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사회 사회일반

제 허물 덮고 남 잘못 따지나

등록 2005-09-04 19:40수정 2005-09-07 11:47

사법부의 과거사 관련 언급
사법부의 과거사 관련 언급
[사법부과거 이제는말해야한다] (상) 과거사 반성없는 법원

“지난날 사법부의 비겁함을 꾸짖는 역사와 국민 앞에 참담한 심정으로 속죄한다. 사법부가 인권 수호와 민주주의의 최후 보루로서 책무를 다하지 못하게 된 안팎의 원인을 되짚고 이에 대한 반성과 청산 없이는 진정한 사법부 개혁은 완성될 수 없다.”

1993년 서울민사지법 단독판사 28명은 ‘사법개혁’ 건의서를 통해 대법원장에게 ‘과거사 반성’을 촉구했다. 그 뒤 재야 법조계와 정치권에서는 “군사독재 시절의 ‘정치판사’는 퇴진해야 한다”는 논쟁이 불붙었다. 71년 법관들이 검찰에 맞서 “반공법·국가보안법 사건에서 법관을 협박하고 함정수사까지 했다”며 사법권 침해 사례를 공개한 이래 사법부의 ‘자기고백’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윤관 대법원장은 “특정재판이나 직책을 맡은 전력만으로 ‘정치판사’로 볼 수 없고, 정치권력에 영합했거나 판결을 출세수단으로 삼은 인사가 있다면 퇴진해야 할 것”이라고 가정형으로 말하는 데 그쳤다. 뜨거운 논쟁에도 사법부의 공식적인 ‘과거’ 언급은 없었다.

대법원장의 공식 발언으로는, 이영섭 전 대법원장(1979년 3월~1981년 4월)이 “취임 초에는 포부와 이상도 컸으나, 지금 과거를 되돌아보면 회한과 오욕으로 얼룩진 것 외에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됐다”는 퇴임사로 ‘반성’을 대신한 것이 유일했다. 5·6대 대법원장을 지낸 민복기씨는 90년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사법부를 군의 법무감실 정도로밖에 여기지 않았던 것 같다”며 “(민주주의니 사법부 독립은) 제사에 대추, 밤을 놓듯이 구색을 맞춘 정도”라고 과거를 되씹었다.

93년 내부의 개혁 요구도 공식적 ‘모르쇠’
“인권침해 피의자로서 고백과 반성 있어야”

95년 근대사법 100주년을 맞아 법원행정처가 <법원사>를 발간하는 등 사법부의 역사 정리작업은 있었지만, 과거 반성이나 청산의 관점과는 거리가 멀었다.


최근에는 4월 ‘주요 과거사의 재심문제’를 묻는 국정감사 질의에 손지열 법원행정처장이 “과거 법원의 확정판결을 뒤엎는 절차는 법적으로 재심밖에 없다”며 “재심 외에 당시 판결을 상급법원이나 다른 위원회에서 조사한다는 것이 법률상 가능한지 법원으로서는 확신할 수 없다”고 답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최근의 과거사 논의에서 사법부만 유일하게 자기반성을 안 하고 있다”며 “법원은 정치권에 의해 강요당한 ‘피해자’인 동시에, 인권 침해의 ‘피의자’이기도 한데 이에 대한 고백과 반성이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

“권력 입맛대로 판결… 부끄럽다”

“구류 3일짜리 시국사범 20~29일 살도록”
법원장이 중형 강요 ‘으르고 타이르고’
거스르면 인사 불이익… 순응아니면 침묵

1980년대 중반 서울지방법원의 한 지원. 판사가 집회에 참석했던 대학 1~2학년 학생들에게 선고유예 판결을 하자, 곧바로 지원장이 형사단독 판사들을 호출했다. ‘어차피 풀어주는 건 똑같은데, 선고유예 대신 집행유예는 안 되겠냐’고 ‘설득’하기 위한 것이었다. 고법의 ㄱ부장판사는 “지원장이 젊은 판사들을 앞에 놓고 사정하다시피 눈물까지 흘렸다”며 “위에서 지시가 내려왔던 모양인데, 이 사건으로 당시 지원장은 고법 부장판사로 강등됐다”고 말했다.

현직 고위법관들이 사법부의 ‘부끄러운 과거’에 대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신임 대법원장이 어떤 식으로든 이 문제를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라며, 80년대 사법부의 부끄러운 경험담을 털어놨다.

이때만 해도 법원장이나 형사수석부장이 시국사범의 양형에 관여하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ㄴ부장판사는 “김대중 환영 벽보를 붙이다 잡혀온 아주머니에게 ‘구류 20~29일을 살게 하라’는 서울형사지방법원장의 전화 지시에, 지원장이 전화기를 집어던지며 화내는 모습을 봤다”고 전했다. 그의 기억으로는 ‘과태료 4500원이나 구류 3일이면 충분한’ 사건이었다. ㄷ부장판사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수도권 지원의 단독판사로 있을 때였는데, 지원장이 전체법관회의를 소집해서는 “즉결에서 시국사범을 풀어주는 일이 종종 있는데, 그러면 안 된다”고 판사들을 질책했다. ㄷ부장판사는 “법원장이 개별 사건의 양형을 언급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법원의 이런 분위기는 박철언씨가 최근 펴낸 회고록에서도 언급된다. 박씨는 “81년 면접한 대법원장 후보 중에서 ㄱ씨는 ‘임무가 주어진다면 법관들이 자연스런 방법으로 정부에 협력하도록 하겠다’고 말했고, ㅇ씨는 ‘국가안보가 민주주의·기본권·인권보다 전제가 된다’고 했다”고 회고했다.

정권의 ‘사법부 길들이기’에 순응하지 않는 판사들에게는 인사 불이익이 뒤따랐다. ㄷ부장판사는 “시국사범에게 무죄를 선고한 판사가 옷을 벗고, 법원장이 집행유예를 선고한 판사를 불러서 서류를 집어던지며 화냈다는 이야기가 법원 안에 파다했다”고 전했다. 심지어 주요 시국사건의 재판부가 선고 하루 전 법원장한테 선고 내용을 ‘미리’ 보고했다는 소문도 돌았다. ㄱ부장판사 역시 “항소심에서 집시법을 위반한 대학생들에게 징역 8월로 형량을 일괄적으로 낮춰 선고했던 부장판사가 인사철도 아닌데 지원 민사부장으로 쫓겨갔다”고 기억했다.

영장 발부에 대한 간섭은 훨씬 심했다. 86년 건대사태 때 영장을 담당했던 ㄷ부장판사는 “지원장이 ‘청와대에서 관심을 갖고 있는 사안이니 실수 없이 잘 처리하라’며 영장판사들을 모아놓고 저녁을 사줬다”고 말했다. 다른 법원에 있던 ㄹ부장판사는 “‘영장을 기각하려면 미리 상의하라’는 수석부장의 말에, 어린 학생들 영장 몇 건을 기각할 생각으로 수석부장 방을 찾아갔다가 오히려 설득당해 결국 영장을 발부한 일이 있다”고 고백했다. 당시 수석부장은 “정부가 계엄을 준비 중이라는데 총칼 들고 사법부에 밀고 들어오면 어쩔 거냐, 검찰·안기부·청와대가 약속한 사안인데 이미 영장을 발부한 다른 판사들과의 형평성은 어떻게 하냐”고 설득했다고 했다.

마음에 안 들면 ‘윗선’이 영장을 직접 찢기도 했다. ㄹ부장판사는 “7 대 3의 비율로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영장을 기각-발부했는데, 수석부장과 법원장이 불러 ‘어차피 영장이 재청구될 거니 이래도 소용없다’고 타이르더니 ‘이 자리에서 영장을 찢어버릴 테니 없었던 일로 하고, 3 대 7의 비율로 다시 하라’고 지시했다”고 털어놨다.

이런 고백을 한 부장판사들은 하나같이 “정보기관원이 법원에 상주하고 양형을 정해줬던 유신시절에 비할 일은 아니지만, 말하기 부끄러운 뒷이야기”라며 “이런 과거와의 ‘단절’은 신임 대법원장의 의지에 달렸다”고 입을 모았다.

ㄱ부장판사는 “당시 형사수석부장이나 법원장 등 일차적인 책임자가 법원을 떠난 만큼, 오히려 대법원장이 자유롭게 이 문제를 언급할 수 있을 것”이라며 “인혁당 사건 등 법원의 잘못이 확실한 판결에 대해서는 견해를 밝혀야 한다”고 지적했다. ㄴ부장판사도 “순응하고 침묵했던 법관들의 과거가 묻혀 있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꼬집었다. ㄹ부장판사는 “숨죽이고 있을 수밖에 없던 판사들을 무조건 욕할 일은 아니다”라면서도 “다만 대법원장이 ‘국가정보원 등 과거사위 활동에 법원이 최대한 협조하겠다’는 의견 표명은 해야 한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용훈 대법원장 지명자는 지명되기 직전 기자와 만나 “긴급조치 때 유신헌법에 저항하지 못한 사법부의 과거는 반성할 일”이라고 말한 바 있다.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



관련기사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사회 많이 보는 기사

전광훈 ‘지갑’ 6개 벌리고 극우집회…“연금 100만원 줍니다” 1.

전광훈 ‘지갑’ 6개 벌리고 극우집회…“연금 100만원 줍니다”

하늘이 영정 쓰다듬으며 “보고 싶어”…아빠는 부탁이 있습니다 2.

하늘이 영정 쓰다듬으며 “보고 싶어”…아빠는 부탁이 있습니다

‘윤석열 복귀’에 100만원 건 석동현…“이기든 지든 내겠다” 3.

‘윤석열 복귀’에 100만원 건 석동현…“이기든 지든 내겠다”

검찰, 김정숙 여사 ‘외유성 출장’ 허위 유포 배현진 불기소 4.

검찰, 김정숙 여사 ‘외유성 출장’ 허위 유포 배현진 불기소

‘장원영’이 꿈이던 하늘양 빈소에 아이브 근조화환 5.

‘장원영’이 꿈이던 하늘양 빈소에 아이브 근조화환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