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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돈 넣으면 촬영 잡혔단 문자”…‘기획사 상납’ 울며 겨자먹기

등록 2013-09-30 20:26수정 2013-10-01 15:44

2011년 방영된 <한국방송>(KBS) 드라마 <근초고왕>에 출연한 보조출연자들이 전남 나주 촬영장에서 맨땅에 앉아 밥을 먹고 있다. 전국보조출연자노조
2011년 방영된 <한국방송>(KBS) 드라마 <근초고왕>에 출연한 보조출연자들이 전남 나주 촬영장에서 맨땅에 앉아 밥을 먹고 있다. 전국보조출연자노조
엑스트라 쥐어짜는 드라마 왕국 ② 기획사의 무한권력

지난해 10월5일 서울 남부지방법원 법정에서 권아무개(49·여)씨는 고개를 떨궜다. 한때 드라마 보조출연자 200~300명을 동원하며 잘나가던, ㅌ기획사의 5지부장이었다. 배임수재 혐의로 기소된 그는 징역 6월에 집행유예 1년, 추징금 621만원을 선고받았다. 권씨는 2006년 11월~2011년 2월 보조출연자 9명으로부터 101차례에 걸쳐 621만원을 상납받은 혐의가 확정됐다. 김용관 재판장은 “피고인이 지부장의 지위를 이용, 열악한 지위에 처한 다수 근로자로부터 금품을 장기간 받은 점을 종합하면 엄벌에 처함이 마땅하다”고 판단했다.

권씨는 이날 권고사직했다. 권씨에게 3년간 상납한 보조출연자 이아무개(64·여)씨가 서울 영등포경찰서에 진정서를 넣은 지 13개월 만이다. 이씨는 처음에 ㅌ기획사 임원한테 상납 사실을 알렸다. 이씨는 권씨의 은행 계좌에 매달 5만원을 이체했다. 한 달 100여만원을 버는 그에겐 큰 액수였다. 하지만 임원은 “그건 회사랑 아무 관련이 없다. 준 사람과 받은 사람 사이의 문제일 뿐이다. 돈이 필요하냐?”고 말했다. 이씨는 경찰서를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상납을 해야 일을 많이 준다’는 소문이 보조출연자들 사이에 파다하지만, 권씨처럼 상납을 받다 유죄판결을 받은 경우는 처음이었다.

지부장·반장이 출연 여부 좌우
연기력보다 술·밥 사야 일 받아
욕설 등 모욕감 줘도 침묵할 뿐
불만 표출했다간 찍혀 발 못붙여
“일 안주겠다” 노조 활동도 압박

엑스트라 세계에서 기획사의 지부장과 반장 등은 ‘무한권력’이다. 지부장은 보조출연자들의 출연 여부를 결정하고, 반장은 현장에서 이들을 지휘한다. “보조출연자들은 배우들과 달리 경력이 오래돼도 연기력 같은 실력으로 구분해주질 않아요. 그러니 출연을 결정하는 지부장과 반장의 영향력이 셀 수밖에 없죠.” 이씨는 “남들도 돈을 바치니까 나도 그렇게 사는 게 맞는 줄 알았다. 돈 넣으면 지부장에게 촬영이 잡혔다는 문자메시지, 즉 약발이 바로 오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했다.

10년차 경력의 보조출연자 ㄱ씨는 상납 대신 술이나 밥을 산다. ㄱ씨는 “지부장, 반장과 가까워져야 일을 많이 받는다. 나보다 소득이 많은 반장, 지부장과 밥을 먹어도 월급 120만원인 내가 계산하게 돼 있다”고 했다. 보조출연자 ㄴ씨는 “반장에게 잘 보이거나 음식을 제공하면 일이 많이 들어온다. 치사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했다.

내부 고발에 나선 이씨는 생계에 타격을 받고 있다. ㅌ기획사뿐 아니라 다른 기획사에서도 이씨에게 일을 주길 꺼리고 있다. 이씨는 오래 일해도 전문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보조출연 대신 잠시 단역배우로 나서보기도 했다. 하지만 더 힘들었다. 보조출연자에겐 단체버스·단체숙식 등이 제공되지만, 단역배우에게는 그마저 없었다. 혼자 촬영장을 찾아가야 하고 출연 기회는 더 드물었다. 이씨는 “반장들이 내 눈을 쳐다보지 않고 피해요. 이상한 사람이 돼버린 거죠. 내부 고발을 한 걸 후회한다기보다는 다른 방법이 있지 않았을까, 요즘은 그런 생각이 들어요”라며 씁쓸해했다.

‘기획사에 찍히면 끝’이라는 말은 엑스트라 세계의 불문율이다. 기획사는 불만을 표출한 보조출연자를 철저히 찾아내 출연기회 자체를 빼앗아버린다. <한겨레>가 최근 보조출연자들이 <한국방송>(KBS) 드라마 <칼과 꽃> 촬영장에서 부당한 차별을 받았다고(8월14일치 12면) 보도한 뒤에도 내부고발자 색출이 이뤄졌다. 당시 인터뷰에 응했던 ㄷ씨는 “기사가 나간 뒤 반장이 내부고발자가 누군지 묻고 다닌다”며 두려워했다. 제작사 소속의 조연출도 “더러운 물에 맞고 촬영했다고 제보한 보조출연자가 대체 누구냐”고 <한겨레>에 취재원을 알려달라고 요구했다.

방송사로부터 제작사와 기획사를 거쳐 보조출연자로 이어지는 다단계 갑을 구조에서, 보조출연자는 갑으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고도 호소할 길이 없다. “기획사 반장, 제작사와 방송사의 감독과 조감독이 제게 한 욕을 생각하면 울화통이 터져요. 새파랗게 어린 애가 ‘저 ××놈의 ××’라고 말한 거 생각하면…어우, 돈만 있으면 지금이라도 고소하고 싶어요.”

보조출연자 일을 그만둔 ㄹ씨는 1년 전 일을 떠올리며 분통을 터뜨렸다. ㄹ씨의 기억은 듣는 이까지 모욕감을 느끼게 했다. “촬영 중 대기하고 있는데 기획사 관계자가 와서 ‘돼지 같다’며 제게 동전을 던지고 간 적도 있어요. 배우 ㅇ씨는 저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드라마 쪽으로는 없어 보이는 얼굴’이라고 모욕했고요. 영화 촬영장에서 물 한 병을 마시려고 보조출연자 수십명이 달려들자 기획사 팀장이 ‘저 꼴 봐라’ 하면서 웃던 장면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기획사들은 이른바 ‘찍힌 보조출연자’가 누군지 정보를 공유해요. 저도 그 가운데 한명이었고요.”

그가 일을 그만둔 건 ‘화장실 냄새’ 때문이었다. “하루는 촬영을 마치고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 안 좋은 냄새가 나는 겁니다. ‘노숙인이 탔나?’ 하고 주변을 둘러봤죠. 노숙인은 없었고, 위쪽 선반에 올려둔 제 가방에서 나는 냄새였습니다.” 보조출연자들은 탈의실이 제공되지 않아 주로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기 때문에 가방에 화장실 냄새가 밴 것 같다고 ㄹ씨는 말했다.

노조 활동도 압박을 받는다. <한국방송> 드라마 <각시탈> 차량 전복 사고로 보조출연자가 사망한 이후인 지난해 7~12월 ㅌ기획사 소속 노조원 41명이 보조출연자노조를 탈퇴했다. 탈퇴자 41명 가운데 26명의 탈퇴 사유는 “일을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불이익을 당하여 형식상 임의 탈퇴’, ‘조합원에게 일 주지 말라는 지시 때문에’, ‘여기에 계속 있으면 일이 끊기게 되어 탈퇴를 신청합니다’라고 탈퇴 노조원들은 적었다. 노조는 탈퇴 조합원들이 기획사로부터 일을 받게 하기 위해 탈퇴자 명단을 기획사에 보냈다.

ㅌ기획사의 이아무개 회장은 “노조원이라는 이유로 차별한 적이 없다. ㅌ기획사 소속 보조출연자 가운데 노조원은 10여명”이라고 말했다. 전국보조출연자노조 조합원은 1700여명이며, 업계 매출 1위로 알려진 ㅌ기획사 소속 보조출연자는 2만여명이다.

박유리 기자 nopimuli@hani.co.kr


“이대로 살 수 없다”…‘새벽 결의’로 만든 노조

땡볕에 목 타도 물 안주고
남녀 등만 돌린 채 탈의
아무데서나 대소변 보게
촬영 마치고 서울 와 ‘폭발’
결성 2년여만에 합법성 인정

“어찌 백주 대낮에 남녀가 분명하고 서너 살 어린아이부터 나이 지긋한 70살 노인까지 있는데 어미아비도 없는지 다 같이 싸잡아 ‘개××’ ‘소××’ 할 수 있는 건가. 언어폭력은 물론 예사로 반말이다. 목이 타들어가도 물을 달라 하질 못한다. 몇 백명이 다 벙어리다. ‘지금 물 좀 주세요.’ 일사병에 전부 쓰러질 지경이라 누군가 용기 내서 소리친다. 행렬은 길었고 앞에서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나중에 준다니까!’ 앙칼진 목소리다. 소름 끼치도록. 열사병으로 결국 사람이 쓰러졌는데 지랄병이란다.”

여성 보조출연자 ㅇ(50)씨는 2006년 <한국방송>(KBS)이 방영한 드라마 <서울 1945> 촬영장에 대해 이렇게 썼다. 2011년 12월 한국비정규노동센터가 주관한 제1회 비정규노동수기 공모전에서 우수작으로 뽑힌 글이다. 당시 촬영 현장은 ‘열악함’을 넘어 날것 그대로의 ‘인권침해’ 현장이었다. 천막 탈의실도, 간이 화장실도 없었다. 남녀 구분 없이 서로 등만 돌린 채 옷을 갈아입었고 아무데서나 대소변을 봤다고 한다.

결국 보조출연자들의 분노는 폭발했다. 2006년 9월8일, 보조출연자 50여명이 경남 합천 촬영장에서 <서울 1945>의 전쟁 장면을 찍고 돌아와 서울 여의도 한국방송 별관 로비에서 목소리를 높이던 때는 새벽 2시였다. 보조출연자 100여명 중 50여명의 촬영이 끝났는데도 기획사 반장은 3시간을 대기해야 서울행 버스를 출발시키겠다고 했다. 3시간 임금은 당연히 주지 않겠다고 했다. 항의 끝에 버스를 타고 올라온 보조출연자들은 울분을 토했다. “이렇게 살 수 없다.” “국회로 가자.” “문화관광부에 엑스트라 실상을 알리자.”

하지만 단 한번도 자신의 권리를 주장해보지 못했던 사람들은 분노만 터뜨릴 뿐 권리를 찾을 방법을 알지 못했다. 그때 누군가 말했다. “우리도 노조를 만들자!” 여기저기서 “옳소!” 소리가 터져나왔다. 다음날 50여명 가운데 8명이 노조를 만들기 위해 자발적으로 모였다. 이들은 여의도에 있는 한국노총을 찾아가 노조를 설립했고 3일 만에 고용노동부에서 노조 설립신고필증을 받았다.

노조를 만드는 일은 고통스러웠다. 우선 돈이 없었다. 문계순(58·여) 위원장은 2006년 영화 <황진이>에 비구니로 출연해 머리를 깎은 대가로 받은 250만원을 모두 기부했다. 노조는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에 보증금 100만원, 월세 20만원짜리 방을 사무실로 얻을 수 있었다.

당시 법은 이들을 노동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중앙노동위원회가 2008년 12월 서울지방노동위원회의 결정을 뒤집고 보조출연자들의 부당노동행위구제 신청을 받아들이면서 단체교섭권을 인정했다. 2009년 3월에는 기획사 4곳과 단체협약을 정식 체결했다. 노조 결성 2년6개월 만의 성과였다.

박유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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