펀드 조성 명목으로 계열사 자금 수백억원을 빼돌린 에스케이(SK)그룹 최태원(53) 회장 형제의 횡령 사건을 가까이서 지켜본 한 변호사는 ‘막장 드라마’라고 한마디로 꼬집었다. 최 회장과 최재원(50) 부회장의 계속된 진술 번복부터, ‘심부름꾼’ 김준홍(48) 전 베넥스인베스트먼트(베넥스) 대표에게 덮어씌우기, 횡령 배후 인물인 선물투자자 김원홍(52)씨에게 속았다는 주장까지, 대기업 총수 주변에서 일어난 거짓·사기·배신의 드라마가 6개월간의 항소심 과정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서울고법 형사4부(재판장 문용선)는 27일 이들 형제에게 실형을 선고하면서 2시간여에 걸쳐 이들을 질타했다.
■ 대형 로펌이 조직적 위증 꾸며 수사 과정과 1심 재판에서는 국내 1위 로펌인 김앤장 법률사무소가 이들 형제의 변호를 맡았다. 검찰 수사가 시작되자 김앤장 변호사, 에스케이 법무실 변호사 등이 모여 대책회의를 열었다. 여기서 최 회장과 최 부회장은 범행에 전혀 관여하지 않은 것으로 말을 맞췄다. 김준홍 전 베넥스 대표가 에스케이 실무진을 설득해 펀드를 조성·선지급을 했고, 그와 김원홍씨 사이에서 송금이 이뤄진 것으로 ‘스토리’를 짰다. 김준홍 전 대표는 변호사들의 지시에 따라 진술했다.
수사 중반에 이르러 최 부회장이 모든 것을 떠안는 쪽으로 변호 전략이 바뀌자 김 전 대표는 이에 맞춰 말을 또 바꿨다. 지난해 11월 1심 법정에서 최 부회장은 “사실은 내가 한 일이라고 형에게 고백했다”고 말했고, 최 회장은 “그 말을 듣고 당황스러웠다. 위기를 기회로 삼으라고 충고했다”며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1심에서 이들 전략과 정반대로 최 회장에게 유죄, 최 부회장에게 무죄가 선고됐다. 최 회장은 변호인단을 국내 2위 로펌인 법무법인 태평양으로 교체했다. 두달여 뒤, 형제는 항소심 첫 공판에서 “1심 진술은 허위자백이었다”며 무죄를 주장했다. 최 회장은 그룹 경영을 위해 펀드를 조성한 것은 맞다고 인정했다. 특히 최 부회장은 180도 말이 바뀌어 “1심 허위자백은 형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며 결백을 주장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재계 서열 3위 에스케이그룹 회장·부회장을 변호하는 변호인들이 어떻게 무죄인 피고인 최태원을 보호하기 위해 무죄인 동생이 허위자백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인지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다”고 위증 전략을 짠 변호인단과 형제를 비판했다.
재판부는 또 “피고인들의 지시로 계열사 임원들이 위증하게 했다. 진실과 허위를 넘나들며 진실을 기망하고, 수사기관과 법원을 조종한다는 태도를 보였다. 과연 피고인들에게 규범의식이 있는지 의심된다”고 꾸짖었다. 서울의 한 부장판사도 “검찰이 제시한 증거의 신빙성을 탄핵하는 정도가 아니라 실체적 진실 자체를 왜곡하는 변호를 하는 것이 과연 변호사 윤리에 맞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 사기와 농락의 아이콘 김원홍? 항소심 재판 과정에서는 베일에 싸여 있던 김원홍씨의 모습이 조금씩 드러났다. 최 회장 쪽이 제출한 이른바 ‘김원홍 녹취록’을 보면, 김준홍 전 대표는 최 회장을 ‘T’라고 부르면서도 김씨에게는 ‘회장님’이라는 호칭을 썼다. 김원홍씨는 자신보다 1살 많은 최 회장에게 반말을 쓰고, 최 회장 형제는 김씨에게 깍듯한 존댓말을 사용했다. 일반인이 선뜻 이해하기 힘든 관계임을 짐작하게 했다.
재판부는 이날 김원홍씨의 인간됨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다. 재판부는 “에스케이 직원이 쓴 김원홍에 대한 보고서 등을 보면, 김원홍은 탐욕스럽고 기만과 술수에 능하며, 사시·행시 합격자 등 제자가 300명 이상이라거나 지금이라도 5대 그룹 회장 자리는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다는 등 허무맹랑하고 자기과시하는 인물이다. 범행을 저지르고 중국 등으로 도피한 뒤에도 수사와 재판에 여러 방법으로 관여해 최태원·재원 및 김준홍을 조종했다”고 말했다.
최 회장은 “그동안 김원홍씨에게 6000억원대의 사기를 당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1998년부터 알게 된 김씨가 주가·환율 등에 정통하고 그에게 투자하면 수익을 크게 불려줘 그를 믿고 투자를 해오다 어느새 그에게 속았다는 것이다. 최 회장은 김씨를 사기 혐의로 고소도 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용도(선물투자)에서 속았다고 주장하면 횡령을 시인하는 꼴이 되니, 엉뚱한 것으로 속았다고 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 형제에게 당한 배신 김준홍 전 대표는 자신이 믿고 따랐던 최 회장 형제한테 항소심 과정에서 배신을 당했다. 최태원·재원 형제와 김원홍씨를 한몸으로 보고 일했는데, 항소심에 이르러서 보니 회장과 부회장은 딴소리를 하고 김원홍씨는 도망가고 없는 꼴이 됐다. 그는 항소심 4번째 재판에서 “그동안 안이한 판단으로 사실대로 말하지 못한 부분이 많아 후회된다.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고 고해성사하는 심정으로 진실만 얘기하겠다”며 “최재원 부회장의 지시로 김원홍에게 송금을 했고, 송금의 결정권자는 최태원 회장으로 알고 있었다”고 진술했다. 형제의 항소심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다.
그럼에도 최 회장 형제는 다시 반전의 기회를 노렸다. 항소심 중반에 이른바 ‘김원홍 녹음파일’을 증거로 제출했다. 1심 재판 중이던 지난해 7월 보석으로 나온 김준홍 전 대표에게 최 부회장이 명의를 알 수 없는 휴대전화를 줬다. 곧 김원홍씨가 이 휴대전화로 전화를 걸어와 “두 형제는 송금을 몰랐고 너랑 나랑 한 거잖아”라는 말을 반복했다. 또 이 무렵 김원홍씨와 최 부회장이 나눈 통화내용 중 김원홍씨가 최 부회장에게 “자기(김준홍 전 대표)가 살려면 둘(최태원 회장 형제)을 물고 늘어질 수밖에 없는 거지, 사람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면 안 되지”라고 말하는 육성이 법정에 공개됐다. 최 부회장 역시 김원홍씨의 말에 동의하는 듯했다. 법정에서 이를 듣고 있던 김준홍 전 대표는 감정에 북받친 듯 흐느껴 울기도 했다. 지난달 27일 결심공판 때 김 전 대표는 “최태원을 보호하기 위해 대책회의에서 나의 개인거래로 주장하기 위한 자료를 만들었는데, (최 회장 형제가) 그것을 (근거로) 항소심에서 내가 했다는 걸로 저를 공격하고 있다”며 억울한 감정을 드러냈다.
하지만 녹취록도 결국 소용없었다. 재판부는 “대화의 시기, 녹음한 의도, 녹취록 제출 이유, 김원홍의 인간됨을 비롯해 내용 자체가 논리적으로 모순되는 점 등을 보면, 최태원·재원의 주장에 부합하는 김원홍의 진술은 도저히 신빙성이 있다고 볼 수 없다”고 말했다.
재판부는 항소심 재판 과정에서 김준홍 전 대표에게만 모두 80여시간을 들여 신문할 정도로 그의 진술을 집요하게 파고들었고, 결국 김 전 대표의 말에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이경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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