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사회 사회일반

파병 거부한 밀항자 김동희를 아십니까

등록 2014-01-03 20:58수정 2014-01-05 12:23

김동희(왼쪽)가 일본 오무라 수용소에서 변호사를 만나는 모습. 1967년 3월26일치 <로동신문>에 실린 사진이다. 1968년 김동희는 북한으로 갔으나 생사가 불투명하다.
김동희(왼쪽)가 일본 오무라 수용소에서 변호사를 만나는 모습. 1967년 3월26일치 <로동신문>에 실린 사진이다. 1968년 김동희는 북한으로 갔으나 생사가 불투명하다.
[토요판] 커버스토리
또 한명, 비운의 국군
조그마한 고깃배의 선창에 숨죽인 채 스며들어 일본으로 이동했던 사람들이 있다. 바로 밀항자들이다. 소설가 최인훈이 <광장>에서 말한 “돈과 마음과 몸을 지켜주는 법률의 밖에 있는 어떤 삶”으로 내몰린 사람들이다. 이들은 자신이 속해 있는 거대한 국가에 몸뚱이 하나로 ‘균열’을 만들어냈다. 그 수가 얼마인지는 정확히 모른다. 어떤 사람은 현해탄에서 고기밥이 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배에서 혹은 상륙한 육지에서 일본의 관헌에 붙잡혀 출입국관리령 위반으로 징역형을 받고 교도소에 수감되었다가 ‘기약 없는 강제 수용’을 거쳐 송환됐다. 어떤 사람들은 일본을 거쳐 북한으로 이동하기도 했다.

이들 중에서 탈영→밀항→징역형→수용소→입북으로 이어지는 굴곡 많은 삶을 산 사람이 바로 김동희다. 한국 쪽 자료가 전혀 없으니 지금으로서는 일본 쪽 자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김동희는 1935년 제주도에서 7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일본에 거주하던 세명의 형을 찾아 1953년에 처음으로 밀항한다(제1차 밀항). 가난이 이유였다. 열아홉살 때 일이다. 합법 신분을 얻지 못하고 1960년 4월1일 한국으로 강제 송환된다. 한국에서 별다른 처벌은 받지 않았다. 당시 활발하게 진행되던 재일조선인의 ‘북송사업’에 대항하고자 이승만 정권이 이들 강제 송환자를 ‘애국자’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 뒤 입대 영장을 받았지만 징병을 기피하고 1962년 5월 재차 밀항을 시도한다(제2차 밀항). 이틀 동안 표류하다가 일본 쪽에 구조·체포되었고 1962년 6월 출입국관리령 위반으로 징역 1년2개월, 집행유예 3년의 판결을 받는다. 같은 해 10월엔 한국으로 강제 송환된다. 제1차 송환 때와는 달리 한국에서 징역 10개월(집행유예 1년) 판결을 받았다. 1963년 7월에 입대하였고 9월에 부산육군병기학교에 배속되었다.

두번의 밀항 실패와 징병 기피
결국 입대했지만 파병 명령
또 탈영한 뒤 대마도로 밀항
형무소와 수용소에 갇혔다가
남한이 싫어 북한으로 갔으나…

일본은 평화헌법을 가졌어도
베트남 파병 거부하고 온 그를
원천적으로 품어줄 수 없었다
믿음은 배신으로 끝이 났다

김동희는 두번에 걸친 밀항 실패와 징병 기피에도 이 단계에서 대한민국의 ‘국민’이 되기 위한 절차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던 듯하다. 국가는 그를 다시 시험에 들게 한다. 제대를 약 반년 앞둔 상황에서 돌연 베트남 파병 명령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상관에게 밉보인 게 이유였다고 그는 말한다. 1965년 7월3일 탈영을 감행한다. 계급은 병장이었다. 1967년 1월23일 일본의 재판소에 제출한 ‘망명신청서’에서 그는 4·3사건과 “한국전쟁에서 많은 동포들이 죽어가고 조국이 파괴되는 것을 통해 전쟁이 얼마나 잔혹한지를 체험했다. 지금 베트남에서 포연에 휩싸인 채로 많은 사람들이 이유도 없이 서로 죽이고 국토를 파괴해 피로 물들고 있는 것에 강한 반발을 느꼈”으며, 따라서 “죄 없는 베트남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으며 또한 “나도 죽고 싶지 않”았었다고 말한다. 다시 밀항을 택한다. 1965년 8월 조그마한 어선에 몸을 싣고 대마도로 향한 것이다. “헌법 전문 및 헌법 제9조의 전쟁 포기를 규정한 평화주의를 관철시키려 노력하는 일본”이라면 베트남 파병에 반대한 자신의 뜻을 받아들여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출입국관리령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약 1년의 징역형을 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복역한다.

1967년 2월19일 형기를 마치고 형무소를 나온 김동희를 기다린 것은 ‘감옥 아닌 감옥’ ‘감옥보다 더한 감옥’인 오무라 수용소였다. 나가사키의 오무라 수용소는 주로 ‘강제 송환’을 위해 조선인을 가둬두려고 만든 시설이지만, 형무소보다 더한 인권유린 등으로 악명 높았다. 오무라 수용소에 있으면서도 변함이 없었던 이른바 ‘평화헌법’에 대한 그의 ‘믿음’은 배신으로 끝났다. 일본 정부와 사법부가 그의 일본 망명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평화헌법은 실제로 기능하지 않았고 오히려 베트남전쟁을 위한 기지를 미국에 무한대로 제공하고 자위대가 무력을 증강하는 현실이 일본에 자리하고 있었다. 김동희를 일본으로 이끈 것은 평화헌법의 이념이었지만, 김동희를 일본 밖으로 내친 것도 평화헌법의 현실이었다. 무장과 무력 사용을 금지하는 일본의 평화헌법을 일본 사회가 실천에 옮겼다면 망명극은 일본에서 끝났을 것이다. 이제 한국으로 강제 송환되거나 수용소에서 기약 없는 ‘감옥 생활’을 견디는 길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결국 한국 강제 송환을 피하기 위해 북한으로 가는 길을 택한다.

일본 정부는 1968년 1월26일, 그를 소련의 나홋카행 선박에 태워 북한으로 향하게 한다. 오무라 수용소에 있던 그의 요구를 들어주고자 동분서주한 소설가 오다 마코토의 회고록에 따르면 “1976년 10월 김일성 북한 주석과 만났을 때 김동희의 소식을 물어보자, 후일 ‘그런 사람은 북한에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고 한다. 그는 식민지와 전쟁의 피투성이 기억이 생생한 한국에서 살 수 없었고 ‘가족이 사는 땅’인 일본에서도 살 수 없었다. 종착역이 확인되지 않는 김동희의 인생 유전에는 식민지, 4·3 민중봉기,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남북 분단이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다. 국가와 국가 사이에 틈새 따위는 없는 것일까?

권혁태 성공회대 일어일본학과 교수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사회 많이 보는 기사

전광훈 ‘지갑’ 6개 벌리고 극우집회…“연금 100만원 줍니다” 1.

전광훈 ‘지갑’ 6개 벌리고 극우집회…“연금 100만원 줍니다”

하늘이 영정 쓰다듬으며 “보고 싶어”…아빠는 부탁이 있습니다 2.

하늘이 영정 쓰다듬으며 “보고 싶어”…아빠는 부탁이 있습니다

‘윤석열 복귀’에 100만원 건 석동현…“이기든 지든 내겠다” 3.

‘윤석열 복귀’에 100만원 건 석동현…“이기든 지든 내겠다”

검찰, 김정숙 여사 ‘외유성 출장’ 허위 유포 배현진 불기소 4.

검찰, 김정숙 여사 ‘외유성 출장’ 허위 유포 배현진 불기소

‘장원영’이 꿈이던 하늘양 빈소에 아이브 근조화환 5.

‘장원영’이 꿈이던 하늘양 빈소에 아이브 근조화환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