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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갑질’ 기획사 반장, 감독엔 ‘을’…드라마판은 완장 찬 사회”

등록 2013-10-22 20:19수정 2013-10-23 11:25

김영훈 기자 kimyh@hani.co.kr
김영훈 기자 kimyh@hani.co.kr
엑스트라 쥐어짜는 드라마 왕국 ⑦ 기획사 임원의 고백

<한겨레>는 지난달 30일부터 ‘보조출연자 쥐어짜는 드라마 왕국’을 해부하고 있다. 보조출연자 기획사들은 월 소득 50만원 이하인 가난한 보조출연자들의 주머니에서 밥값 500원을 떼먹고, 배역을 주는 대가로 월 5만원을 상납받는가 하면, 최장 두 달을 기다려야 임금을 주고, 또 내부 고발자를 색출해 일당 4만원짜리 일자리를 빼앗아가기까지 해왔다. 이런 치졸하고 비정한 행태는 주로 기획사 반장들이 저질렀다. 하지만 기획사 반장들 역시 또다른 ‘갑’에겐 ‘을’이다. 드라마 왕국의 상층부를 차지한 감독과 배우, 방송사와 제작사 앞에서 그들은 머리를 조아려야 하는 ‘을’일 뿐이다. 드라마는 허구지만, 드라마 촬영장은 먹고 먹히는 먹이사슬로 얽힌 현실의 압축판이다.

보조출연자로 시작해 현장 반장을 거쳐 기획사 임원에 오른 ㄱ씨는 “감독 비위를 맞춰야 하는 기획사 반장들도 보조출연자만큼이나 힘들다”고 토로했다. <한겨레> 취재진은 지난달 24일 서울 여의도 한 커피숍에서 ㄱ씨를 만났다. ㄱ씨는 인터뷰를 마친 뒤 한동안 적잖이 걱정했다. 신원이 드러날 경우 생계가 어려워질 수 있다고 했다.

-반장들도 촬영 현장에서 어려움이 적지 않다는데….

“과거 <문화방송>(MBC)에서 방송한 드라마 감독한텐 발로 차인 적도 있다. 감독 성격이 다혈질이라서 누가 안 말렸으면 대형사고가 날 뻔했다. 내가 쳐다보는 눈빛이 싫어 그랬다더라. 그런 일 당해도 기획사나 개인이 불이익을 당하니까 말을 못 한다. 우리도 감독의 선택을 받아야 일을 할 수 있다.”

보조출연자 출신 기획사 임원 ㄱ씨
“감독 비위 맞추는 반장들도 힘들어”
폭행 당해도 불이익 당할까 ‘끙끙’
일감 따기 위해 술 접대·돈 상납도

-그래도 촬영장에서 욕설은 사라져 가는 분위기 아닌가.

“지금도 극히 일부분은 있다. 반장 조인트를 까고(정강이를 차고) 폭행하는 감독들이 없다고는 못 한다. (유명 피디를 언급하며) 그는 인간 이하다. 자기보다 약한 사람한테 정말 함부로 대한다. 톱스타, 스타 작가한테만 잘 한다. 현장 스태프들 앞에서는 뒷짐 지고 걸어다니다 마음에 안 들면 걷어차고. 연기자라고 해도 인기 없으면 별 수 없다. 후배 표현을 빌리자면, 그 감독의 드라마 촬영장에선 무릎에 딱지 멎을 날이 없다. 몇 달 전, 종편(종합편성 채널)에서 방영한 드라마 찍을 때도 그랬다고 들었다. 그 감독을 포함해 몇몇은 다들 기피한다.”

시원하게 속내를 드러내지 않던 ㄱ씨가 그 유명 피디를 거론할 때만큼은 ‘인간 이하’라고 잘라 말했다.

-반장이 감독한테 일을 따오는 특별한 방법이 있나.

“연출자를 많이 아는 게 좋다. 인맥이 중요하다. 술을 상납한다든가 돈을 주는 경우도 있다. 은근히 요구하는 감독도 있고 반장이 알아서 주기도 한다. 지금은 기획사가 5곳이나 되니 포화상태지만 1980년대 기획사 한 곳이 독점했을 땐 회사가 살 만했다. 그땐 계절마다 감독들한테 양복을 선물했었다.”

-지금, 감독에게 상납을 한다면 어느 정도 규모인가.

“몇 년 전에 한 감독에게 300만원 줬다가 회수한 적 있다. 돈 되는 프로그램일 줄 알았는데 돈도 안 되고, 감독이 너무 ‘싸가지’ 없어서. 해당 감독이 먼저 요구해서 줬던 거다. 있는 자들이 더 하다. 기획사 쪽이 감독한테 골프 비용을 대는 경우도 있다.”

그는 머뭇거리다가 자신의 경험을 털어놨지만, 결정적인 내용은 말하지 않았다. 그는 “물론 작은 선물조차 거절하는 감독도 있다”고 덧붙였다. 현재 방영 중인 한 지상파 방송 드라마의 피디를 거론하며 “정말 그 분은 별 거 아닌 것도 안 받는다”고 했다.

-기획사 반장이 보조출연자로부터 상납을 받는 경우도 있지 않나.

“과거에는 대다수 기획사가 월급을 현금으로 줬다. 물론 지금도 한 기획사는 계좌 이체 대신 현금 지급을 고수한다. 지금 이 업계를 떠난 ㄱ지부장은 월급날 보조출연자들한테 봉투를 주면서, 눈앞에서 돈을 빌려달라고 했다. 5만원, 10만원. 참 나빴다. 보조출연자 입장에선 안 빌려 줄 수도 없고.”

-밥값을 떼먹는 반장도 있다.

“밥값 갖고 장난치는 비열한 자들이 사실 좀 있다. 정가보다 1000원, 500원 싼 밥을 보조출연자들한테 먹인다. 3년 전 경북 문경 촬영장 근처 식당에서 밥 먹는데 반찬 질이 무척 안 좋았다. 알고 봤더니 단가를 낮게 책정해서 그런 거라더라. 그때 나 말고 다른 반장도 같이 일했는데 그 사람이 떼먹은 건지, 기획사 짓인지는 확인하지 않았다.”

-업계가 열악하다는 생각이 들 것 같다.

“그렇다. 지난해 <한국방송>(KBS) 드라마 <각시탈> 차량 전복 사고로 보조출연자 박희석씨가 숨졌을 때 ‘자기 식구’가 아니라며 해당 기획사가 발뺌한 건 잘못된 처사였다. 사실 10여년 전에도 촬영장에 있던 휘발유에 불이 붙으면서 한 보조출연자가 숨지기도 했다. 과거엔 그런 일이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그는 “드라마판은 완장질”이라고 단언했다. 기획사 반장은 감독에게, 보조출연자는 반장에게 잘 보여야 하는 상황이 ‘계급사회’ 그 자체라는 것이다. “완장 찬 것처럼 행세하는 사람이 있다. 여기는 인간시장이다. 벤츠 타고 다니는 사람부터 가난한 사람까지 다양하다. 나도 보조출연자 해 봐서 그들 심정을 이해한다. 영하 10도 날씨에, 촬영장에서 발이 얼까봐 뛰어다녀야 했다. 그땐 20대였다. 사실 나도 누가 엑스트라라고 말하면 비하하는 것 같아서 지금도 듣기 싫다. 그런데 ‘엑스트라 자매 자살 사건’만 봐도 완장질 하는 반장이 꽤 있다.”

보조출연자들에겐 ‘절대권력’ 군림
“보조출연자에 욕 퍼붓는 반장 보고
똑같이 될까봐 그만둔 부반장도 있어”
‘갑을관계가 낳은 계급사회’ 꼬집어

ㄱ씨는 보조출연자로 일하던 양은희(가명·당시 34살)씨 자매가 2009년 잇따라 자살한 사건을 거론했다.(<한겨레> 21일치 12면 참조) 양씨는 2004년 12월 기획사 반장 등 12명을 성폭행·강제추행 혐의로 고소했지만, 대질조사 등 경찰 수사 과정에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으면서 고소를 취하했다.

ㄱ씨는 “개인적으로 양씨의 어머니께 사과 드리고 싶다”는 말을 꺼냈다. “보조출연 업계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선배 책임도 있다. 기획사도 성 문제를 방치하는 경향이 있다. 양씨 자매 사건을 뒤늦게 듣고,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서는 느낌이 들었다. 나도 만약 그 기획사에 속했다면 분위기에 휩쓸려 12명 중 한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ㄱ씨뿐만 아니다. 보조출연자들을 부리는 반장들은, 자신들 역시 ‘을’에 불과하다고 하소연했다. 한 기획사 반장은 조연급 배우에게 욕설을 듣고 일을 그만두기도 했다. <문화방송> 드라마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2008년) 촬영장에서, ㅊ반장은 한 중년 배우에게 ‘선생님’이라는 호칭 대신 ‘씨’라고 말했다가 다른 젊은 배우에게 호된 욕설을 들어야 했다. “듣다 못한 보조출연자가 ‘당신이 연기자면 연기자지, 우리한테는 반장님인데 우리가 다 보는 데서 욕을 하냐’고 목소리를 높였어요. 그제야 그 젊은 배우가 그만두더라고요.” 현장에 있던 한 보조출연자가 전한 말이다.

2009년 한 기획사의 부반장으로 일하던 ㄹ씨는 ‘양심’이 일을 그만두게 했다고 한다. “깡패가 남녀 주연배우를 찾아 병원을 헤집고 다니는 장면을 찍고 있었습니다. 한 여성 보조출연자가 무척 힘들었는지 병원 복도 구석에 쪼그려 앉아 있는 걸, 반장이 발견했죠. 그 여성이 ‘어떻게 연기해야 할지 몰라서’ 앉아 있다고 하자, ‘야, XXX아, 일하러 나와서 쉬고 있어? 너 같은 X은 뒈져도 돼’ 하고 욕을 퍼붓더라고요.” ㄹ씨는 “반장의 욕설을 듣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했다. “나도 저렇게 될 것 같아 미련 없이 일을 끝냈어요.”

박유리 기자 nopimul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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