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도교육청 ‘선상 무지개학교’에 참가한 한국·중국 중학생들이 지난달 27일 목포해양대 실습선을 타고서 독도경비대원들에게 격려 편지를 전달하려고 쪽빛 동해 바다에 우뚝 솟은 독도로 가고 있다. 전남도교육청 제공
[현장 쏙] 전남 선상무지개학교의 3주일
앳된 얼굴의 한국·중국 중학생 200여명이 뱃길로 한국·일본·중국을 오가는 ‘선상 무지개학교’에 참가했다. 꿈나무들이 포부를 바다처럼 키우는 기회를 주자는 전남도교육청의 프로그램이다. 여름 바다 위 3주 동안 이들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지난 4일 오전 일본 나가사키시 야마자토 소학교 교정을 찾은 한국·중국 중학생들이 술렁거렸다. 68년 전 미군의 원자폭탄에 쑥대밭이 된 학교 사진들은 처참했다. 김재헌(14·전남 장흥중 2)군은 “왜 이렇게 많은 아이들이 죽어야 했나요”라고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2차대전 막바지인 1945년 8월9일 오전 11시2분 나가사키에 투하된 플루토늄 원자폭탄은 엄청난 재앙을 몰고 왔다. 당시 나가사키 인구 24만명 가운데 7만3884명이 숨지고 7만4909명이 다쳐 인구의 62%가 피해를 봤다.
우리의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이 학교는 원폭 낙하 중심지(그라운드 제로)에서 불과 600m가량 떨어져 있다. 미군 공습 때문에 학생들이 등교하지 않은 상황인데도 재학생 1600명 가운데 1300명이 목숨을 잃었다. 핵폭발이 학생들의 거주지 일대를 덮쳤기 때문이다.
학교 안에는 전쟁의 비참함과 평화의 소중함을 알려주는 상징물이 여럿 있었다. 당시 파놓은 방공호 3개, 원폭자료실, 평화의 종 등이 당시 참상을 대변하는 듯했다. 어린 소녀의 얼굴이 새겨진 기념비는 살아남은 이 학교 어린이들이 죽은 친구들을 그리워하는 애틋한 마음을 담아 세웠다.
학교를 둘러본 한국 중학교 2학년 학생 216명, 중국 중학생 10명은 자신보다 더 어린 나이에 불덩어리 속에서 생을 마감한 희생자들을 떠올리며 숙연해졌다. 심은경(곡성 옥과중)양은 “정말 충격이에요. 친구와 가족들한테도 말해줄래요”라고 했다.
학교를 방문하기 전날도 학생들은 원폭 낙하 중심지 부근의 평화기념상과 원폭자료관, 조선인희생자 추도비 등을 순례하면서 원자폭탄 한 발이 몰고온 엄청난 참상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원폭자료관 안의 고열로 녹은 손가락뼈, 숯덩어리가 된 아이들의 도시락, 폭발 시간을 가리킨 채 멈춘 부서진 벽시계…. 학생들은 자신과 비슷한 나이에 이곳까지 강제로 끌려와 난데없이 원폭을 맞고 숨진 한국인 희생자들의 운명을 특히 가슴 아프게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외교관을 꿈꾸는 이지수(광양 옥곡중)양은 “히로시마나 나가사키 같은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평화로운 지구를 만드는 데 힘을 보태고 싶다”고 말했다.
중국 항저우 위화친친학교에 다니는 여학생 왕민란은 나가사키의 학교·공원·성당 등 거리 곳곳을 수놓은 ‘종이학’이 인상적이라고 말했다.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지 10년 뒤 방사능 후유증인 백혈병으로 숨진 소녀는 1000마리의 학을 접으면 병이 나을 것으로 믿었지만 결국 600마리를 접고서 생을 마감했다. 이후 일본 국민들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평화를 기원하며 종이학을 접어 보내고 있다.
학생들을 인솔한 강상철 교사(나주 남평중)는 “일본이 주로 원폭 피해를 부각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이런 상황을 초래한 책임과 과거의 반성을 뚜렷하게 드러내지는 않는 것 같다. 진정한 평화는 성찰로부터 시작되는 것 아니겠나”라고 말했다. 김재헌군은 “일본이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아이들도 죽지 않았을 텐데요. 나라가 엉뚱한 짓을 하면 힘없는 국민이 피해를 보게 되는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나가사키에서 평화순례를 벌인 이들은 7월21일~8월10일 3주 동안 전남도교육청이 연 ‘선상 무지개학교’의 중학생들이다. 국제항로 1071마일과 연안항로 844마일을 합쳐 1915마일(3546㎞)의 항해를 하며 평화를 배우고 새로운 자연과 문화를 만났다.
학생들은 전남 해남군 송호학생수련장에서 3박4일 적응교육을 마친 뒤, 국립 목포해양대의 실습선 4700t급 새누리호와 3500t급 새유달호를 타고 항해를 시작했다. 7월24~29일 5박6일은 울릉도·독도를 찾았고, 8월1~10일 9박10일은 일본의 나가사키와 중국 산둥성 스다오를 방문했다.
“세상이 넓다는 걸 느꼈어요”
“우리가 크면 평화롭게 지낼래요” 독도, 일 나가사키, 중 스다오…
전쟁 참상과 낯선 문화를 만난
226명, 20일간의 ‘성장 여행’ 전남선상학교, 돛 올린지 3년
예산에 비해 내용 미흡 지적도 같은 배에 탄 한·중 학생들은 국경을 넘은 우정을 나눴다. 학생들 사이에서, 동북아시아를 덮고 있는 역사분쟁이나 영토분쟁의 그림자를 찾아볼 수는 없었다. 김인수(순천 이수중)군은 “중국 학생들이 국제학교를 다녀서 그런지 영어도 잘하고 그림이나 글씨 솜씨도 뛰어난 것 같다”고 말했다. 중국 남학생 궈자오이도 “만나보니 중국과 한국, 일본 사람들이 별로 다르지 않다. 청소년들이 한배를 타는 기회를 자주 만들면 장래엔 평화롭게 지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 여교사 류징은 “한국 학생들이 규칙을 잘 지키고, 수업과 놀이 등 못하는 것이 없어 놀랍다. 중국 학생들한테 자극이 많이 된 것 같다”고 했다.
우정을 쌓은 한·중 학생들은 지난 8일 스다오항에서 헤어질 때는 서로 부둥켜안고 울먹이며 이별을 못내 아쉬워했다. 외국 학생은 애초 전남과 자매결연을 한 중국 저장성에서 10명, 일본 사가현에서 10명이 참가할 예정이었는데, 일본 학생들은 독도 일정을 문제삼아 동참하지 않았다.
실습선이 한반도 주변 푸른 바다를 거침없이 내달리는 동안 학생들은 갖가지 체험학습과 동아리 활동을 펼쳤다.
항해 당직 체험, 외국어 학습, 갑판 플래시몹, 유시시(UCC) 제작, 풍등 날리기, 일본·중국 알기 등…. 뱃멀미에 시달리고 한여름 뙤약볕에 얼굴이 검게 그을렸지만, 항해를 끝낸 학생들의 얼굴에는 ‘해냈다’는 뿌듯함이 넘쳤다. 지리산 자락에서 자란 조형규(구례동중)군은 “배 안이 비좁고 불편했어도 즐거웠다. 세상이 넓다는 걸 느꼈다”며 웃었다. 건축가가 되고 싶다는 김민준(함평중)군은 “목조 건축에 관심이 많아요. 일본과 중국의 건물들을 꼼꼼히 볼 기회였네요”라고 말했다.
배 위에서 함께 보내는 시간은 학생들한테 ‘한배에 탄 운명공동체’라는 점을 수시로 환기하게 했다. 성적 우수, 품행 모범, 사회 배려 등 세 부문으로 나눠 선발된 학생들이 성향 차이를 내보일 수도 있었지만, 서로를 배려하며 허물없이 녹아들었다.
항해 도중 바다의 생명을 가까이서 느낄 수 있는 행운도 있었다. 지난달 27일에는 독도 해역에서 유영하는 40여마리의 돌고래 떼를 만났다. 임영서(15·완도 금일중)양은 “돌고래들이 빠르고 멋지게 헤엄치던 모습이 생생하다”고 말했다. 지난 2일엔 나가사키 부근에서 날치가 갑판으로 날아들어 아이들을 들뜨게 만들었다.
박정수 선상 무지개학교 교감은 “학생들이 서로를 존중하는 시간을 보내면서 부쩍 성장한 것 같다”며 대견스러워했다.
전남도교육청은 2011년부터 네 차례 선상 무지개학교를 열었다. 참가한 학생은 764명이다. 다른 지역에서 보기 어려운 파격적 지원과 새로운 방식 덕분에 학부모, 교사, 학생들 사이에 갈수록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예산을 많이 들이는 데 견줘 주제와 프로그램이 미흡하다는 비판이 잦아들지 않는다. 선상학교 운영에는 2011년 22억원, 2012년 17억원, 올해 15억원이 들어갔다. 올해만 보면 학생 1명당 600만원 넘게 쓴 셈이다. 국회 국정감사에서도 돈을 들인 만큼 성과가 있는지 내놓으라는 지적이 나오곤 했다. ‘예산이 적지 않은 만큼 글로벌 리더 양성처럼 주제가 두루뭉술해서는 안 된다. 주제와 동선은 구체적으로 짜고, 국제 프로그램을 제대로 준비하라’는 지적이 잇따른다.
장만채 전남도교육감은 “30~40년 뒤 한국과 전남을 이끌 인재를 양성하려는 특수시책이다. 다른 지역에서도 부러워한다. 예비 인재들이 세상을 보는 안목을 넓히고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기를 수 있다면 투자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말했다.
지난 1일 목포를 출항한 실습선들은 2일 일본 나가사키, 6일 중국 스다오에 기항한 뒤 10일 목포로 무사히 돌아왔다.
나가사키/안관옥 기자 ok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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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상 무지개학교에 참가한 한국·중국 중학생들이 지난달 23일 전남 해남군 송호학생수련장에서 임해 적응 교육을 받고 있다. 전남도교육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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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중학생들이 그림과 문장 솜씨를 발휘해 한국 친구들을 향한 우정을 표현하고 있다. 전남도교육청 제공
선상 무지개학교에 참가한 한국·중국 중학생들이 지난 2일 일본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곳(그라운드 제로) 부근 평화공원에서 ‘핵도, 전쟁도 없는 세상’을 기원하고 있다. 나가사키/안관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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