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위, 경찰청장에 개선 권고
경찰청 “범위·대상 제한하겠다”
경찰청 “범위·대상 제한하겠다”
우아무개(39)씨는 지난해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등을 위반했으니 조사받으러 나오라는 출석요구서를 받고 경찰서에 갔다가 자신이 찍힌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다. 경찰은 집회 참가자들과 함께 앉아 있거나 인도에서 집회를 구경하는 등 불법행위와 무관한 장면이 찍힌 사진 수십장을 증거 자료로 제시했다. 우씨는 “도로 행진이 위법하다면 사진이 찍힐 수 있다. 그런데 합법 집회 장면까지 찍힌 걸 보니 끔찍한 기분이 들었다”고 했다.
국가인권위원회(위원장 현병철)가 9일 경찰의 무분별한 채증 활동이 헌법이 보장하는 집회와 시위의 자유를 침해할 소지가 있다며 채증 범위와 대상을 제한하라고 경찰청장에게 권고했다. 인권위가 채증 활동에 기본권 침해의 소지가 있다고 보고 개선을 권고한 것은 처음이다. 이에 경찰청은 “앞으로 구체적 채증 기준을 마련하는 등 주요 권고 내용을 수용하겠다”고 밝혔다.
경찰청 예규인 ‘채증활동규칙’에는 ‘불법 상황’ 또는 ‘불법이 우려되는 상황’에서 채증을 하도록 돼 있다. 하지만 경찰은 ‘불법 우려 상황’을 임의로 확대해석해 합법적 집회·시위까지 사복 경찰관 등을 보내 채증 활동을 벌여왔다. 경찰은 스마트폰으로 찍은 채증 사진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리거나 채증 사진 전시회까지 열 정도로 인권에 무감각한 태도를 보여 왔다.
인권위는 1999년 대법원 판례를 들어, 범행이 행해지고 있거나 행해진 직후, 증거 보전의 필요성과 긴급성이 인정되는 경우로만 채증을 제한하라고 권고했다. 집회·시위 준비 단계나 합법적 행위에 대한 ‘사전 채증’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또 사복 채증 요원의 비공개적 채증, 등록 장비가 아닌 개인 휴대전화 등을 통한 채증도 중단하라고 권고했다. 수사가 끝난 뒤 채증 자료가 제대로 삭제·폐기됐는지 등을 확인할 외부 전문가의 참여도 권고했다. 박병수 인권위 조사총괄과 조사관은 “채증은 명확한 규정 아래 예외적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설명했다.
인권단체 활동가들은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2008년부터 채증 인력과 장비 등이 크게 늘었다고 지적한다.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경찰청은 올해 카메라 21개(개당 1180만원), 망원렌즈 3개(개당 1430만원) 등 5억7920만원어치의 채증 장비 구입 계획을 밝힌 바 있다.
경찰청은 인권위 권고에 대해 “‘불법 우려 상황’의 구체적 기준을 마련해 필요·최소한의 범위에서 채증을 하는 등 적극 수용하겠다”면서도 “채증 자료는 정보공개법에 따른 ‘비공개 대상 정보’이기 때문에 관리에 외부 전문가를 참여시키라는 내용은 수용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명숙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는 “채증 요원의 경찰 정복 착용 등 구체적이고 실효성 있는 기준이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진명선 송호균 이재욱 기자 tora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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