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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반세기 넘은 진실 은폐…소멸시효 주장 정당한가

등록 2014-03-28 20:16수정 2014-03-29 10:58

“국민께 끼친 심려와 상처에 대해 가슴 깊이 반성하며, 엄숙한 마음으로 사법부의 새로운 출발을 준비하고자 한다.” 2005년 9월26일 당시 이용훈 대법원장은 취임식에서 처음으로 사법부의 과거사를 반성한다고 말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국민께 끼친 심려와 상처에 대해 가슴 깊이 반성하며, 엄숙한 마음으로 사법부의 새로운 출발을 준비하고자 한다.” 2005년 9월26일 당시 이용훈 대법원장은 취임식에서 처음으로 사법부의 과거사를 반성한다고 말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토요판] 커버스토리
과거사 청산 역행하는 사법부
과거사 사건 피해자들은 언제까지 국가에 손해배상을 요구할 수 있을까?

우리나라에는 일정 기간 동안 권리를 행사하지 않으면 그 사용을 제한하는 소멸시효 제도가 있다. 민법과 국가재정법은 국가의 불법행위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의 단기 소멸시효는 3년, 장기 소멸시효는 5년으로 규정한다. 그러나 고문, 학살 같은 중대한 인권침해 사건에는 소멸시효 기간을 두지 말아야 한다는 게 국제적인 원칙이다.(2005년 유엔 총회가 채택한 ‘국제인권법의 중대한 위반과 국제인도법의 심각한 위반의 피해자를 위한 구제 조치와 손해배상에 관한 기본원칙과 지침’) 실제 과거사 사건들에 소멸시효 기간을 일반 사건과 마찬가지로 엄격하게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은 계속 있었다.

과거사 사건은 독재·권위주의 정부 때 국가가 저지른 폭력, 학살, 의문사 등 반민주·반인권적 사건들이다. 크게 1950~1953년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사건과 독재정권 시기 고문과 조작간첩, 민주화운동 탄압 등 인권침해 사건으로 나뉜다. 2010년 마지막 과거사 위원회인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종료된 뒤 정부의 보수화로 후속 조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그래서 과거사 사건 피해자들은 현재 법원을 통해 아직 남은 과거사 청산을 요구하고 있다. 민간인 학살 유가족들은 보통 진실화해위 보고서 등을 바탕으로 국가를 상대로 한 민사 손해배상소송을 청구하고 있다. 반면 법원에서 확정판결을 받아 형을 살고 나온 인권침해 사건 피해자들은 형사 재심을 통해 무죄 확정판결을 받고 나서 국가에 민사 손해배상소송을 청구한다. 두 종류의 과거사 사건 재판에는 여러 쟁점이 있지만, 특히 이들의 발목을 잡은 건 소멸시효 기간이었다.

지난해 12월 대법원 판결은
손해배상 소송 소멸시효 기간을
법에 따라 통용되던 3년에서
6개월로 갑자기 크게 줄여

진실화해위 활동 종료되고
배·보상 특별법 제정도 실패
과거사 청산 최후 보루 된 법원이
이자 깎거나 소멸시효 내세워
손해배상금 안 주려 하고 있어

소멸시효는 국가가 과거사 사건에서 늘 주장해온 논리였다. ‘너무 늦게 소송을 제기했다’는 건데, 소송이 늦을 수밖에 없었던 과거사 사건의 특수성을 무시한 판단이었다. 각종 위원회를 통한 과거사 진실 규명이 2000년 들어 이뤄진 점을 고려하면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할 시점에 소멸시효는 이미 종료됐다. 그러나 국가가 반세기 가까운 세월 동안 사건을 조작하고 은폐했으며, 독재·권위주의 정부 시절 국가를 상대로 개인이 싸울 수 없었던 점은 고려되지 않았다.

처음 법원의 소멸시효에 대한 판단은 민간인 학살 사건과 인권침해 사건에서 희비가 엇갈렸다. 민간인 학살 사건에서 소멸시효에 대한 판단이 달라진 것은 2011년 6월30일 울산보도연맹 피해자 손해배상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나오면서부터다. ‘국가는 국민을 보호할 의무가 있고 적법한 절차 없이 국민의 생명을 박탈할 수 없다. 유족들에게 진상을 은폐한 국가가 이제 와서 뒤늦게 소멸시효를 주장해 그 채무이행을 거절하는 것은 부당하다.’ 국가가 잘못한 일에 소멸시효를 주장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이 판결 이후에야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은 배상금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지난해 5월16일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박병대 대법관)는 소멸시효 기간이 ‘진실화해위 결정일로부터 3년’을 넘을 수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로 진실화해위에 진실규명 신청을 하지 않았거나, 진실규명을 받았더라도 3년 안에 소송을 제기하지 못한 사람들은 손해배상금을 받을 수 없게 됐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자 강창일 국회의원(새정치민주연합)은 소멸시효에 관한 특례 규정을 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 일부개정안’을 지난 1월 발의했다.

반대로 형사 재심 무죄를 받고 손해배상을 청구한 과거사 사건에서는 소멸시효가 큰 쟁점이 되지 않아 왔다. 2007년 8월22일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28부(재판장 권택수)는 인혁당 재건위(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형수 유가족에게 이자를 포함한 637억여원의 손해배상금 지급을 결정했다. 형사 재심 뒤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한 과거사 사건에서 법원이 처음 손해배상금을 인정한 것이다. 국가가 항소·상고해 대법원에서 손해배상금 확정판결을 받은 건 <민족일보>와 아람회 사건이 처음이다. 이후 법원은 민법 등에 따라 재심 무죄 확정일로부터 3년을 통상적인 손해배상소송 소멸시효 기간으로 봤다.

그런데 지난해 대법원 판결로 3년으로 통용되던 소멸시효 기간이 6개월로 크게 줄었다. 지난해 12월12일 조작간첩 사건 피해자 손해배상소송에서 대법원 1부(주심 박병대 대법관)가 ‘형사 재심 무죄 확정일 또는 형사보상 결정 확정일로부터 6개월 내에 손해배상 청구의 소를 제기하면 상당한 기간 내에 권리를 행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명시한 것이다. 거꾸로 말하면 형사보상 결정 확정일부터 6개월이 넘으면 소송을 제기할 권리가 없다는 뜻이다. 소멸시효가 3년에서 6개월로 갑자기 줄어들자 피해자들은 혼란스러워졌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과거사위원회 이상희 변호사(법무법인 지향)는 “소멸시효 기간 3년을 법원이 계속 받아들이고 있어 모두 3년 안에만 소송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6개월로 줄어들어 비슷한 사건 피해자들의 판결이 들쑥날쑥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원섭 목사도 이 대법원 판결 전후로 1심과 2심의 판단이 뒤집혔다. 1심에서는 26억여원의 손해배상금을 인정했다가, 2심에서는 형사보상 결정 확정일인 2012년 5월18일에서 6개월이 지난 2012년 11월28일 소를 제기했다며 0원으로 바꿨다. 2005~2010년 활동한 진실화해위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재심에서 무죄를 받고, 손해배상소송을 진행중인 사건이 많아 정원섭 목사 같은 사례는 반복될 전망이다.

더 큰 문제는 사실상 과거사 청산의 최후의 보루가 된 사법부가 이에 역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마지막 과거사 위원회인 진실화해위는 2010년 활동 종료를 앞두고 정부에 배·보상 특별법 제정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이후 과거사 청산 의지가 약해지면서 입법은 실현되지 못했다. 이 때문에 현재 한국의 과거사 청산은 법원에 소송을 제기해 무죄 판결을 받고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방법만 남았다. 그런데 법원은 도리어 소멸시효 기간 등을 내세워 손해배상금을 주지 않으면서 피해자에게 ‘2차 가해’를 하고 있다. 사법부의 과거사 청산 의지는 인혁당 재건위 피해자 등의 이자를 깎은 2011년 1월부터 눈에 띄게 약화되기 시작됐다. 당시 대법원은 손해배상금 이자가 너무 많다며, 인혁당 재건위 피해자 77명에게 가지급한 436억원 중 250억원을 국가에 반납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안병욱(가톨릭대 명예교수) 전 진실화해위원장은 “수사기관이 고문 등을 통해 사건을 조작했더라도 1심, 2심, 최소한 대법원이 올바르게 판단했다면 지금 제기된 과거사는 과거사가 되지 않았다. 사법부는 과거사에 최종 책임이 있는데, 반성하기는커녕 소멸시효를 내세워 배상금을 주지 않으며 인권보호라는 본령을 망각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2005년 9월26일 당시 이용훈 대법원장은 취임식에서 사법부의 과거사를 깊이 반성한다고 말했다. “독재와 권위주의 시대를 지나면서 사법부가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하고 인권보장 최후 보루로서의 소임을 다하지 못한 불행한 과거가 있다. 사법부가 행한 법의 선언에 오류가 없었는지, 외부 영향으로 정의가 왜곡되지는 않았는지 돌이켜보고 권위주의 시대에 국민 위에 군림하던 그릇된 유산을 깨끗이 청산해야 한다.” 법원은 불행한 과거를 반복하려 하는 걸까.

김민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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