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가족
‘폭력 아들’의 개과천선
‘폭력 아들’의 개과천선
▶ 폭력은 폭력을 낳기 마련입니다. 새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린 아들은 그를 증오하면서도 닮아갑니다. 아들의 분노는 10년 전, 새아버지와 결혼한 어머니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폭력에 시달리던 어머니는 지금 병원에 입원한 아들을 간호하고 있습니다. 그나마 철이 든 아들은 어머니에게 용돈이 든 봉투를 내밀었습니다. 이 가족에겐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요.
서울에서 공부를 하던 나는 모처럼 고향집에 내려갔다. 한참 자고 있는데 거실에서 “쿵” 소리가 나서 나가보니 형이 거실에서 식칼을 휘두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다 죽여버린다!” 형에게 달려들어 식칼을 빼앗으니 있는 대로 때려 부숴댔다. 어머니는 울고불고 형의 바짓가랑이를 붙들었고, 나는 형의 팔에 매달렸다. 전쟁 같던 밤은 그렇게 지나갔다. 다음날 형은 “기억이 안 난다”고 했다. “무슨 일이 있는 거냐”고 물어도 “없다”고만 했다. 만취상태에서 형이 실수를 한 것이겠지 하며 서울로 올라왔다. 10년 전 그날은 가족을 향한 형의 첫 폭력이었다.
그날로부터 한달쯤 지났을까. 새벽에 어머니가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었다. “네 형이 난리다. 큰일 났다.” 새벽에 택시를 잡아타고 고향집에 갈 수도 없고, “피해 있으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알고보니 어머니는 한달간 꾸준히 형의 취중 폭력에 시달리고 있었다. 어머니의 머리채를 잡고 얼굴을 벽에 찧어 코피가 터진 날도 많았다. 온몸이 멍투성이가 되도록 때리고 짓밟고 목을 졸랐다. “제발 살려주세요.” 어머니는 형의 손찌검을 피해 맨발로 뛰쳐나와 엘리베이터 안에서 정신을 차려보면 다리 사이로 소변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고 했다. 어머니는 형이 늦은 시간까지 들어오지 않으면 술을 먹었을까봐 겁이 나 잠을 잘 수 없었고 하루가 다르게 수척해져 갔다.
어머니와 재혼한 새아버지는
술만 취하면 폭력을 휘둘렀다
어머니가 이혼하자 이번에는
형이 새아버지를 닮아갔다
어머니 다치고 형 결혼 뒤에야
화해 대신 휴전상태 유지한다
어버이날에 봉투도 받았단다
어머니는 그래도 형 걱정한다 “엄마, 저 미친 인간 경찰에 신고하거나 정신병원에 입원시키자.” 어머니를 설득할 때마다 그래도 아들을 감쌌다. “저도 왜 그런지 모르겠다고 그러는데 어떻게 그래. 다시는 안 그런다고 했으니까 조금 더 참아보자.” 나는 못난 아들이었다. 상황이 이런데도 어머니를 서울로 모셔오지 않았다. 어머니가 서울로 온다면, 치 떨리도록 싫은 가족의 굴레에서 영영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았다. 어떤 날은 새벽에 걸려오는 어머니의 전화를 모른척했고 밤새 죄책감과 걱정에 잠 못 이루더라도 그 이기적인 방법마저 없다면 나 또한 무너져버릴 것 같았다. 형의 폭력은 새아버지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일찌감치 남편과 사별한 어머니는 아들 둘을 키우기 위해 재혼을 했다. 그 남자는 술에 취하면 우리가 보는 앞에서 난동을 부리고 어머니를 때렸다. 그 남자에게 맞아 시퍼렇게 멍든 눈을 짙은 화장으로 감추고 진학 상담을 위해 학교에 온 적도 있었다. 그 남자는 우리 앞에서 식칼을 휘두르며 “같이 죽자”며 가스 밸브를 열고 불을 붙이려 했다. 어린 나는 그 광경을 보며 엉엉 울었고 그 남자에게 주먹을 쥐고 대들던 형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그때의 일이 형에게는 트라우마를 줬던 것 같다. 형은 그 모든 게 어머니의 잘못된 선택 때문이라고 여겼다. 어머니와 새아버지의 헤어짐으로 우리는 폭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내가 형을 위해 할 수 있는 작은 일은 정신과 병원에 데려가는 일이었다. “정신과 진료를 받아보자. 형도 이렇게 살기 싫잖아.” 형은 내가 설득할 때마다 “안 그러려고 해도 어머니의 재혼이 너무 원망스럽다”고 했다. 형의 주기적인 정신과 상담 치료에도 불구하고 폭력은 잦아들지 않았다. 동네에 소문이 퍼졌고 이웃들은 우리집에서 고성이 나면 경찰에 신고하는 것으로 어머니를 도왔다. 1년 넘게 폭력에 시달리던 어느 날, 어머니는 형과 떨어질 방법을 찾아냈다. “다른 지방에 숙식 제공되는 식당 찬모 자리 있다고 해서 거기 가려고. 가서 일주일에 한번씩 올라올 거야.” 형은 어머니가 지방 식당에서 일주일에 한번 올라오는 날에 맞춰 난동을 부렸다. 그것도 한껏 응축된 분노를 터뜨리듯 강도는 더욱 거세졌다. 결국 어머니는 일주일에 한번 집으로 돌아오는 것도 포기해야 했다. 젊어서 남편을 잃고 평생 시장과 식당을 오가며 어렵게 마련한 집 대신 식당에 딸린 쪽방이 어머니의 유일한 안식처였다. “밥은 잘 먹고 있지? 그래도 난 여기가 마음 편해서 좋아.” 어머니는 가끔 전화로 내게 안부를 물었다. 그로부터 어머니가 집으로 돌아오게 되기까지 몇 년이 걸렸다. 형이 변해서가 아니라 어머니의 건강이 급격히 쇠약해지면서다. 어머니는 고된 식당일을 하다가 허리를 크게 다쳤다. 다리를 뻗지도 펴지도 못할 허리 통증을 파스 한장으로 버티다 병이 커졌다. 급기야 쌀이 가득 든 고무대야를 들다가 식당 주방에 쓰러졌다. 의사는 수술도 쉽지 않다고 했다. 하는 수 없이 약물치료를 받았지만 어머니는 걸어서 운동장 한 바퀴 도는 일도 힘겨워했다. 환갑을 겨우 넘긴 나이에 몸이 아파 집 안에서만 주로 지냈고 우울증이 심해져 수면제에 의존하는 날도 많아졌다. 허약해진 어머니 앞에서 형의 폭력은 잦아들었다. 그렇다고 완전히 화해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도 어머니와 형은 사소한 것을 놓고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도저히 말이 안 통한다”며 둘 중 하나가 자리를 피해야 대화를 끝낸다. 두 사람은 형이 결혼해 분가를 한 뒤에 연중행사처럼 1년에 몇 차례 만나는 것으로 관계를 정리했다. 형은 결혼을 하면서 안정을 찾았다. 폭력 성향이 강한 형이 형수를 때릴까 걱정도 했지만 오히려 형수는 야수 같던 형을 잠잠하게 만들었다. 형은 결혼으로 자신만의 온전한 가족을 만들었고 그 안에서 위로를 받는 듯했다. 어머니와 형은 악화될 것 없고 나아질 것도 없는 휴전상태를 유지했다. 휴전상태에서도 두 사람은 여전히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살았다. 며칠 전 형이 일을 하다 허리를 다쳐 수술을 받게 됐다. 어머니는 회사에 출근한 며느리 대신 불편한 몸으로 형을 간호하러 병원을 다녔다. 형에게 맞고 살던 엄마가 그를 돌보러 가는 걸 보며 마음이 아려왔다. “뭐가 예쁘다고 거길 가? 엄마 몸이나 챙기지?” “걷지도 못한다는데 어떻게 혼자 둬. 병원비도 걱정이고….” 어머니는 말끝을 흐렸다. 그러고 보니 형은 지난달 어버이날에 어머니를 찾아갔다. 먹고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오랜만에 전화를 건 내게 어머니는 “야, 니 형이 5만원 봉투에 담아 주더라”며 자랑했다. 어머니는, 어머니였다. 못난 아들
술만 취하면 폭력을 휘둘렀다
어머니가 이혼하자 이번에는
형이 새아버지를 닮아갔다
어머니 다치고 형 결혼 뒤에야
화해 대신 휴전상태 유지한다
어버이날에 봉투도 받았단다
어머니는 그래도 형 걱정한다 “엄마, 저 미친 인간 경찰에 신고하거나 정신병원에 입원시키자.” 어머니를 설득할 때마다 그래도 아들을 감쌌다. “저도 왜 그런지 모르겠다고 그러는데 어떻게 그래. 다시는 안 그런다고 했으니까 조금 더 참아보자.” 나는 못난 아들이었다. 상황이 이런데도 어머니를 서울로 모셔오지 않았다. 어머니가 서울로 온다면, 치 떨리도록 싫은 가족의 굴레에서 영영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았다. 어떤 날은 새벽에 걸려오는 어머니의 전화를 모른척했고 밤새 죄책감과 걱정에 잠 못 이루더라도 그 이기적인 방법마저 없다면 나 또한 무너져버릴 것 같았다. 형의 폭력은 새아버지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일찌감치 남편과 사별한 어머니는 아들 둘을 키우기 위해 재혼을 했다. 그 남자는 술에 취하면 우리가 보는 앞에서 난동을 부리고 어머니를 때렸다. 그 남자에게 맞아 시퍼렇게 멍든 눈을 짙은 화장으로 감추고 진학 상담을 위해 학교에 온 적도 있었다. 그 남자는 우리 앞에서 식칼을 휘두르며 “같이 죽자”며 가스 밸브를 열고 불을 붙이려 했다. 어린 나는 그 광경을 보며 엉엉 울었고 그 남자에게 주먹을 쥐고 대들던 형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그때의 일이 형에게는 트라우마를 줬던 것 같다. 형은 그 모든 게 어머니의 잘못된 선택 때문이라고 여겼다. 어머니와 새아버지의 헤어짐으로 우리는 폭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내가 형을 위해 할 수 있는 작은 일은 정신과 병원에 데려가는 일이었다. “정신과 진료를 받아보자. 형도 이렇게 살기 싫잖아.” 형은 내가 설득할 때마다 “안 그러려고 해도 어머니의 재혼이 너무 원망스럽다”고 했다. 형의 주기적인 정신과 상담 치료에도 불구하고 폭력은 잦아들지 않았다. 동네에 소문이 퍼졌고 이웃들은 우리집에서 고성이 나면 경찰에 신고하는 것으로 어머니를 도왔다. 1년 넘게 폭력에 시달리던 어느 날, 어머니는 형과 떨어질 방법을 찾아냈다. “다른 지방에 숙식 제공되는 식당 찬모 자리 있다고 해서 거기 가려고. 가서 일주일에 한번씩 올라올 거야.” 형은 어머니가 지방 식당에서 일주일에 한번 올라오는 날에 맞춰 난동을 부렸다. 그것도 한껏 응축된 분노를 터뜨리듯 강도는 더욱 거세졌다. 결국 어머니는 일주일에 한번 집으로 돌아오는 것도 포기해야 했다. 젊어서 남편을 잃고 평생 시장과 식당을 오가며 어렵게 마련한 집 대신 식당에 딸린 쪽방이 어머니의 유일한 안식처였다. “밥은 잘 먹고 있지? 그래도 난 여기가 마음 편해서 좋아.” 어머니는 가끔 전화로 내게 안부를 물었다. 그로부터 어머니가 집으로 돌아오게 되기까지 몇 년이 걸렸다. 형이 변해서가 아니라 어머니의 건강이 급격히 쇠약해지면서다. 어머니는 고된 식당일을 하다가 허리를 크게 다쳤다. 다리를 뻗지도 펴지도 못할 허리 통증을 파스 한장으로 버티다 병이 커졌다. 급기야 쌀이 가득 든 고무대야를 들다가 식당 주방에 쓰러졌다. 의사는 수술도 쉽지 않다고 했다. 하는 수 없이 약물치료를 받았지만 어머니는 걸어서 운동장 한 바퀴 도는 일도 힘겨워했다. 환갑을 겨우 넘긴 나이에 몸이 아파 집 안에서만 주로 지냈고 우울증이 심해져 수면제에 의존하는 날도 많아졌다. 허약해진 어머니 앞에서 형의 폭력은 잦아들었다. 그렇다고 완전히 화해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도 어머니와 형은 사소한 것을 놓고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도저히 말이 안 통한다”며 둘 중 하나가 자리를 피해야 대화를 끝낸다. 두 사람은 형이 결혼해 분가를 한 뒤에 연중행사처럼 1년에 몇 차례 만나는 것으로 관계를 정리했다. 형은 결혼을 하면서 안정을 찾았다. 폭력 성향이 강한 형이 형수를 때릴까 걱정도 했지만 오히려 형수는 야수 같던 형을 잠잠하게 만들었다. 형은 결혼으로 자신만의 온전한 가족을 만들었고 그 안에서 위로를 받는 듯했다. 어머니와 형은 악화될 것 없고 나아질 것도 없는 휴전상태를 유지했다. 휴전상태에서도 두 사람은 여전히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살았다. 며칠 전 형이 일을 하다 허리를 다쳐 수술을 받게 됐다. 어머니는 회사에 출근한 며느리 대신 불편한 몸으로 형을 간호하러 병원을 다녔다. 형에게 맞고 살던 엄마가 그를 돌보러 가는 걸 보며 마음이 아려왔다. “뭐가 예쁘다고 거길 가? 엄마 몸이나 챙기지?” “걷지도 못한다는데 어떻게 혼자 둬. 병원비도 걱정이고….” 어머니는 말끝을 흐렸다. 그러고 보니 형은 지난달 어버이날에 어머니를 찾아갔다. 먹고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오랜만에 전화를 건 내게 어머니는 “야, 니 형이 5만원 봉투에 담아 주더라”며 자랑했다. 어머니는, 어머니였다. 못난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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