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조출연자 곽아무개(55)씨는 드라마를 찍다 이를 다쳤다. 고려대 구로병원은 ‘하악 4전치 치아 아탈구. 변색·괴사의 가능성이 있으므로 추후 신경치료와 보철치료가 필요할 수 있음’이라고 진단했다. 지난 1~4월 방영된 <에스비에스>(SBS) 드라마 <야왕> 촬영 때 사고가 났다. 교도관 역을 맡았던 곽씨는 배우 권상우(37)씨를 제압하는 장면을 찍다 사고로 권씨의 팔꿈치에 맞았다. 지난 1월30일 오후 5시께 전북 전주에 있는 야외세트장에서 일어난 일이다. 그는 입안에 흐르는 피를 삼키며 촬영을 마쳤다.
‘착한 권상우, 200만원 쾌척한 사연’, ‘의리파 권상우, 부상당한 보조출연자에게 위로금 지급’…. 권씨가 곽씨에게 위로금 200만원을 줬다는 미담기사가 인터넷에 퍼져갔다. 곽씨가 어떻게 부상을 당했는지, 치료는 어떻게 받았는지는 인터넷 언론의 관심 밖이었다. 곽씨는 여태 시큰거리고 흔들리는 이 탓에 딱딱한 음식을 씹을 때마다 고생하고 있다.
곽씨는 사고 뒤 기획사의 ㅎ반장에게 진단서를 냈다. 그는 “제작사에서 연락이 갈 것”이라고 했지만 함흥차사였다. 참다못한 곽씨는 기획사를 찾아갔다. 기획사 쪽은 “우리로서는 해줄 수 있는 게 없다”고 말했다. 제작사도 기획사와 맺은 공급계약서를 전국보조출연자노조에 내보이며 책임이 없다고 밝혔다. 기획사·제작사·방송사 등이 두달 넘게 책임 공방을 벌였다. 제작사 관계자는 지난 4월1일 곽씨를 불러 권씨가 내놓은 200만원을 주면서 서약서를 내밀었다.
서명했지만 치료비 부족하다 판단
산재 신청하자 “이미 보상 끝났다”
‘괘씸죄’에 일감도 안줘 생활 막막”
산재보험 가입 않는 기획사 많고
엑스트라들도 ‘찍힐라’ 부상 쉬쉬
“사과조차 못받는 현실이 서글퍼”
“권상우씨는 자신이 위 업무상 재해에 대하여 아무런 과실이나 법적 책임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선의에 의하여 본인에게 치료비 내지 위로금조로 200만원을 지급하여 주시기로 하였습니다. 본인은 권상우씨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표시하기 위하여 본 서약서를 작성하여 권상우씨에게 전달하고자 하며 나아가 앞으로 권상우씨에 대해서는 물론 다시는 제작사나 방송국에 어떤 요구도 하지 않을 것임을 서약합니다.”
곽씨는 서약서에 이름과 주민등록번호, 주소와 휴대전화 번호를 적고 도장을 찍었다. 제작사는 ‘친절한 상우씨 훈훈한 정성, 뒤늦게 알려져’라는 제목으로 다음날 보도자료를 뿌렸다. “촬영현장에서 부상을 입은 보조출연자는 자신과 고용계약을 맺은 용역 공급업체로부터 산업재해 보상을 받는다. 권상우는 개인적 차원에서 추가로 부상자를 위로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권상우씨가 ‘추가로’ 보상을 한 게 아니었다. 곽씨가 받은 것은 200만원이 전부였다. 이 돈으로는 치아 4개를 뽑고 임플란트를 할 수 없었다. 곽씨는 근로복지공단에 산업재해를 신청했다. 근로복지공단은 지난 5월22일 곽씨 부상을 산재로 승인하면서 권상우씨에게 구상권을 청구했다. 근로복지공단 관계자는 “산업재해보상보험법 87조를 보면, 보험가입자인 둘 이상의 사업주가 같은 장소에서 사업을 하다 사업주를 달리하는 근로자의 행위로 재해가 발생하면 (재해를 유발한) 제3자가 손해를 배상해야 하므로 공단은 권상우씨에게 구상권을 청구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다만 이 관계자는 “치료비가 200만원 이하로 인정되므로, 곽씨가 권상우씨로부터 이미 받은 200만원 이외에 더는 지급할 게 없다”고 밝혔다.
보조출연자노조는 근로복지공단의 결정에 당황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노조 쪽은 “저임금을 받는 단역 배우들도 많은데 보조출연자가 배우에 의해 부상을 당할 때마다 구상권이 배우에게 청구되면 보상을 받기 어려워지지 않겠냐. 이는 보조출연자를 관리하는 기획사에 면죄부를 주는 결정”이라고 설명했다.
결국 곽씨는 치료를 포기했다. 곽씨는 “나중에 치아가 변색되거나 빠질 것이 염려되지만 이미 권상우씨에게 각서를 썼기 때문에 더는 치료를 요구할 수 없다. 당시 권상우씨도 자신 책임이 아니라 보조출연자를 동원하는 기획사 책임으로 알고 있던 가운데 선행을 베푼 것이기에 고맙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보조출연자들은 곽씨처럼 촬영 중 부상을 당해도 보상받기가 쉽지 않다. 기획사·제작사·방송사는 서로 책임을 미루고, 보조출연자들도 기획사 눈치를 보느라 스스로 산재 신청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산재보험 가입률도 낮다. 영화진흥위원회가 지난 4~6월 보조출연자 4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산재보험 가입률은 33.71%에 그쳤다.
지난해 <한국방송>(KBS) 드라마 <각시탈> 촬영 때 차량 전복 사고로 보조출연자 박희석씨가 숨지자 고용노동부는 처음으로 소송 없이 산업재해를 인정했다. 그러나 <각시탈> 사고 차량에 탔던 보조출연자 30여명 가운데 고 박희석씨 외에 산재 신청을 한 보조출연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사고 차량에 함께 탔던 보조출연자 ㄱ씨는 갈비뼈 골절로 전치 5주 진단을 받았다. “박희석씨 유가족도 오랜 시간 투쟁해서 산재 인정을 받았는데 그걸 누가 하겠어요? 사람들이 침묵하는 이유도 그런 것 때문이고…. 분신하면서 처우 개선을 요구할 수도 없는 거잖아요. 그냥 넘어갔으면 했어요. 잊어버리려고 노력한 거죠.”
보조출연자 ㄴ씨는 <각시탈> 교통사고로 전신 타박상을 입기 2년 전, <에스비에스> 드라마 <대물> 때도 차량 전복 사고로 무릎 인대 파열 부상을 입었다. 2010년 9월2일 보조출연자를 태운 차량은 전남 담양에서 서울로 돌아오다 빗길에 미끄러져 뒤집혔다. ㄴ씨는 지금도 박희석씨가 차량 유리창 밖으로 튕겨 나가는 장면이 자꾸 떠올라 버스만 봐도 심장이 두근거리고 땀이 난다고 했다. ㄴ씨가 당한 두차례 사고는 모두 같은 기획사에 소속됐을 때 일어났다. 기획사로부터는 위로의 말도, 위로금도 없었다. 전세버스 회사에서 몇백만원의 치료비 등을 내줬을 뿐이다.
그는 <각시탈> 사고 이후 박희석씨 추모제에 참석하고 <야왕>에서 부상을 당한 곽씨와 함께 기획사에 항의하기도 했다. 그는 “각시탈 사고 이후 기획사에 찍혀서 일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저보다 부상이 심각한 보조출연자도 많았지만 회사 쪽은 ‘산재는 생각도 말라’고 했어요. 회사가 괘씸하다기보다 사과조차 못 받는 우리 위치가 서글펐어요. 인간으로서 대접을 못 받는 것,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는 것 말입니다.”
박유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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