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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조국 경제 발전에 기여한 소녀들의 충정은…”

등록 2014-07-04 20:44수정 2014-07-05 14:51

정부는 미군 기지촌과 기지촌 여성들을 직접 관리했다. 낙검자 수용소로 성병에 걸린 여성들을 싣고 와 강제치료도 했다. 동두천시 소요산 입구에 폐허로 방치돼 있는 낙검자 수용소의 외부 모습. 허재현 기자
정부는 미군 기지촌과 기지촌 여성들을 직접 관리했다. 낙검자 수용소로 성병에 걸린 여성들을 싣고 와 강제치료도 했다. 동두천시 소요산 입구에 폐허로 방치돼 있는 낙검자 수용소의 외부 모습. 허재현 기자
[토요판] 커버스토리
기지촌 여성과 국가 책임
위안부라는 단어는 옛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인다. 꽃다운 나이에 일본 제국주의 전쟁터 한복판에 성노예로 끌려간 피해 여성들을 가리키는 용어다. 불과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우리 사회에서 위안부라는 단어는 비단 일본군 위안부만 지칭하는 용어가 아니었다. 글자 그대로 ‘군인을 위안하는 직업을 가진 여성’을 뜻하는 단어였다. 일본군 위안부, 한국군 위안부, 미군 위안부 모두 위안부로 불렸다.

‘미군 위안부’의 존재에 놀라움을 느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는 새롭게 우리 앞에 등장한 존재가 아니다. 우리 사회가 흔히 ‘기지촌 여성’으로 기억하는 바로 그들일 뿐이다. 실재함을 알면서도 애써 드러내지 않던 존재, 바로 그들이다.

‘미군 위안부’라는 용어는 기지촌 여성의 인권 문제를 강조하기 위해 시민단체가 전략적 혹은 은유적으로 사용하는 용어가 아니다. 엄연히 정부와 언론은 기지촌 여성을 위안부 여성으로 지칭해왔다. ‘미군 위안부’는 관행과 제도로서 존재했다. 1961년 경향신문, 1961년 경기도청 공문서, 1973년 의정부시 공문서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들이 있다.

“유엔군 상대 위안부 성병관리사업계획에 따라 등록을 실시, 그 사업치고는 명칭이 요란스러워”(경향신문 1961년 9월15일 1면)

“유엔군 간이특수음식점 영업허가 사무 취급 세부 기준 수립. (중략) 마. 본 영업소는 동지구에 유동하는 위안부를 접대부로 고용하고…(중략)”(1961년 9월15일 경기도청 기안지)

“제1조 (목적) 이 조례는 위안부를 검진하여 낙검자(성병검진을 통과하지 못한 성병 환자를 일컬음)를 격리 수용 치료하기 위한 성병관리소의 설치 및…(중략)”(1973년 6월9일 공포한 의정부시 성병관리소 설치 개정 조례)

미군과 한국쪽 30여명으로 구성된
한미친선위원회는 기지촌 여성들의
정신·위생·영어회화 교육 협의
경기도 당국은 유엔군 특수업소의
시설개선을 인천시에 지시하기도

71~72년 미군의 철군 움직임에
청와대에서는 기지촌 정화사업
국가는 그 여성들을 한미동맹과
외화획득의 전진기지로 생각
장관이 ‘소녀 충정’ 표현할 정도

한국전쟁 때도 ‘군 위안소’ 설치

기지촌 여성들은 왜 지금 국가의 책임을 묻기 시작한 것일까. 그동안 일부 증언을 통해서만 알음알음 알려졌던 국가의 폭력이 기록으로 확인되고 있다. 미군 위안시설의 설치와 관리에 정부가 깊숙이 개입한 자료들이 그것이다.

일본군 위안소는 가장 노골적으로 국가가 개입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일본군 위안부 연구의 권위자인 요시미 요시아키 주오대 교수가 쓴 <종군위안부 자료집>(1992)을 보면, 일본군 위안소의 형태는 크게 네가지로 분류된다. 첫째는 군 직영의 위안소, 둘째는 군이 인가를 내준 위안소, 셋째가 군이 지정한 민간 매춘숙, 넷째가 군인이 이용한 순수 민간 매춘숙이다. 군 위안소의 모습은 도시와 전선의 상황에 따라 양태가 달라졌다.

한국전쟁 당시 ‘한국군 위안소’도 국가가 직접 설치했다. 1951년 여름께 설치돼 1954년 3월 해산됐다. 만 4년 가까이 육군본부가 서울, 강릉, 춘천, 원주 등에 군 위안소를 운영했다. 1956년 육군본부가 편찬한 ‘후방전사’에 그 기록이 남아 있다. 채명신 장군의 회고록 <사선을 넘고 넘어>(매일경제신문사, 1994년)에도 군 위안소를 군이 직접 통제하고 관리한 정황이 나온다. 책에는 “우리 육군은 사기 진작을 위해 60여명을 1개 중대로 하는 위안부대를 서너개 운용하고 있었다”고 적혀 있다.

1948년 공창제가 폐지되고 성매매가 금지된 상황에서 국가가 군 위안소를 운영하는 것은 불법이었다. 군은 “국가 시책에 역행하는 모순된 활동”(후방전사 148쪽)이라고 규정하고 1954년 위안소를 폐지했다. 다만, 한국군 위안소는 피해자의 증언이 없고 기록으로만 확인되고 있다. 한국 정부는 한국군 위안부의 존재를 인정도 부인도 하지 않는 상태다.

불법성을 인식한 탓인지 미군 위안시설은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위안시설의 지역과 구조는 국가가 계획하되 민간 성매매업자들이 정부의 지침에 따라 위안시설을 운영하는 형태를 띠었다.

박정희 정권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뒤 1961년 11월9일 윤락행위방지법을 제정했다. 윤락방지법은 1948년 공창제 폐지령에서 나아가 처벌 사항을 상세하게 기재했다. 그러나 모순적이게도 박정희 정권은 이듬해 6월 성매매를 사실상 허용하는 특정지구를 전국 104개소에 설치했고, 그중 9개소를 서울에, 61개소를 경기도에 할당했다. 이 특수 지구는 상당수가 미군 기지 인근이었다. 미군 전용 특수 업소는 미군 부대 반경 2㎞ 이내로 제한됐다.

정권의 정당성이 취약했던 박정희 정권은 미국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던 처지였다. 미군 기지 인근에서 성매매를 허용한 것은 미군의 요구사항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1962년 9월10일치 <경향신문> 7면을 보면, 휴 P 해리스 미1군단장과 박창원 경기도지사 등 미군과 한국 쪽 30여명 인사들은 한미친선위원회를 열어 기지촌 여성 대책을 논의했다. 미군과 한국 쪽 인사들은 “윤락여성 전원에게 28시간 정신, 미용, 위생 및 영어회화 등의 교육을 실시한다. 법정검진을 철저히 하고 검진을 필한 자에 한하여 위안부 행위를 허용한다”는 내용을 협의했다.

지방 정부는 구체적으로 위안소 시설의 규격을 마련하기도 했다. 1963년 4월24일치 <인천신문> 3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인천시당국은 유엔군 전용 간이특수업소의 시설을 개선하도록 하라는 경기도당국의 지시에 따라 시내 18개소에 대하여 6월30일까지 시설을 개선하도록 조치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중략) 특수업소당 업태부는 15명이 있어야 하고 거실은 20개인데 1실당 평수는 1평 반 이상으로 미달 시는 6월30일까지 증축하되 건물은 영구건물(가건물 불가)이어야 한다.”

당국은 기지촌 여성들을 위안소에 집단 수용하기를 바랐지만 예산상 문제로 민간에 시설 설립을 맡긴 것으로 보인다. 1961년 9월14일 작성된 경기도청 기안지(유엔군 간이특수음식점 영업허가 사무취급 세부기준 수립)에는, “현지 주둔 유엔군에 대한 위안 또는 사기 앙양 면을 고려하여 위안부들의 집단 수용시설이 시급하나 막대한 예산이 소요되므로 실현 가능성이 희박함”이라고 관계 당국의 판단을 적시했다. 인천시는 기지촌 여성들이 위안시설 집단 수용을 거부하면 처벌할 계획도 세웠다.

동두천시 소요산 입구에 폐허로 방치돼 있는 낙검자 수용소의 내부 모습. 허재현 기자
동두천시 소요산 입구에 폐허로 방치돼 있는 낙검자 수용소의 내부 모습. 허재현 기자
잇단 페니실린 쇼크사에 의사들은 면책

당국은 지역별 주둔 미군 수에 따라 업소(위안소)의 수 조절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1962년 1월25일 경기도청 공문(유엔군용 간이특수음식점 영업위생행정사무취급요령)을 보면 그 흔적이 나온다.

예를 들어, 이 공문에 첨부된 표(부록2. ‘유엔군용 간이특수음식점 허가 정원 대비표)에는 ‘인천시 유엔군 수 8500명, 1일 추산 외출 인원 1700명, 업소 출입자 수 1270명, 필요 업소 평수 1270, 필요 업소 수 16, 기허가 업소 수 14, 대비경감 2’라고 적혀 있다. ‘부대를 외출해 위안(업)소에 갈 미군이 하루에 1270명이라서 필요한 위안소는 16개인 반면 현재 14개 위안소밖에 없으니 2개가 더 필요하다’는 뜻이다. 이런 식의 기록이 면단위별로 촘촘하게 표로 정리돼 있다.

이상의 내용으로 봤을 때 ‘미군 위안부 시설은 일본군 위안소와 설립·운영 방식은 다르지만 그 저변에 깔린 구조는 유사하다’는 것이 이나영 교수(중앙대 사회학과) 등 기지촌 문제를 연구하는 학계의 견해다.

기지촌 여성들에 대한 국가의 관리와 통제는 1970년대 박정희 정부가 미군 감축의 위기감을 느끼면서 그 정도가 심해진다. 1969년 7월24일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아시아에서 미군을 축소하겠다는 내용의 독트린을 발표한다. 정부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미국의 변경된 정책에 조처를 취해야 했고(<동맹 속의 섹스> 108~109쪽. 1997. 캐서린 문) 결국, 정부가 나서 기지촌 정화운동을 벌였다.

한미합동위원회 한국 쪽 간사로 활동했던 김기조씨는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71년과 72년 두번 캠프 험프리를 방문해 한국 쪽 분과위원회 위원장의 자격으로 회의에 참석하였다. 그 시기에 미군이 철군을 강행하려 하자, 당시 청와대에서는 1억원의 예산을 하사하여 의정부, 동두천 그리고 안정리 등의 기지촌 정화사업을 추진하였다. 당시 캠프 험프리의 사령관은 베스트 대령이었다. 그는 미군들의 휴식과 휴양을 위한 기지촌 서비스 질의 향상을 요구했고, 한국 쪽은 미군의 계속적인 주둔을 요망했기 때문에 그 요구를 거의 그대로 수용하였다.”(햇살사회복지회 소식지 10호. 2011)

정부는 기지촌 여성들의 성병 관리에 직접 나섰다. 여성들의 건강 유지나 공중 보건이 아닌 미군에게 깨끗한 성접대를 하기 위한 목적이 더욱 컸다. 강제적 성병 관리 과정에서 여성에 대한 인권 침해는 극악한 수준이었다. 성병에 걸린 미군이 헌병과 함께 찾아와 성병 감염 의심 위안부를 찍으면 여성은 해명 기회도 없이 연행됐다. 보건소에서 성병 확진 판정을 받은 여성은 낙검자 수용소에 갇혔다.

낙검자 수용소에 갇힌 여성은 과도한 페니실린 주사를 맞았는데 부작용은 생명을 위협할 정도로 심각했다. <한겨레>가 입수한 1978년 보건사회부가 법무부에 보낸 공문(페니실린 과민성 쇼크 사고 처리에 대한 협조요청)을 보면, 보건사회부는 법무부에 “일부 의사들이 페니실린 과민성 쇼크 사고 발생으로 주사행위를 기피하고 있어 국가 성병 관리에 지장을 초래하고 있는바, (사고를 낸 의사에 대하여) 면책하여 주실 것을 협조요청한다”고 밝혔다. 당시 법무장관은 이를 받아들여 ‘의사들을 불기소처분 하겠다’는 회신을 보냈다.

낙검자 수용소에 끌려간 여성들은 죽음의 공포 앞에서 수용소를 탈출하려다 다치거나 죽기도 했다고 기지촌 여성들은 증언하고 있다.

국가는 기지촌 여성들을 외화 획득의 전진 기지로 생각했다. 1973년 민관식 문교부 장관은 “조국 경제 발전에 기여해 온 소녀들의 충정은 진실로 칭찬할 만하다”고 말해 논란이 됐다. 1959년 10월 한 국회의원은 “외국 군인들을 만족시키는 매춘 여성이 있어야 하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말하기도 했다.(<국회 속기록에 나타난 여성정책 시각: 매매춘에 대하여> 87쪽. 조형·장필화) 국가 공무원들은 기지촌 여성들을 한두달에 한번씩 한곳에 모아 ‘위안부는 조국을 위해 외화를 버는 애국자다’라고 교육했다.

기지촌 여성 태반이 미성년자이고 인신매매당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에 대해 국가는 애써 눈을 감았다. 많은 여성들은 포주의 횡포와 인신매매 피해로 생긴 빚을 피해 기지촌을 탈출하려고 노력했지만 기지촌 인근의 경찰들은 외면했다. 유엔 인신매매금지협약은 “성매매를 목적으로 타인을 합의 여부에 불구하고 소개하거나 유혹 또는 유괴하는 자, 합의 여부에 불구하고 타인의 성매매 행위를 착취하는 자를 처벌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인신매매 피해에 대해, 인신매매 순간부터 그 이후의 과정까지 전체적으로 살펴보는 것이다.

경기도는 미군의 수에 맞추어 지역별 위안업소의 수를 조절하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허재현 기자
경기도는 미군의 수에 맞추어 지역별 위안업소의 수를 조절하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허재현 기자
기지촌에 원해서 들어갔다는 반론

기지촌에 원해서 들어간 여성들도 많다는 반론도 있다. 그러나 국가의 책임을 강조하는 학자들은 ‘어떻게 군 위안소로 흘러 들어갔는지도 봐야 하지만 여성들이 어떤 처지에 놓여 있었는지를 분석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반박한다. 이재승 교수(건국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는 “자발적으로 들어갔건 강제로 들어갔건 여성들이 자유롭게 일을 그만둘 수 없는 상황을 국가가 방조했다면 국가의 책임을 물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위안부라는 용어를 기지촌 여성에게 쓰는 것이 적절한지도 논란이 될 수 있다. 정부가 이들을 위안부라고 설사 불러왔다 하더라도 현재의 ‘종군위안부’라는 개념으로 쓴 것은 아니라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전쟁 상태이든 휴전 상태이든 인신매매되어 기지촌에 팔려가고 여성들의 신체 상태가 자유롭지 못했다는 점에서 같은 위안부 피해 구조로 봐야 한다는 재반론도 있다. 이 부분은 우리 사회가 합리적으로 답을 찾아야 할 과제이다.

‘기지촌 위안부 국가배상 소송단’은 피해 내용을 성폭력, 구타, 감금, 성매매 강요, 인신매매, 마약 투여, 강제낙태, 업주와 공무원 유착 비리 등 총 18개 세부항목으로 나누어 국가의 배상을 요구하는 소장을 지난달 25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제출했다. 피고는 대한민국 정부와 법무부다. 두세달 뒤부터 열리게 될 심리에서 소송단과 국가 양쪽의 치열한 공방이 예상된다.

국회에서는 새정치민주연합 일부 의원들을 중심으로 ‘위안부 피해 진상규명과 지원 등에 관한 특별법’ 제정을 준비한다. 유승희 의원은 “국가 안보상 미군 주둔의 필요성 때문에 미군 기지촌 형성을 국가가 용인한 것이다. 이곳에서 있었던 인권 침해와 국가의 책임이 각종 문서들로 파악되고 있기 때문에 국가의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기억하고 반성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된다. 현재의 일본 우익들이 그러는 것처럼.

허재현 기자 catalunia@hani.co.kr

#주요 참고문헌

<미군 위안부 역사 2014 자료집>(김현선·신영숙)

<미군 위안부 기지촌의 숨겨진 진실>(김정자)

<탈식민주의 페미니스트 읽기: 기지촌 성매매 여성과 성별화된 민족주의, 재현의 정치학>(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2008)

<한국 성매매 정책에 관한 연구>(박정미 한양대 HK연구교수, 2011)

<동맹 속의 섹스>(캐서린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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