 이들이 바로 한국전쟁 관련 내용을 전세계 대학 강의에 포함시키는 캠페인을 지난 3년간 벌여온 ‘한반도 문제를 걱정하는 학자연맹’(ASCK·애스크) 회원들이기 때문이다.
‘애스크’는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이 연두교서에서 북한을 악의 축이라고 지칭한 2002년에 출범했다. 부시 대통령의 호전적 언사로 볼 때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미국 학계에도 퍼졌기 때문이다.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 석좌교수, 존 덩컨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 한국학연구소장 등을 포함한 200여명의 학자들이 참여했다. 상당수는 재미동포 학자들이었다. 이들은 ‘한반도 평화의 날’ 행사를 열고, 미국의 정책 변화를 촉구하는 학술토론회 등을 개최하는 등 한반도 평화를 위한 다양한 학술활동을 벌여왔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60년이 되는 2010년 ‘한국전쟁 관련 내용을 강의에 포함시키자’는 캠페인을 시작해 올해까지 이어온 것이다. 이 캠페인에는 지금까지 미국은 물론 호주와 프랑스, 영국 등 세계 각지에서 70여명의 학자가 동참했다고 애스크 쪽은 밝히고 있다.
이번 ‘평화기행’은 애스크를 포함해 역사문제연구소, 인권재단 사람, 참여연대, 5·18기념재단이 함께 준비했고, 4·9통일평화재단이 후원했다. 국내에서도 김동원 푸른영상 대표,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 유정길 평화재단 기획위원, 이태호 참여연대 사무처장, 정현백 성균관대 교수 등 학자와 활동가들이 참여했다. 애스크로서는 지난 3년간의 캠페인을 결산하면서 ‘그다음 활동’을 모색하는 상황에서 분단 현장을 직접 체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판단이었고, 국내 평화활동단체들은 ‘평화협정 체결 목소리가 남한 내에 국한돼서는 안 된다’는 문제의식이 있던 참이었다. 이들은 이렇게 함께 하는 평화기행이 “오늘까지 계속된 전쟁의 60년과는 다른 길을 만드는 발걸음 하나가 되길 희망한다”고 밝혔다.
‘한국전쟁 가르치기’ 캠페인 진행한
‘한반도 평화 지킴이’ 미국 학자들
분단 현장 체험하며 공감대 넓혀
‘정전협정 현실’ 미국에도 전해야
한반도평화체제 구축 탄력 받아
기행자료 토대로 교육 진행 계획 일정은 살인적이었다. 4박5일 동안, 남산 안기부 터에서부터 파주 적군묘→민통선 스토리 사격장 입구→강화도 디엠제트(이상 6월28일)→경기도 평택 대추리 미군기지 현장→충북 영동 노근리 학살 현장과 평화공원(이상 29일)→경남 거창 양민학살 유적지와 추모공원→광주 민주화운동 유적지(이상 30일)→제주 알뜨르 비행장→강정마을(이상 7월1일)→4·3평화공원(2일)으로 이어지는 강행군을 했다. 이들 현장은 지리상으로 남한 전역을 망라하고 있을 뿐 아니라, 시간상으로도 한국전쟁 이전부터 현재까지를 포괄한다. 행군에 가까운 일정을 소화하면서도 저녁이면, ‘분단과 생명평화’, ‘미군과 한반도 평화’, ‘전쟁과 학살’ 등의 주제로 세미나의 장을 마련해 머리를 맞댔다. 참가자들은 이런 일정을 소화한 뒤 제주 강정마을에서 평화선언을 발표했다. 선언에서 이들은 “한국전쟁이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는 데 공감하면서 “분단의 장벽을 허물고 증오를 종식시킬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할 것”을 다짐했다. 평화행진을 마친 참가자들은 이번 평화기행이 앞으로 미국 내 평화활동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미국 리버사이드 캘리포니아대학에서 비교문학을 가르치는 정유정 교수는 “혼자서는 전혀 엄두가 나지 않는 일정”이라며 “마치 극장에 들어가 한꺼번에 영화 10편을 본 것 같다”고 기행 참가 소감을 밝혔다. 시카고대학에서 브루스 커밍스 지도로 한국사 박사과정에 있는 김혜영씨는 “책으로는 많이 읽어봤지만 실제로 와서 보니 더욱 실감이 난다”고 말했다. 애스크에 과학자로서는 유일하게 참여하고 있는 이승헌 버지니아대 교수는 “한사람 한사람의 생명이 소중함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됐다”며 “이번 기행 참가로 얻은 것은 전쟁은 정말 다시는 없어야겠다는 것”이라고 밝혔다. 기행에서 얻은 자료를 어떻게 교육에 활용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 고민도 이어졌다. 뉴저지주 럿거스대학에 재직중인 김수지 교수는 이번 기행에 대해 “국내외에서 같이 고민하는 사람들이 함께한다는 데 의의가 큰 것 같다”며 “평화기행을 통해 얻은 구술자료들이나 동영상을 교육에 어떤 식으로 활용할지 고민할 예정”이라고 평가했다. 내년에는 좀더 발전적으로 기행을 꾸리자는 의견들도 나왔다. 기행의 기획자 중 한명인 서재정 존스홉킨스대 교수는 올해 기행에 대해 “정부 지원에 의존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진행할 수 있었다는 것은 평가할 만한 일”이라며 “분단 현장에서 적대감 고취가 아니라 평화를 되돌아보게 하는 이번 여행을 대상을 더욱 넓혀서 정례화했으면 한다”고 밝혔다. 미국뿐 아니라 유럽 등지에서 한국학을 연구하는 학자나 학생들도 참여시켰으면 하는 바람을 나타낸 것이다. 글·사진 김보근 한겨레평화연구소장 tree21@hani.co.kr <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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