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오후 성심원 요양원 3층의 사랑방에선 웃음꽃이 피었다. 이날 할머니들이 이태석봉사상을 수상한 유의배 신부를 축하한 뒤 서로 손뼉을 마주치며 기뻐하고 있다. 산청/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토요판] 커버스토리 / 한센인의 어제와 오늘
국가인권위원회가 2005년 발간한 ‘한센인 인권 실태조사’를 보면, 1960년대 소록도에서 한센인 부모와 면회를 한 자녀의 구술기록이 있다.
“바람이 부모님 쪽으로 가는 방향으로 서서 한달에 한번씩 면회를 했어요. 거리는 2, 3미터 떨어져 서 있었고, 약 5~10분 정도 면회할 수 있어요. 면회가 끝나면 전체 소독을 했고, 다시 한달간 면회할 날만 기다리며 살았어요.”
소록도에서 한센인과 자녀를 격리 수용하는 조치는 1960년대까지 이어졌다. 한센인 자녀들이 겪은 사회적 차별은 그 이후에도 계속됐다. 한센인의 자녀들은 오랜 기간 미감아(未感兒)라고 불렸다. 지금은 병에 걸리지 않았으나, 언젠가 걸릴 사람이라는 의미다. 아직 아무 병에도 걸리지 않은 아이를 부모가 한센인이라는 이유로 잠재적인 환자로 분류했다. 인권위의 보고서는 “한센인의 자녀를 ‘미감아’란 명칭으로 부른 것은, 그들의 사회복귀나 인권보다는 잠재적 발병자로 바라보고 관리의 대상으로 여기던 당시의 태도가 드러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고 적고 있다. 성심원의 곽경희 사회복지사는 “소록도에서 딸을 낳자마자 뺏기다시피 한 할머니가 최근 치매가 들었다. 이 할머니는 요즘 베개를 안고서 늘 딸에게 가야 한다고 말한다. 가슴에 한이 맺힌 모양”이라고 말했다. 최근엔 대부분의 한센인 복지시설에서 ‘미감아’라는 표현을 사용하진 않지만, 아직 정부의 공식 문서상에 이 표현이 남아 있는 경우도 있다. 안전행정부의 공무원성과급여포털 누리집에서 교직수당을 규정한 법령을 보면, “미감아가 있는 유치원·초등학교 학급의 교원에게는 월 7만원의 수당을 지급한다”고 규정돼 있다.
1934년부터 소록도에
한센인 강제수용 시작됐고
강제노동 등 인권침해 빈번
해방 뒤에도 남자는 단종수술
여자는 낙태가 강요됐다
생활환경과 의료기술 발전으로
한센인 수는 크게 줄었지만
자녀들 ‘미감아’로 부르며
잠재적 환자로 보는 시각 그대로
미감아라는 용어와 이들에 대한 처우는 역사 속에서 한센인들이 겪어온 고난의 한 단면에 불과하다. 구약성서에서부터 등장하는 오래된 질병인 한센병은 역사를 관통해 존재해왔고, 피부가 문드러져 외모가 변하는 특성으로 인해 온갖 차별과 괄시의 대상이 됐다. 조선시대 이전에도 나환자에 대한 기록이 존재하나, 한센인들의 인권침해 역사는 일제가 1916년 소록도에 자혜의원을 설립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특히 1933년 제4대 소록도 자혜의원장으로 임명된 일본인 스오 마사스에는 1934년부터 소록도갱생원을 대대적으로 확장하며 한센인에 대한 강제격리정책을 실시했고, 자의적인 징계권한을 행사하며 각종 인권침해를 자행했다. 이 원장은 1941년부터 태평양 전쟁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원생들을 적극 동원하며 강제노역을 시키다, 결국 1942년 원생에 의해 살해되고 만다. 이 사건은 고 이청준 작가의 소설 <당신들의 천국>에서도 일부 각색된 채로 인용됐다. 일제가 만든 소록도에선 강제수용, 강제노동, 단종과 낙태수술, 신사참배, 징계권 남용 등 광범위한 인권침해가 발생했다. 이 시기에 있던 인권탄압에 대해 한국 한센인 124명이 일본 정부에 보상청구소송을 냈으나, 도쿄지방법원은 2005년 “한국 청구인들이 한센보상법이 정하는 국립한센병요양소 입소자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소송을 기각했다. 해방된 이후에도 소록도에서의 인권침해는 계속됐다. 특히 한센인들끼리 결혼하려면 남자 한센인은 단종수술을 받아야 했고, 여자 한센인이 임신하면 낙태가 강요됐다. 이는 1980년대까지도 유지됐다. 해방 직후 한센인에 대한 십여건의 학살사건도 2009년 특별법이 제정된 이후에야 진상조사가 시작돼 2012년에 결과가 발표됐다. 인권위가 발간한 이 진상조사 보고서를 보면, 대표적인 학살사건으로 ‘84인 사건’이 소개돼 있다. 해방 직후인 1945년 8월20일부터 삼일간 소록도에서는 한센인들이 생필품과 의약품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다, 직원들과 고흥치안대가 발포한 총에 맞아 85명이 사망했다. 1947년 안동에서 어린이가 실종되자 현지 경찰이 인근 교량 밑에 거주하던 한센인 3명을 공동묘지로 끌고 가 총살한 사건은 ‘한센인이 어린이를 유괴해 살해한다’는 미신적 사고에 근거한 것이었다. 세월이 지나 생활환경의 개선과 의료기술의 발달로 한센인의 수는 크게 줄었다. 신규 한센인은 1970년 1292명에 달했으나, 2012년에는 5명에 불과했다. 전체 한센인은 1969년 3만8229명이었으나, 2012년엔 1만2323명으로 줄었다. 하지만 지난해 기준으로 평균연령 73살에 이르는 한센인 대부분은 차별과 박해의 역사를 오롯이 경험한 세대다. 또한 이들에 대한 편견과 왜곡된 인식은 별로 변하지 않았다. 한센인 복지단체인 한국한센총연합회가 2012년 전국 모든 연령대에서 무작위로 1411명을 설문조사한 결과를 보면, ‘한센병은 치료가 가능’하고, ‘유전이 되지 않으며’, ‘전염성이 강하지 않다’는 세 가지 내용을 제대로 아는 비율이 각각 57.8%, 59.4%, 54.7%에 불과했다. 이는 2005년 국가인권위가 실시한 ‘한센병 인식조사’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9년 전 이 조사에서 400명의 응답자 중 86.7%가 한센인 자녀와 가족의 결혼을 반대했고, 한센인 격리수용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이 55.6%에 달했다. 한센인에 대한 인식 수준은 아직도 게걸음 중이다. 윤형중 기자 hjyoon@hani.co.kr
1934년부터 소록도에
한센인 강제수용 시작됐고
강제노동 등 인권침해 빈번
해방 뒤에도 남자는 단종수술
여자는 낙태가 강요됐다
생활환경과 의료기술 발전으로
한센인 수는 크게 줄었지만
자녀들 ‘미감아’로 부르며
잠재적 환자로 보는 시각 그대로
미감아라는 용어와 이들에 대한 처우는 역사 속에서 한센인들이 겪어온 고난의 한 단면에 불과하다. 구약성서에서부터 등장하는 오래된 질병인 한센병은 역사를 관통해 존재해왔고, 피부가 문드러져 외모가 변하는 특성으로 인해 온갖 차별과 괄시의 대상이 됐다. 조선시대 이전에도 나환자에 대한 기록이 존재하나, 한센인들의 인권침해 역사는 일제가 1916년 소록도에 자혜의원을 설립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특히 1933년 제4대 소록도 자혜의원장으로 임명된 일본인 스오 마사스에는 1934년부터 소록도갱생원을 대대적으로 확장하며 한센인에 대한 강제격리정책을 실시했고, 자의적인 징계권한을 행사하며 각종 인권침해를 자행했다. 이 원장은 1941년부터 태평양 전쟁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원생들을 적극 동원하며 강제노역을 시키다, 결국 1942년 원생에 의해 살해되고 만다. 이 사건은 고 이청준 작가의 소설 <당신들의 천국>에서도 일부 각색된 채로 인용됐다. 일제가 만든 소록도에선 강제수용, 강제노동, 단종과 낙태수술, 신사참배, 징계권 남용 등 광범위한 인권침해가 발생했다. 이 시기에 있던 인권탄압에 대해 한국 한센인 124명이 일본 정부에 보상청구소송을 냈으나, 도쿄지방법원은 2005년 “한국 청구인들이 한센보상법이 정하는 국립한센병요양소 입소자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소송을 기각했다. 해방된 이후에도 소록도에서의 인권침해는 계속됐다. 특히 한센인들끼리 결혼하려면 남자 한센인은 단종수술을 받아야 했고, 여자 한센인이 임신하면 낙태가 강요됐다. 이는 1980년대까지도 유지됐다. 해방 직후 한센인에 대한 십여건의 학살사건도 2009년 특별법이 제정된 이후에야 진상조사가 시작돼 2012년에 결과가 발표됐다. 인권위가 발간한 이 진상조사 보고서를 보면, 대표적인 학살사건으로 ‘84인 사건’이 소개돼 있다. 해방 직후인 1945년 8월20일부터 삼일간 소록도에서는 한센인들이 생필품과 의약품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다, 직원들과 고흥치안대가 발포한 총에 맞아 85명이 사망했다. 1947년 안동에서 어린이가 실종되자 현지 경찰이 인근 교량 밑에 거주하던 한센인 3명을 공동묘지로 끌고 가 총살한 사건은 ‘한센인이 어린이를 유괴해 살해한다’는 미신적 사고에 근거한 것이었다. 세월이 지나 생활환경의 개선과 의료기술의 발달로 한센인의 수는 크게 줄었다. 신규 한센인은 1970년 1292명에 달했으나, 2012년에는 5명에 불과했다. 전체 한센인은 1969년 3만8229명이었으나, 2012년엔 1만2323명으로 줄었다. 하지만 지난해 기준으로 평균연령 73살에 이르는 한센인 대부분은 차별과 박해의 역사를 오롯이 경험한 세대다. 또한 이들에 대한 편견과 왜곡된 인식은 별로 변하지 않았다. 한센인 복지단체인 한국한센총연합회가 2012년 전국 모든 연령대에서 무작위로 1411명을 설문조사한 결과를 보면, ‘한센병은 치료가 가능’하고, ‘유전이 되지 않으며’, ‘전염성이 강하지 않다’는 세 가지 내용을 제대로 아는 비율이 각각 57.8%, 59.4%, 54.7%에 불과했다. 이는 2005년 국가인권위가 실시한 ‘한센병 인식조사’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9년 전 이 조사에서 400명의 응답자 중 86.7%가 한센인 자녀와 가족의 결혼을 반대했고, 한센인 격리수용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이 55.6%에 달했다. 한센인에 대한 인식 수준은 아직도 게걸음 중이다. 윤형중 기자 hj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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