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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그 옛날 아버지도 나처럼 미안하다 말하고 싶었을까

등록 2014-04-18 19:34수정 2014-04-20 12:22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mayseoul@naver.com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mayseoul@naver.com
[토요판] 가족
어떤 부자의 연대기
▶ 지금도 가끔 아버지께 “옛날에 왜 그러셨어요” 묻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아버지는 대답을 하지 않으시겠지요. 어린 시절 가족들에게 화내는 아버지를 보며 ‘적어도 저런 아버지는 되지 말자’고 다짐하던 아들은 어른이 되어 한 여자의 남편이 됩니다. 가족들을 위해 욕을 먹으며 돈을 버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아버지를 닮아가는 듯한 내 모습을 보며 자괴감도 밀려옵니다. ‘나는 과연 좋은 남편, 아버지가 될 수 있을까.’ 걱정과 함께 어린 시절 내 아버지에 대한 연민이 듭니다.

어린 시절 어머니와 아버지가 싸우기 시작하면 전쟁은 밤늦도록 끝나지 않았다.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워 눈을 질끈 감아도 방 밖으로 쏘아대는 고성이 선명하게 들렸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귀를 막아도 악다구니를 듣지 않을 방법이 없었다. ‘싸움은 언제 끝날까. 언젠가 어머니와 아버지가 헤어지면 난 누구와 살아야 되나.’ 밤은 길었다. 두려움에 떨며 이불 속에서 이런저런 걱정으로 시간을 보내다 어느덧 잠이 들었다. 사랑으로 가득한 엄마와 아빠, 해맑게 웃는 아이들…. 우리 집은 그런 가족과 거리가 멀었다.

부모님이 싸운 다음날, 학교에 가도 귀에 수업이 들어오지 않았다. 수업을 마치고 다른 아이들이 신발주머니를 흔들며 신나게 집으로 돌아가면 혼자 터벅터벅 힘없이 집에 도착했다. 혹시나 부모님이 화해하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현실은 늘 그대로였다. 아버지는 식탁에 앉아 욕설을 중얼거리거나 라면에 소주를 마시며 집이 떠나가도록 이상한 트로트를 불렀다. 어머니는 방에 드러누워 꿈쩍도 않았다. 집은 장례식장이었고, 나이 어린 나는 빈소를 방문하는 어른 조문객처럼 굴어야 했다. “다녀왔습니다.” 이리저리 눈치를 보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인사를 해도 부모님은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형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방구석에 앉아 만화책을 뒤적이며 초조함을 달랬다. 늦게 형이 들어오면 그제야 “어떻게 해야 돼?” 구원의 눈길을 보냈다. “라면이나 끓여 먹자.” 세살 위인 형은 뾰족한 대안을 내놓지 못했다.

밤마다 어머니에게 악다구니를
퍼붓던 아버지 원망한 어린 시절
나는 아버지 같은 남편은
절대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수시로 팀원에게 욕하는 팀장
회식 자리에선 협박을 들었다
그날 집에서 아내를 울린 뒤
그 옛날 아버지를 떠올렸다

전쟁과 휴전을 수없이 반복하던 우리 집은 내가 어른이 돼서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대체 아버지랑 왜 사는 거야?” 우리 형제는 늙어서도 마음 편할 날 없는 어머니에게 이혼을 권했다. “아버지도 알고 보면 불쌍한 사람이야. 사랑받지 못하고 자라서 저렇지 않을까. 걱정거리 없는 집이 어디 있겠니. 우리 집보다 더한 집도 있다고 하더라.”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하며 아버지를 감쌌지만 측은지심은 오래가지 않았다. 한번 싸우기 시작하면 다시 그들은 원수가 됐다. 싸움의 원인은 주로 아버지에게 있었다. 나는 아버지를 원망하며 자랐다. 폭군 같았던 아버지도 일을 할 수 없을 만큼 쇠약해졌고 어느새 할아버지가 됐다. 지금까지 우리는 가족으로 남아 있다.

불안한 가정 가운데 자란 나는 아버지 같은 남편은 되지 않아야겠다고 늘 다짐했다. 그런 내가 한 여자의 남편 그리고 딸아이의 아버지가 됐다. 이들을 위해 매일 직장이라는 곳에 출근해 돈을 번다. 욕을 일삼는 상사, 술을 들이부어야만 하는 고독한 회식 속에서 나의 가정생활도 늘 행복하지만은 않다. 어릴 때 아버지처럼 되지 않을 거라던 다짐을 지키기란 쉽지 않다.

지난 토요일 아침 아내와 나는 최악이었다. 지극히 사소한 갈등이 고성으로 이어졌고, 아내는 방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이제 더듬더듬 몇 마디 말을 하기 시작한 딸도 아내에게 매달려 울었다.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내가 두 여자를 울렸구나. 더군다나 내일은 아내의 생일인데.’ 아내가 아이를 데리고 거실로 나갔다. 방에 혼자 남은 나는 머리를 싸맸다. ‘겨우 이런 남편, 아빠가 되려고 결혼을 했나.’ 스스로 경멸스러웠다. 밀려오는 자괴감과 함께 어린 시절 이불 속에서 귀를 막고 부모님의 싸움을 듣지 않으려 몸부림쳤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낡은 필름처럼 머릿속에서 돌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리고 거실로 나가니 아내는 소파에 얼굴을 파묻은 채 울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도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미안해. 내가 정말 잘못했어.’ 한마디면 해결될 걸 하지 못했다. 그날 무겁고도 어두운 공기가 내내 집안을 감쌌다. 변명을 하자면, 직장생활에서 받은 인격 모독과 스트레스가 그날 가족에게로 번진 것이었다.

“병신 새끼” “멍청한 새끼” 최근 인사이동으로 바뀐 팀장은 수시로 욕을 해댔다. 다른 팀에 있었을 땐 나름 일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는데 이번 팀장은 입에서 튀어나오는 대로 지껄였다. 욕하는 대상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팀원 모두 수시로 욕을 먹었다.

지난 목요일은 퇴근 직전 갑작스럽게 회식이 잡혔다. 오랜만에 정시 퇴근해 운동을 하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회식 자리에서 불만을 눌러 담은 채 술을 마셨고, 술자리는 2차로 이어졌다. 불콰하게 술이 취한 팀장은 “무엇이든 좋으니 불만을 이야기해보라”고 말했다. 나는 눈치 없이 돌직구를 날렸다. “팀원들에게 욕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술자리에서 머리를 때리는 일도 없었으면 합니다.”

방금 전까지 술에 취해 해롱해롱하던 팀장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졌다. 권위적인 팀장은 자신에 대한 지적을 들을 줄 몰랐다. “욕을 하는 것은 니가 잘못했을 때, 뒤끝 없이 혼내기 위함이야. 술자리에서 가볍게 머리를 때리는 건 나 나름의 애정표현이고. 나는 이런 방식밖에 잘 모르는 사람이야.” 전혀 수긍할 수 없었다. 친해지려고 친구를 괴롭히는 중학교 양아치나 다름없는 행동 아닌가. 방금 전까지 팀원들과 ‘소통하는 척’하던 팀장은 발언의 수위를 높여 갔다. 말도 안 되는 논리를 내세우며 모든 귀책사유를 내게 돌렸다. “정 이런 방법을 원하지 않으면 다른 방법으로 널 대하는 수밖에 없어. 앞으로 일을 잘 못하면 시말서를 쓰면 되겠군. 그걸 받아 인사팀에 제출하겠어.” 팀장에게 대들지 말라는 경고나 다름없었다. 술자리는 어색하게 끝났다. 나는 더 이상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고 침묵만 지켰다.

회식 다음날엔 피곤하고 멍한 상태로 일을 했다. ‘이 회사를 계속 다녀야 하나, 팀을 옮겨야 하나.’ 고민은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겨우 일을 마치고 지끈거리는 두통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문을 열자 집 안에는 청소며 설거지며 무엇 하나 제대로 된 게 없었다. 집이 왜 이렇게 더럽냐며 아내에게 짜증을 냈다. 사실 아이를 돌보다 보면 깨끗하게 청소하기 힘들다는 걸 잘 알면서도 말이다. 짜증은 다음날인 토요일까지 이어졌고 결국 고성으로 아내를 울려버리고 말았다.

“나는 좋은 남편이야? 괜찮은 아빠야?” 밥을 먹거나 텔레비전을 볼 때 가끔 아내에게 질문을 던지곤 한다. “그럼, 좋은 남편이고 아빠지. 우리를 사랑하고 또 착실하게 살고 있잖아.” 이렇게 늘 긍정적인 말로 용기를 북돋아 주던 아내에게 모진 말을 하고 만 것이다.

내가 과연 좋은 아버지이고 남편인지 요즘 점점 자신이 없다. 그토록 이해할 수 없던 내 아버지가 떠오른다. 나의 아버지는 가족들을 바라볼 때 어떤 마음이었을지. 그 또한 스스로 경멸스러웠던 때는 없었을지. 나처럼 가족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던, 용기 없는 아버지는 아니었을까. 아버지가 되어서야 어린 시절 내 아버지를 헤아려본다. 조금은 그에게 연민이 든다.

남편이고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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