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일 오전 전주지법에서 벌금 100만원 선고유예 판결을 받은 안도현 시인이 법원을 빠져나가고 있다. 그는 지난해 대선 당시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가 안중근 의사 유묵의 도난에 관여했다는 의혹을 제기해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됐다. 전주/뉴스1
[토요판] 친절한 기자들
법원은 사회의 하수구와 같습니다. 각종 범죄는 경찰·검찰을 거쳐 법원의 심판을 받지요. 돈, 사랑, 가정 문제도 결국 법원으로 향합니다. 저는 그 하수구에서 비린내 나고 눈물 나는 삶의 이야기를 뒤지는 법원 담당 기자입니다.
저는 최근 논란이 됐던 안도현 시인의 유죄(선고유예) 판결에 대해 얘기해보려고 합니다. 안도현 시인은 지난 대선 때 박근혜 후보를 트위터로 비방한 혐의로 기소됐지요. 국민참여재판에서 배심원들은 전원 무죄 판단을 했지만 전주지법 형사2부(재판장 은택)는 일부 유죄로 판결했습니다.
이 판결문에는 왜 재판부가 배심원과 다른 판단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쓰여 있는데 판사의 논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함께 따라가 보죠.
‘법관은 직업적 양심에 따라 심판해야 할 책무가 있다 → 명문 규정, 법리, 건전한 사회상식에 의해 형성되는 직업적 양심은 어떠한 경우에도 포기할 수 없다 → 배심원 의견은 법관의 직업적 양심의 본질적 부분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기속력을 가진다 → 이 사건은 법률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이 법리적 관점에서 유무죄를 판단하기 쉽지 않다. 배심원의 정치적 입장이나 지역의 법감정, 정서에 판단이 좌우될 수 있다 → 그렇다면 이 사건에서 법관의 직업적 양심의 본질적 부분은 유무죄에 대한 법적 평가 부분이다.’
다섯 단계를 거쳐서 도달한 결론은 ‘법관인 내가 유죄면 유죄’입니다. 법리를 모르는 일반인은 정치나 지역감정에 오염될 수 있는 반면, 때 묻은 세상 속에서도 멸균 상태를 유지하는 법관의 판단이 옳다는 것입니다. 법을 모르는 시민 대 전문 법률가라는 이분법이 판결문에 짙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판결문은 최근 나꼼수·안도현씨의 참여재판에서 배심원 무죄 평결을 비난하는 여당 의원들의 주장과 맞닿아 있습니다. 지난달 28일 서울고법 국정감사에서 새누리당 의원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비판하는 후보의 사건을 공정하게 판단할 수 있겠나.”(권성동 의원) “(법리가) 어려운 선거법 등을 참여재판으로 하는 건 옳지 않다.”(김학용 의원)
하지만 부산에서 진행된 박근혜 비방 참여재판 사건에서는 무죄도 나고 유죄도 났습니다. 지역이 아니라 사건의 성격에 따라 유무죄가 갈리는 것입니다. 피고인을 지지하는 방청석의 액션이 배심원 평결에 영향을 줬다는 주장도 막연한 추측입니다. 지난 8월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지만원씨의 참여재판에서는 지씨를 지지하는 할아버지 10여명이 목소리를 높이는 바람에 재판부가 두 번이나 경고를 하고, 한 명이 법정 밖으로 쫓겨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소란스러운 상황에서도 배심원들은 유죄로 평결했습니다.
배심원과 판사는 모두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법리의 나침반을 따라 함께 길을 걸어갑니다. 마지막 유무죄의 갈림길에서 대법원 판례는 ‘사회통념 등을 고려하라’는 추상적인 방향만 던져줍니다. 여기서부터는 일반인과 판사의 상식이 충돌하게 됩니다. 국민참여재판이 도입된 2008년부터 지난 9월까지 배심원 평결을 재판부가 뒤집은 경우는 전체 1091건 중 82건이었습니다. 이 중 무죄를 유죄로 바꾼 게 76건이었습니다. 배심원이 일반 법관보다 유죄를 인정하는 데 더 까다롭다는 뜻입니다.
판사 출신인 권오창 변호사는 자신이 번역한 책 <여론과 법 정의의 다툼>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수많은 사건을 일상적으로 처리하는 직업법관과, 평결 직전 재판장으로부터 ‘합리적 의심’에 관해 처음으로 설명을 듣는 배심원들 사이에 ‘합리적 의심’의 범위에 차이가 있다. ‘형사재판을 처음 맡은 배석판사들은 아주 많은 사건에서 합리적 의심을 품곤 하는데, 그 뒤 선배 법관의 조언을 받으며 많은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합리적 의심의 범위가 줄어들게 된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어왔다.”
한 부장판사도 이런 얘기를 털어놓습니다. “늘 비슷한 범죄자를 보는 판사들은 사건이 들어오면 ‘이놈 또 거짓말하네’라고 생각한다. 긴가민가한 경우에는 유죄로 판결하는 대신 형량을 낮추면서 스스로 타협한다. 하지만 판사가 거짓말했다고 보는 10명 중 한명은 진짜 무죄일 수도 있다.” 이에 반해 자신의 판단으로 타인의 인생을 결정하는 경험을 처음 하는 배심원들은 관행에 길들여진 직업법관이 걸러내지 못한 억울한 한명을 구해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마지막으로 하나 더. 이번 국민참여재판에 대해 새누리당 등이 유독 비판하는 이유는 뭘까요? 참여재판의 국내 도입에 앞장섰던 한 법조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시민이 권력층에 도전하는 참여재판의 속성을 권력층이 눈치챈 것이다.”
이경미 사회부 법조팀 기자 km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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