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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구제역 살처분 탓 자살’도 업무상 재해

등록 2013-11-14 20:42

법원서 첫 인정 “극심한 충격탓”
정아무개(사망 당시 41살)씨는 충남의 한 축협에서 돼지 축사 관리일을 했다. 돼지 20마리에게 예방접종을 하고 사료를 주고 우리를 청소하는 게 그의 일이었다. 2010년 12월 구제역이 발생하자 정씨는 크리스마스인 25일 직원들과 함께 가축 살처분 매몰 작업을 했다. 갓 태어난 새끼를 포함해 소·돼지 등을 산 채로 구덩이에 파묻어 죽여야 했다. 이후 정씨는 작업을 함께 한 동료 박아무개씨에게 “악몽을 꾸다 놀라서 깬다” “이러다 벌받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매몰지에서 흘러나오는 침출수 때문에 이듬해 4월부터 다섯달 동안 침출수 제거 작업에도 정기적으로 투입됐다.

7월부터는 분뇨 수거 업무로 전환했는데 전표 처리나 컴퓨터 업무에 익숙하지 않아 어려움을 겪었다. 사표를 냈다가 반려돼 일을 계속했다. 8월 무렵부터 불면증·조울증세가 나타났다. 위염·십이지장궤양 등 진단도 받았다. 몸과 마음이 동시에 무너져가고 있었다.

평소 지극히 아들을 아꼈던 정씨는 숨지기 보름 전인 10월 중순 아들이 책을 정리하지 않는다며 “아빠처럼 그렇게 살 거냐”면서 소리를 지르고 책꽂이를 엎어버리기도 했다. 사망 전날인 일요일에 정씨는 평소 안 하던 저녁 준비를 도왔다. 정씨는 다음날 출근하기 전 부인에게 물었다. “인생의 목표가 뭐야?” 부인이 “아들을 잘 키우는 것”이라고 대답하자 “그럼 됐어”라고 말하고 집을 나섰다. 숙직 당번이었던 정씨는 함께 숙직할 동료가 이를 잊고 나오지 않자 그날 저녁 전화해 “혼자서도 괜찮으니 숙직방에 안 와도 된다”고 말했다. 그날 밤 정씨는 숙직실에서 동물 마취용 근육이완제를 주사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근로복지공단은 “유서를 썼다는 건 계획적 자해행위로 볼 수 있다”며 정씨의 죽음을 업무상 재해로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서울행정법원 행정2부(재판장 윤인성)는 지난 7일 “정씨가 구제역 매몰 작업 이후 우울증을 의심하게 하는 폭력적 행동을 보였고, 살처분으로 인한 극심한 충격으로 견디기 어려운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 때문에 정신적 억제력이 현저히 저하된 상태에 빠져 자살에 이르게 된 것으로 보인다”며 근로복지공단이 정씨의 부인에게 유족 급여 및 장의비를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구제역 살처분으로 정신적 외상을 입고 자살한 사람의 유족이 소송을 통해 업무상 재해를 인정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2010년 구제역 사태로 전국 11개 시·도 75개 군에서 가축 348만여마리가 매몰 처분됐다. 한국정신보건사회복지학회가 지난해 발행한 ‘구제역 방역에 참여한 공무원의 외상후스트레스장애와 우울’ 연구보고서를 보면, 살처분과 매몰 업무를 담당한 공무원 406명 중 외상후스트레스장애 고위험군이 34.5%, 경증 이상의 우울을 경험한 사람이 16.2%로 나타났다.

이경미 기자 km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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